발생기의 우리학교 VOL.24 시가(滋賀)조선초급학교
(글 이상영)
- 제제(膳所)소학교 민족학급 수업풍경(1958년) -
민족학급에서 민족학교로
1949년 학교폐쇄령 이후 일본 각지에 조선학교가 재건되기까지의 경위는 다양하다. 시가현(滋賀県)에서는 ‘민족학급’을 거쳐 민족학교가 재건되었다.
60년 4월, 시가 조선중급학교(후에 초·중급학교가 되었음, 현재는 초급학교)가 개교하기까지의 역사를 돌아본다.
- 제제(膳所)소학교에 설치된 민족학급 아이들과 교원 정재우씨 -
민족학교의 폐쇄로 민족학급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시가현에는 약 2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국어강습소가 여러 곳에 만들어졌고, 그 후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산하에서 차츰 학교로 정비되어 갔다. 시가현의 조선학교는 46년 5월 당시 22개교(학생 1,260명, 교원 60명), 48년 2월에는 18개교(학생 774명, 교원 38명), 49년 5월에는 13개교(학생 580명, 교원 16명)였다. (괄호 안 숫자는 박경식 著 「재일조선인 관계자료집성 <전후(戰後)편>」 제1권, 이은식 著 「<재일>민족교육의 여명 1945년 10월~48년 10월」에서)
49년 10월, 학교폐쇄령에 의해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는 강제적으로 폐쇄되고 마는데, 시가현에 만들어졌던 11개교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 후 민족교육은 다양한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해 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족학급’이다. 민족학급은 일본의 공립학교 안에 설치된 조선인 아동·학생을 위한 특설교실로 1952년 당시 13곳 부(府)와 현(県)에 있었다. 시가현에는 전성기에 18개 학교에 민족학급이 설치되었고, 조선인 아동의 취학률이 57년 당시 70%가 넘었다.
- 사메가이 민족학급의 아이들과 교원 이규태씨(53년경) -
민족학급이 설치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조선학교측이 조선인 아동·학생의 미래에 대해 교육위원회측과 교섭을 거듭한 결과, 일본학교에서도 과외로 조선어수업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충분한 수준이 아니었다. 49년 11월 29일자 <아사히 신문> 시가판에 따르면 현 교육위원회는 이 문제와 관련된 각 시정촌장에게 조선어는 과외 수업 형태로 희망자에게 주 4~5시간 가르쳐도 좋지만, 조선인만의 특별학급과 분교 설치는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이처럼 일본학교의 분교라는 길조차 막혀버린 상황에서 공립소학교 내에 자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민족학급의 설치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해 갔다.
- 조련 구 오츠학원(大津学院) 아이들과 교원들(1948년) -
50년에 들어서 각 시정촌장과 교육위원회, 소학교 교장들이 앞장서서 길거리 전단지 배포와 서명 모집운동, 동맹휴교와 같은 활동이 이어진다. 조선인들의 끈기 있는 투쟁에 행정당국의 의지는 꺾이고 만다.
6월, 쌍방은 주10시간 정도 민족과목을 방과 후에 수업하고, 현내 각 학교에 조선인 교사를 증원 배치, 교원의 급료 증액 등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기에 이른다.
전국의 모델이 되었던 <시가 조선학교>
시가현의 민족학급 교사와 총련 현본부위원장,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한 故이규태(李圭台)씨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50년 초부터 사메가이(醒井, 지금의 마이바라(米原)) 지자체장에게 민족학급 개설을 부탁했어요. 일본학교의 교실을 빌려 방과 후 1~2시간 정도 조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하루가 멀다하고 부탁했더니, 3월말이 되자 결국은 ‘빌려 주겠다’고 해 4월부터 사메가이 소학교에 2개 교실의 민족학급을 만들게 됐어요. 이듬해부터는 마이바라 소학교의 민족학급을 맡았어요. 2개 교실에 아동은 60명 정도. 처음에는 체육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같은 장소를 내주었는데, 비좁아서 교재도 두지 못하는 형편이었어요.”
- 시가조선초중급학교 운동회 모습(64년경) -
시가현의 민족학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앞서 말한 이규태씨의 증언과 시가 조선초급학교의 정상근 교장이 정리한 「시가현의 민족교육의 흐름(滋賀県における民族教育の流れ)」에 따르면,
● 복식학급으로, 조선어 이외에도 다양한 교과를 가르쳤다.
● 전용 교실이 있었다.
● 총련 결성 전에는 조련과 민전 시절의 교과서를, 결성된 후에는 총련이 만든 교과서를 사용.했다
● 조선인 교사는 직원실에서 일본인 교사와 책상을 나란히 했다.
등이다.
죠토(城東) 소학교의 민족학급을 예로 들면, 2개 학급으로 나뉘어 역사, 음악, 이과, 산수, 공작, 체육 등을 가르쳤다. 주목해야 될 것은 방과 후가 아니라 오전 중인 3교시부터 공부하는 전일제 방식의 학급이었다는 것이다.
비와호(琵琶湖)일대 각 지역단위의 민족학급이 모여 ‘학교’를 구성한 것도 특징의 하나다.
코토(湖東) 조선초중급학교는 마이바라(米原), 사메가이(醒井), 히코네 죠토(彦根 城東)등 3곳의 소학교에 있던 6개 학급과 마이바라에 있는 1개 학급을 모은 총 7개 학급으로 구성되었다.
- 당시 일본학교와 민족학급 통신표 -
마이바라중학교의 민족학급은 당시 중학교 민족학급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했다. 아이들은 입학식과 졸업식을 일본학교와 민족학급 두 곳 모두 참석해 통신표와 졸업증서도 2개씩 받았다.
전국적인 행사로는 운동회와 학예회가 있었다.
“민족학급이 없는 지역의 아이들도 참가해 활기가 넘쳤다” 고 이씨는 회상했다.
시가현의 민족학급은 당국의 통달에 따르면서도 당국에서 비용을 받아 전용 교실을 만들었고, 교원도 학부형회 또는 교육대책위원회 추천을 받아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당국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억제해 비교적 자유로이 민족교육을 실시한 것이 시가현 민족학급이 다른 지역 민족학급의 ‘모델’로 평가되는 이유라고 한다.
- 시가 조선초중급학교 옛 목조 교사 -
1960년에 중급학교 창립
60년 4월 24일, 오우미하치만시(近江八幡市)에 시가 조선중급학교가 개교한다.
49년에 민족학교가 폐쇄당한 이래, 재일조선인의 자주적인 학교로서는 지금의 시가초급학교 의 전신인 조선초중급학교다.
중급학교가 먼저 생긴 것은 50년대 말부터 고양된 귀국운동과 관계가 있다. 당시 현내 중학교에 설치된 민족학급은 1개소 뿐. 귀국을 염두에 두고 단기간에 모국어와 그 밖의 교과를 가르치는 중학교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 사용하지 않는 공민관을 1년 기한으로 빌려서 학생 약 90명, 교원 3명으로 시작했다. 그 후 동포들이 많은 오츠시(大津市)에 자비로 마련한 학교를 세우게 된다. 학교부지는 화재로 타버린 방적공장이 있던 곳을 사들였다. 새로운 교사가 62년 12월에 완성되었다. 이듬해에는 초급부가 병설되어 초·중급학교가 되었다. 이 때문에 현내 민족학급은 점점 폐지되어 조선학교로 일원화되어 갔다.
*월간 <이어> 2017년 2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