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 27 도쿄 조고(朝高) 축구부(下)
(글 장혜순)
최고 실력의 “무관(無冠)시대”
제33회 전국 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4위의 쾌거를 이룬 도쿄조선고급학교 축구부였으나, 대회 참가는 한 번 뿐이었다. 대회 출장 자격에 제약이 가해진 것이다. 실력을 시험해 볼 기회를 잃은 조고 선수들은 몹시 낙담했다.
- 도쿄조선고급학교와 아오야마 고교 제5회 정기전(1975년 11월) -
아오야마 고교의 스즈키(鈴木) 주장
불길한 징조는 도쿄조고 축구부의 전국대회 출장이 결정된 때부터 나타났다. 조고가 도쿄도 예선 결승에 진출하고 얼마 되지 않은 54년 12월 16일, 호치신문(報知新聞)은 <조선고교 참가 ‘기다렸다’>는 제목으로 오사카의 고체련(전국고등학교체육연맹)이 조고가 전국대회 출전하는 것에 제제를 가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도쿄도 고체련 이사였던 마츠우라 토시오(松浦利夫)씨는 회상한다.(79년 고교축구 연감)
“…아오야마 고교, 샤쿠지이(石神井)고교도 어이없이 석패해 조고가 우승하고 말았다. 전국대회 매치 라인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곧바로 전국 고체련의 故성회장에게 전화로 야단을 맞았다. 고체련은 일본의 고교생을 위한 단체인데 대체 뭘 하는 거냐며 혼이 난 기억이 있죠. 전화로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어서 방과 후에 쿠단(九段)고교로 찾아갔죠. 그리고 ‘같은 도립고교라는 것’과 ‘외국 국적의 선수 출전제한 규정은 없으니 이제 와서 출전 취소는 불가능 하다’고 설명했지요. 그랬더니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라’고 하더군요. 곧바로 사무국장이었던 故사토쇼고씨를 긴끼지역으로 파견해 고체련의 양해를 구하게 했어요.”
55년 4월에는 도쿄조고가 도립학교에서 자주학교로 이관된다. 해가 바뀐 55년 4월 16일, 쿠단(九段)고교에서 도쿄도 고체련의 총회 및 각 부회가 열려 <조고의 참가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는 각 축구부의 주장이 참가했다. 마츠우라 고교 이사는 아오야마 고교 축구부 주장인 스즈키 요이치(鈴木洋一, 80)씨를 지명하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견을 물었다. 전년도 전국대회 도쿄도 예선 결승전에서 조고에 2-0으로 패해 통한의 눈물을 삼켰던 장본인이다. 스즈키씨는 대회예선에서 조고의 플레이를 보았다. “중심을 낮춘 끈질긴 발 기술, 단숨에 역전시키는 기세도 훌륭하고, 이따금씩 보이는 순발력이 뛰어난 강한 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회의에서 스즈키씨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스포츠에 국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외국인이라는 것, 몹시 강하다는 것 때문에 조고를 실격시키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강한 팀은 전체의 레벨 향상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이번에야말로 꺾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아오야마고교는 조고가 계속 고체련에 가맹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 1972년 2월, 조선의 <4.25축구단>이 일본 축구협회의 초대로 일본 방문 -
“회의가 끝나자 조고의 김세동감독과 이동연주장이 저한테 다가와 ‘스즈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너의 의견을 듣고 감동했다’고 말했고, 두 사람과 힘껏 악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허무하게 대회 조건에 <외국인만을 수용하고 있는 학교의 참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참가 제한을 붙여 조고가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후 조고가 다시 전국대회에 출전하게 되는 94년도까지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마츠우라고교 축구부장은 ‘조고 선수들에게 참으로 딱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강호 축구팀 학교와 정기전이 시작되다
당시 선수들은 얼마나 낙담했을까. 1학년 때 전국대회에 출전했던 김명식씨는 ‘시합에 굶주려 있었다’고 실의에 빠졌던 당시를 회상했다. 실력은 전국 최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험해 볼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로 절차탁마를 바랬던 선수들과 지도자들의 간절함이 결실을 맺었다. 앞서 말한 회의에서 스즈키씨의 이야기에 감동한 김감독이 ‘이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와 정기전을 해보지 않겠습니까?’라고 아오야마 학교에 요청해 55년 봄부터 두 학교는 봄, 가을로 1년에 두 번 정기전을 하게 되었다.
59년 12월 6일에는 제1차 귀국선을 타게 된 조고의 선수를 배웅하는 의미로 아오야마 고교가 환송 시합을 기획했다.
“아오야마 고등부 교원인 고토씨가 ‘조일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었을 때에는 공식적인 국제시합으로 이 정기전을 치루고 싶다’고 인사를 하니, ‘언젠가는 평양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고 남일용 조고교장이 답했다…”(아사히신문 1959년 12월 7일자)
시합은 3-0으로 조고가 이겼다. 아오야마 고교와의 정기전은 86년 6월까지 38번을 치렀고, 조고는 37승 1패의 전적을 남겼다.
60년대부터 ‘조고는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조고가 전국대회의 대표로 선발된 강호팀에 압승을 거두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일본 언론들이 ‘무적의 도쿄조선중고급학교’라며 떠들썩했던 그 시절이다.
- 조고 축구부 활약을 보도하는 일본 신문 -
72년도 첫 조국방문
앞서 말한 김명식씨가 이 학교 축구부 제3대 감독에 부임한 것이 1971년. 김씨는 조고 졸업후에 진학했던 츄오(中央)대학에서도 축구를 계속해 대학선수권대회 최초 우승에 공헌한데다 졸업 후에는 재일조선축구단에서 주장을 맡기까지 했다. 톱 주자로 계속 뛰어온 김씨가 감독으로서 목표로 삼은 것은 기술과 전술의 침투였다.
“팀이 강해지는 요소는 기술, 정신력, 파워 플레이죠. 연습 전반에는 볼 컨트롤, 몸의 밸런스를 키우는 훈련을 병행하고, 후반에는 패스, 드리블, 슛 연습을 철저히 했죠. 1학년 때 기술의 기초를 몸에 익히고, 2학년 때는 전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키우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당시 아이들은 전문적 지도를 목말라 했으니까요.”
55년 <전국대회 4강>이 가져다 준 일본 고교 강호팀과의 정기전은 계속되었다. 아오야마, 테쿄(帝京), 나라시노(習志野), 우라와(浦和), 시미즈 히가시(清水東), 야마나시(山梨), 무로란오오타니(室蘭大谷) 등의 축구부가 전국대회에 앞서 조고와 시합을 갖고 실력을 시험했다. 그 중에서도 관계가 깊었던 것은 테쿄 고교와 나라시노 고교였다.
71년도 고교선수권에서 우승했던 나라시노 고교의 습우회(習友會)는 72년 5월 북한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7월에는 도쿄조고 축구부가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해 김일성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 앞에서 현지 고교와 시합을 하고 전문적인 강습도 받았다.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8강에 빛났던 조선의 축구는 제 목표였고, 동경이었습니다.”(김명식)
조국방문에서 힘을 얻은 조고축구부의 승승장구는 멈추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의 강호 학교가 모이는 전국 고교축구 친선시합에서 준우승, 도쿄선발전에서 압승이라는 전적을 올린 기세를 보여준 명 팀이 태어났다.
그러는 동안 일본고교 강호팀 감독들이 조고의 공식전 참가를 요구하며 서명모집을 해주었다. 김명식씨는 기회의 문이 열리는 때를 기다리며 시합 기록과 조고가 소개된 신문, 축구 전문지 기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87년 김명식씨가 조고 감독을 퇴임하던 때 모임을 기획했던 나라시노 고교의 감독은 다음과 같은 인사를 보냈다.
“…많은 일본의 감독이 조고와의 교류 시합을 통해 한 수 배우고, 김선생님에게 자신들의 팀을 보여주며 그 차이를 헤아렸고, 지도 기준과 자신감을 갖고 팀 강화에 정진하며 힘을 얻어왔다… 김선생님이 이끌었던 조고 축구,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일본 고교 축구의 나침반이며, 별이고, 동경이 되어주길 바란다.”
*월간 <이어> 2017년 6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