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1 조선대학교 연극부
(글 황리애)
시대별 테마, 조선말로 계속 묘사해간다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다양한 테마를 표현하며 최근 안팎으로 활동을 주목받고 있는 조선대학교 연극부. 초창기에서 현재까지를 돌아보며 연극부의 활동과 의의를 소개한다.
- 74년 공연한 <푸른 잔디(青い芝)> 왼쪽 끝이 고 남상혁씨 -
연극 운동의 발전 속에
해방 후 재일조선인에게 연극은 긴장된 정세 속에서도 민족심을 지키고 동포들이 단결하도록 계몽하는 든든한 수단이 되어왔다. 「재일조선연극운동일지」에 의하면 1945년 10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내에 ‘문화공작대(文化工作隊)’가 만들어져 이 무렵에 이미 각지에서 연극 활동을 비롯한 문화공연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련이 강제 해산(49년)된 후에도 연극운동의 중요성을 자각한 동포문화인들이 모여 이듬해 1월에 <모란봉극장>이라는 이름의 극단을 결성. 그 후 총련이 결성된 후에 <재일조선중앙예술단 연극부>(62년 3월 초연), <재일조선 연극단>(65년 1월 창립, 이하 ‘연극단’)으로 발전해 간다.
동시에 연극운동은 동포사회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최고학부인 조선대학교(56년 창립, 59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이와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식으로 발족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71년도에 입학한 연극부 OB에게 ‘선배’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 80년도에 잠시 활동이 휴지 상태가 되었다(후술)는 것, 연극부의 고문을 맡았던 고 남상혁(南相赫)씨가 조선대학교 문학부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것이 65년이라는 것 등에서 적어도 60년대 후반에는 ‘연극부’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70년대 중반까지는 <고향> <우리를 기다리라> <그날은 오리라>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품을 학내에서 다수 공연했다.
또 74년에 <연극단>이 <재일조선중앙예술단>과 통합되어 <금강산가극단>으로 개칭되기 이전에는 조선대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했던 멤버가 졸업 후 진로로 <연극단>에 배속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일본 고교에서 조선대학교에 편입해온 학생들이 수개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조선말을 배워 그 성과를 발표하는 장으로 개최한 문화공연의 지도를 주로 연극부가 담당했다.
- 79년 학교 밖에서 상연된 조대 연극부 공연모습과 전단지 -
활동 휴지, 리뉴얼
79년에는 <조선대학교 연극부 공연>이라는 제목으로 아라카와 구민회관에서 작품을 상연.
연극부 OB, OG들도 출연해 당시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그린 <평화시장>(각본 남상혁)을 공연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연극부의 고문을 맡고 있는 김정호(金正浩 57)씨가 이때 대학 1학년생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남상혁씨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연극부는 활동을 일시적으로 휴지하게 된다. 대학 측이 대외선전을 위해 기획했던 연극작품에 학생이 출연하는 등 단발적인 활동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학내에서의 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호씨도 대학4학년 때에 학생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대외공연 연출을 담당했다. 1학년생을 중심으로 고급부 시절에 연극 경험을 했거나 연기가 가능한 학생을 모집해 일본학교의 학원제에서 공연을 성공시켰다.
전기를 맞이한 것은 85년. 김씨가 연구원을 거쳐 조선대학교 문학부의 교원으로 배속되었던 해다. 앞서 말한 대외공연에 참가했던 멤버가 4학년이 되어 교원으로 돌아온 김씨에게 ‘다시 연극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씨는 고문직을 받아들여 5년 만에 연극부가 부활했다.
같은 해 황해도 출신의 작가 이인석(李仁石)씨가 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촉발되어 쓴 희곡 <날개(つばさ)>를 학내에서 상연. 이를 계기로 활동이 정상화 되고, 부원이 늘어감에 따라 조금씩 OB와 학생이 쓴 각본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선과 한국에서 쓴 각본이 아닌, 재일조선인의 생활을 반영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출, 연기, 작품의 컬러가 크게 달라졌고, 이 무렵의 스타일이 현재 연극부의 토대가 되었다.
무대와 객석이 가까워진 것도 이 시절이다. 휴지기 이전에는 넓은 강당에서 마이크를 세워놓고 무대와 객석에 거리가 있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김씨는 배우들의 호흡이나 리얼리티를 보다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소공간, 소규모로 형식을 전환시켰다.
90년대에 들어서 연극부 활동의 폭이 단숨에 넓어진다.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를 돌며 OB와 학생이 만든 오리지널 작품 공연이 늘어났다. 아동, 학생뿐만 아니라 지역의 동포들도 찾아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97년에는 총련 도쿄도본부가 주최하고 도쿄도내 조선학교에 다니는 소년단원(초급부 4년~중급부3년)을 대상으로 연극부의 레퍼토리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봉숭아꽃 피는 날에>를 상연. ‘모국어에 의한 재일동포 삶의 표현’을 테마로 88년에 만들어진 극단 <아람삼세>(주재자는 김씨)와의 협연이었다. 각지의 조선학교 아동, 학생들이 수학여행 등으로 조선대학교를 찾아올 때마다 작품을 보여주는 일도 많았다.
- 2017년 4월 공연된 신입생환영공연 <누구를 위하여> -
조선말 연극, 계승해 가고 싶다
2000년대 이후가 되자 더욱더 다양한 기관에서 공연 의뢰가 오게 된다. 2003년, 관동대지진으로부터 80주년을 맞는 계기가 된 해에 열린 위령제에서는 조선인학살의 역사를 전하는 내용의 연극을 아라카와(荒川) 제방에서 공연했다.
“실제 트럭까지 등장해 짐칸에 시체를 내던지는 상황을 재현하기도 하고, 객석에 ‘바람잡이’를 배치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고 외치게 하기도 했죠.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김씨)
한편 2004년 3월에는 설립 10주년을 맞은 동포 결혼상담소가 주최한 이벤트에서 민족결혼을 테마로 한 작품을 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이 때 함께 출연했던 연극부 멤버가 그 후 결혼을 했는데, 본인들이 희망해 결혼식에서도 같은 작품을 상연했어요. 게다가 올해 11월에 또 한 쌍, 이 작품에 출연했던 멤버의 결혼식이 있죠.”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고.
그밖에도 동포사회 안에서 다양한 활약을 보여 온 조선대학교 연극부.
최근에는 학내 정기공연(연간 4회)에 식민지시기 조선의 시인 문병란(門柄蘭)의 작품 「식민지의 국어시간」에 착상을 얻은 동명의 연극작품을 가지고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를 순회 공연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포사회에서 오랫동안 연극운동이 계승되어온 것이 증명하듯 연극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유력한 수단입니다. 특히 우리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문제를 전하기 위해 조선말로 연극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조선대학교의 연극부는 지금 일본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유일한 상설극단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김씨.
졸업 후 조선학교의 교원이 된 연극부원들이 각각의 현장에서 연극을 보급해주고 있는 것도 기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