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28 <교원 편> 지리학자 사공준(司空俊) 선생님
(글 장혜순)
‘존재의 기적’ _ 지리학의 힘으로
태어난 땅 조선을 떠나 일본의 교육을 받은 한 청년이 조선 지리에 눈을 떠 연구자, 교육자로서 살아 온 여정. 6월 3일 생을 달리한 재일조선인 지리학자의 생애를 따라가 본다.
사공준 (司空俊) 선생님
1936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남. 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60년에 후쿠이대학 학예학부 졸업 후 효고현에 있는 조선학교에 교원으로 부임. 66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 교원, 학부장을 역임.
지리학 박사.
화석에 눈 뜨다
사공준 선생이 나가노현 우에다(上田)의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던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일본에 건너온 것은 1941년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할아버지가 46세에 ‘항일투쟁에 나선다’며 만주로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기에 3대에 걸친 이향(離鄕)이었다.
8형제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나가노, 교토, 미에, 후쿠이 등 토목, 철도,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중노동을 해 가족을 부양했다. 45년 8월의 조국해방은 후쿠이현 요시다군(吉田群)에 있는 함바(노동자 숙소)에서 맞이했다.
동포들의 축하 모임에 참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캔디를 먹었던 8월 15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때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GHQ가 재일조선인의 아이들까지 붙잡으러 온다는 소문이 돌 때마다 일본학교의 담임이 몸을 숨기라고 알려왔다.
지리학에 눈을 뜬 것은 후쿠이대학 시절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토목공사, 담요재료 제조, 가정교사, 양돈, 야간 경비, 화물 운반 등 아르바이트라면 닥치는대로 했는데, 토목 일을 하던 중 흙을 파다가 이따금 나무와 식물 잎의 화석을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보면 1억년, 5억년, 10억년 전으로 시간이 단축되는 느낌이 들었지요. 어느 화석이나 같은 모양이 없었으니까요.”
시공을 초월한 화석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동포 아저씨로부터 ‘대학생이니까 화석 이름도 알고 있겠지’ 라는 말을 듣고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워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화석을 파고드니 지층을 모르면 안 되었고, 지층을 알려고 하니 암석을 공부해야만 했다. 또 암석을 알려면 지각변동을 공부할 필요가 있었지요.”
효고현의 조선학교에 부임
대학의 지질학 교실의 협력을 얻어 힘든 실습을 거듭하면서 암석 분류법, 광물 감정법, 화석조사법 등을 습득했다. 후쿠이 기상대에 다니며 일기도와 기상도 작성법, 기압배치의 특징, 기압의 정시측정법, 풍향, 풍속측정법을 배운 것도 이 무렵이다. 후쿠이현의 산과 강을 거의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조사에 몰두했다.
'하천에 퇴적한 암석과 모래에서 상류를 상상하는 일이 큰 즐거움이다' 라고 당시 일기에 적혀 있다.
공부를 하는 한편 재일조선인 유학생동맹 호쿠신에츠(北信越)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분주한 학생시절 보냈다.
“아무튼 되도록 안 먹고 식비를 아껴서 교통비와 숙박비를 만들어 1년 가까이 걸쳐 후쿠이, 가나자와, 토야마, 신슈, 니가타 대학 등을 돌며 초대 위원장을 맡았죠.”
이듬해 조국에서 보내온 장학금을 제1호로 받았다. 30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것을 가족과 후쿠이에 있는 동포들이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효고현에서 조선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가난했던 동포사회는 ‘먼저 배운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첫 부임지였던 세이방(西播) 조선중학교에서는 일본학교에서 편입한 학급 아이들을 담임했다.
“저녁밥을 먹여주겠다고 학생들을 불러 모아서 그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4개월 후부터는 우리말로 수업을 할 수 있게 됐죠”라며 웃는다.
66년부터는 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 교원이 된다. 커리큘럼을 만드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대학 도서관에 있던 책을 한쪽 끝에서부터 모두 꺼내 지리에 관한 것은 모조리 옮겨 적었다.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73년에는 공화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조선의 지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조국 땅을 직접 눈으로 본 감동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해돋이를 관측하고 관광지와 명소를 걸으며 그 토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사람들의 생활 모습 등을 기록하는 독자적인 현지 조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백두산 천지, 박연폭포의 포트홀, 동해의 해변…. 어머니 같은 대지를 온 몸으로 느끼고, 정성들여 조사와 기록을 거듭해 그 연구 성과를 조선학교의 지리교과서와 논문에 쏟아 넣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의 자연개조>는 20대 시절부터 강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테마였다. ‘식민지시대, 조선은 일본에 의해 자연이 파괴당하고, 지하자원을 약탈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회복시키며 국가 건설을 해 왔던가.’
역사적 존재인 재일조선인의 삶에도 연결되는 문제의식이었다.
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 지리학과의 인기를 뒷받침했던 공로자이다. <조선신보> <새 세대> <오늘의 조선> 등에 조선 지리의 연재를 담당하고, 종횡무진 팔도강산을 기록해 나갔다.
일본의 지리학 전문지에도 조선 지리에 관한 의견을 다수 발표했다. 국내외의 학회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발표한 논문은 556편을 헤아린다.
조선과 일본의 지리학자와의 공동연구에도 힘을 쏟아 약 38억년~5억년, 7억년 전으로 알려진 캄브리아기 지질 시기와 백두산 분화시기에 관해 연구를 거듭했다. 일본과 북한이 국교를 맺지 않은 현실에서 작은 민간교류의 재개를 바라는 나날들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잇는 지리학
조선대학교를 정년퇴직한 후에도 조선반도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전문지에 발표를 계속해 왔다.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책상에 앉아 조선의 지리와 경제의 시사 뉴스를 정리한 리뷰를 전송하는 의욕적인 필자이기도 했다.
어째서 조선 지리를 연구했나.
“지금부터 백년 전에 당신의 선조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생명이 이어져 온 시간의 흐름이 있다. 생명이 이어져 온 또 한 가지 요소는 공간이다. 공간이 바로 지리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것에 지리를 연구하는 의미가 있죠.”
“일본에서 조선의 지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지리를 가르치는 일로 자이니치 학생들을 변화시키고 싶어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걸까? 사람이 달라지는 계기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에 찾아와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자각한 인간은 강합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소년 같은 눈빛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취재가 있은 2주 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지리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산처럼 많아요. 지리학자는 어디든 찾아가 조사를 계속해야 됩니다” 이 말이 입버릇이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연구열을 품고 살아온 생애였다.
*월간 <이어> 2017년 7월호에서
첫댓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자각한 인간은 강합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깊게 와 닿는 말씀이네요.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