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0 재일조선초급학교 중앙축구대회
(글 이상영)
- 초기 대회 모습, 1983년 제5회대회 결승전 세이방초급 vs 기타오사카초급 -
제1회 우승학교의 영광은 영원히
‘꼬마축구’라는 애칭으로 친근해져 수많은 드라마를 펼쳐져 온 재일조선초급학교 중앙축구대회가 올해로 39회를 맞는다. 제1회 대회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춰 우승학교인 세이방조선초중급학교(효고현 히메지시)의 발자취도 따라가 보고 그 역사를 풀어본다.
최조의 전국 레벨 대회
제1회 대회는 1979년 6월 8일~10일에 개최되었다.
대회의 정식명칭은 '총련결성 24주년 기념 재일조선초급학교 학생축구대회'.
재일본조선인 축구협회가 주최하고 도쿄대학 케미가와 운동장(치바현 치바시)과 도쿄조선중고급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참가한 이들은 일본 각지의 지방예선을 거쳐 올라 온 36개 팀으로 600명의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예선 참가는 69개교)
그때까지 초급부 축구는 관동(関東)대회, 긴끼(近畿)대회 이외에 몇몇 현에서 대회가 치러진 정도로 전국규모의 대회는 없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조선학교 선수 육성사업에 힘을 쏟아왔는데, 그 일환으로 초급부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초기 대회는 월드컵처럼 각 지역의 예선을 거치고 올라 온 강호 팀이 모이는 이미지였다.”
오랫동안 운영에 종사해 대회의 변천사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 이강홍(李康弘, 54)이사장의 말이다.
당시 팸플릿을 보면 후원단체로서 재일본조선축구단 후원회의 이름이 올라있다. 70년대에 결성되었고 주요 회원은 상공인이다. 선수들의 숙박비, 식사를 비롯해 대회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했다. 당시의 조선신보에 후원회의 활동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아도 그 존재감을 알 수 있다.
영광스런 제1회대회의 우승학교는 효고현 히메지시의 세이방(西播)조선초중급학교.
히메지시(姫路市)에 거주하는 한동수(韓東洙, 50)씨는 당시의 우승 멤버다. 등번호 11번으로 포지션은 오른쪽 날개, 지금으로 말하면 측면 공격수로 팀의 부주장도 맡았다.
당시, 이 학교 초급부 축구부는 히메지시내에서 단연 선두로 최강을 자랑했다.
“남자 아이들 대부분이 축구부에 들어가던 시대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같이 축구연습을 했고 훈련은 혹독했다. 일요일도 오전오후 꽉 채워 훈련을 했는데, 시합이 있는 날이 가장 즐거웠다.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갈 수 있었으니까.(웃음)”
효고현의 초급학교 10개교 가운데, 세이방과 아마가사키(尼崎)초급, 히가시고베(東神戸)초급 3개 학교가 예선을 통과해 본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 83년 제5회 대회 -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세이방초급
대회가 시작되자 세이방초급은 파죽지세의 승승장구를 보였다.
첫째 날, 36개 팀이 12그룹으로 나뉘어 리그전을 펼쳤다. 7조에 들어있는 세이방초급은 이바라키(茨城)초급에 3-0, 요코스카(横須賀) 초급에 8-0이라는 압승을 거두고 그룹 1위로 둘째 날 2차 리그에 진출한다.
여기서도 도쿄 제9초급을 2-0, 히가시오사카(東大阪) 제3초급을 3-1로 물리치고, 준결승 진출을 결정했다. 한씨의 말에 의하면 시합 전에는 어딘가 풀어진 분위기에서 일변해 승승장구 했는데, 그때까지 맛본 적 없는 긴장감이 엄습해왔다고 한다.
드디어 마지막 날. 대회장을 도쿄중고 운동장으로 옮겨 준결승과 3위 결정전, 그리고 결승이 치러졌다. 결승은 시모노세키초급을 2-0으로 물리친 세이방초급과 히가시오사카 제5초급을 2-0으로 이긴 교토 제2초급의 간사이(関西)지역의 강호 두 학교의 대결이었다.
관람석은 초만원.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아 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북한 선수단도 시합을 관람했다.
‘그토록 많은 관람객 앞에서 시합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한씨와 선수들에게 힘이 된 것은 출신 지역인 효고현에서 응원을 온 선수들의 보호자 30여 명으로 이뤄진 응원단이었다.
시합은 2-0으로 세이방초급이 리드한 채 종료 휘슬이 울렸다. 선수들은 응원단 앞으로 달려가 포옹하며 기뻐했다고 한씨는 회상했다. 6전 전승, 총득점 20점, 실점 1점으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우승이었다.
쾌거를 올리고 개선한 선수들을 히메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맞아주었다.
“홈에서는 ‘만세~!’ 소리의 대합창이었다. 그때서야 ‘우리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는 실감이 들었죠.”
세이방초급은 제1회 대회에 이어 제5회에서도 우승한다. 제9회까지는 거의 매년 4강에 들었다. 대회 초창기는 서일본 학교가 성적상위를 차지하는 ‘서고동저’가 계속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세이방초급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제7회(85년)~제9회(87년)에 걸쳐 3연패를 달성했던 동일본의 강호 사이타마초급과 더불어 초기 대회를 주도했다.
“실력의 비밀이요? 우린 초중급학교였기 때문에 중급부 선배들의 발기술을 흉내 내는 연습을 반복하며 실력이 늘었는지도 몰라요. 이후에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비록 놀이를 하더라도 승부에는 반드시 이기려고 했으니까요.”(한씨)
대회를 통해 생겨난 인연은 그 후에도 다양한 장소에서 계속되었다. 결국 실현이 안 되었지만 사회인이 된 후에 당시 결승전에서 싸웠던 멤버들로 시합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도 1년 1~2회, 그 당시 멤버들이 고문 선생님을 중심으로 모인다.
“마지막은 반드시 꼬마축구 우승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한씨)
육성의 장을 동포가 모이는 장으로
꼬마축구는 내년에 큰 전환점이 되는 40회를 맞는다.
‘치열한 승부의 장에서 육성의 장, 동포들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장으로서 발전해왔다’고 말하는 이강홍 이사장. 90년대에 들어서자 학생 수의 감소 경향이 현저해져 합동 팀이 나오게 되었다. 99년부터는 여름방학 동안에 개최되었고, 2001년부터는 8인 시합제가 시작됐다. 2010년부터 본선과 육성이라는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그저 축구시합이 아닌 민족교육과 깊이 연관되어 주최 측과 학교, 보호자, 선수들이 함께 만드는 독특한 대회로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일본축구 프로리그가 탄생해 일본이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던 90년대. 조선학교 아이들이 축구로 꿈을 키울 수 없는 현실에 책임을 통감한 이씨는 프로선수, 조선대표의 월드컵 출전이라는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분주히 노력해 왔다. 이러한 꿈을 꼬마축구대회에서 키운 조선학교 출신의 선수들이 이뤄왔다.
작년부터 대회는 11월 개최로 바뀌었다. 올해도 다시 열전이 시작된다.
*월간 <이어> 2017년 10월호에서
첫댓글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