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36 나라(奈良)에서의 민족교육(후편)
(글 황리애)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 개교
1969년 4월 1일 창립 이후, 동포들이 온 힘을 쏟아 발전시키고 계속 이어온 나라 조선초중급학교. 그러나 2000년대를 전후해 아동·학생 수가 서서히 감소해 휴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동포들이 모이는 장소를 보여주고 싶다> 동포사회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우리학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졸업생들이 마음을 모아 다시 나섰다.
- 2012년에 열린 대동창회 <나들의 학교>, 휴교때문에 졸업식을 하지 못한 5명의 학생들이 졸업증서를 받았다 -
2008년 애끓는 심정으로 휴교
나라 동포들의 애착이 깃든 장소로 뿌리 내려온 나라 초중급학교.
1970년 중반에 나라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분에서 조선에 유래를 둔 벽화가 발견되어 이를 조사하기 위해 조선에서 와 있던 대표단 일행이 이 학교를 방문하는 등 특징적인 역사도 지녔다.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에서도 견학을 왔기에 수업은 때때로 중단되었는데, 이 학교를 둘러싼 분위기가 활기찬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80~90년대에 걸쳐 아동·학생 수가 서서히 감소하고, 2000년대에는 신입생이 몇 명밖에 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2006년에는 전교생이 20명 이하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나라는 오사카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사는 곳에 따라서는 히가시오사카 조선초급학교나 히가시오사카 조선중급학교로 다니는 편이 통학시간이 짧아요. 또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로 진학한다면 오사카부 소재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편이 친구 관계나 생활에 익숙해지기 쉽다고 생각하는 가정도 있었어요. 물론 절대수가 감소한 것도 원인이죠.”
현재, 나라 조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정기(57)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차츰 관계자들 사이에서 <휴교>라는 선택지를 얘기하게 되었다. 동포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더라도 계속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2007학년도 졸업생을 보낸 후 ‘역시 이대로 계속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 휴교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재학생 5명은 히가시 오사카초급으로 다니게 되었다. 2008년 3월 무렵이었다.
아이들에게 동포들이 모여드는 장소를 보여주자
나라 초중학교가 휴교됨에 따라 나라 동포사회도 점점 정체되어 갔다.
“학교가 없어지면 동포사회가 구성되기 어려워진다. 어딘가에 분회 모임을 열자고 해도 ‘학교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모입니까?’라는 말이 돌아왔어요. 모두들 마음을 어디로 모아야 할지 몰랐죠.”(김정기씨)
이런 상황 속에 먼저 나선 것은 어린 아이들이 있는 어머니들이었다.
‘앞으로 커나갈 아이들이 동포가 모이는 장소를 모른 채 자라는 것이 섭섭하다’는 어머니들의 공감으로 자녀양육 서클 <고구마회>가 중심이 되어 계절마다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때까지는 꽃놀이나 납량제, 운동회 등 학교 이벤트 때마다 동포들이 나라 초중으로 모였다. 150명 정도까지 모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조선사람들이다. 이런 장소가 있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달라진다’며 총련 본부와 지부, 졸업생, 동포들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또 2010년에는 여성동맹이 김치 판매를 개시했다. 현재도 나라에서 오사카의 조선학교로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고, 아이를 현 바깥으로 보내는 보호자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나아가 이듬해 2011년 9월, 동포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나라현 청상회가 재가동되었다.
<학교를 다시 여는 것>과 구체적인 첫걸음이 될 <대동창회 개최>를 목표로 삼았다.
젊은 세대의 분발에 힘을 얻어 2세 동포들도 합류했다. 나라 초중1기생을 선두로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민족교육의 재개없이 동포사회의 미래는 없다>를 슬로건으로 나라 동포사회 전체의 운동으로써 전개해 나갔다.
‘나’들의 학교
이렇게 2012년 6월 10일, 나라 초중의 졸업생과 관계자들이 동창회 <‘나’들의 학교>가 개최되어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졸업생, 나라현에 사는 동포 등 300명 이상이 참가했다.
<나라 학교> <나의 학교> <우리학교> 라는 의미로 나라 초중과 인연이 있는 동포들에게 다시 한 번 모교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우리학교의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늘까지만 합시다. 내일부터는 우리학교의 미래, 3년 후, 5년 후의 이야기를 많이 하기로 합시다.”(‘나’들의 학교·이성규 실행위원장의 당시 발언)
동창회 무대에서는 휴교 당시의 재학생들을 위해 <제40기 졸업식>이 행해졌다. 3년이 늦어진 졸업증서를 받아든 5명의 학생들은 눈물을 흘렸다.
같은 해 8월, 나라 초중학교 교사에서 토요 아동교실<‘나’들의 학교>가 출발했다. 8월 25일부터 11월 17일까지 제1기 때에는 일주일에 1회, 10일간(모두 20시간)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3세부터 초급부 6학년까지 아이들 17명이 어린이반(유아대상)과 아동반(아동대상)으로 나눠 참가했다. 조선어와 영어회화, 읽기와 쓰기, 조선의 역사와 지리, 민속놀이, 민족 악기 연주 등 조선의 풍습과 문화에 친근한 내용이 준비되었다.
“수업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려고 동포들도 찾아오게 되었다. 지금은 오사카의 조선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들이 나에게 ‘나라에 있는 학교가 좋다’고 말한다. 일본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도 여기서 많이 교류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김혜숙씨)
이듬해 2013년 초순에도 ‘나’들의 학교 제2기를 실시했다. 그리고 9월 민족교육대책위원회를 발족. 학교재개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에 나섰다.
- 유치반 개원식이 열린 날, 신입생들을 미소로 지켜보는 동포들 -
드디어 학교가 재개되다
목표로 한 것은 유치반 개설이다. 나들의 학교에서 실천으로 이어진 토대를 기반으로 18명의 멤버가 주력이 되어 대상 가정을 찾아가 사람들을 모으고, 모금활동, 개장공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4년 4월 6일, 드디어 나라 조선초급 유치반 개원식과 축하회를 맞아 2명의 유아가 유치원에 입학했다. 현 안팎에서 온 200여명의 동포와 일본 시민들이 성대하게 두 아이를 축복해주었다. 현재 나라 조선초급 유치반에는 3명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고, 토요아동교실에는 15명의 유치반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
60년대에 <자주학교를 건설하자>는 동포들의 의견으로 세워진 나라 초중급학교. 한 때는 휴교까지 되기도 했지만, 다시 학교를 열자며 분기한 이들은 1세, 2세의 모습을 보고 자란 3세, 4세 동포들이었다.
“<선대의 정신을 이어가자>고 항상 말하지만, 그 소중함을 실감한 것이 나라학교 재개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김정기씨)
아이들의 성장을 민족교육 안에서 지켜나가고 싶다는 것이 나라 동포들의 바람이다.
*월간 <이어> 2018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