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일본어와 결별
●일본어와 결별
당시 조선 사람들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한 난방으로 온돌을 이용했다. 여기에 쓰이는 땔감은 방대한 양이다. 물론 평소에 밥을 지을 때도 땔감을 썼다. 땔감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알아서 확보해야만 한다.
반도 남부의 산들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들이 베어져 대부분이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멀리 있는 산까지 가야만 했고, 나도 몇 번인가 만수 삼촌의 손을 잡고 함께 갔다. 어린 아이가 많은 양의 땔감을 나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오히려 삼촌에게는 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삼촌과 함께 걷는 길은 결코 힘들지 않았고 정말 즐거웠다.
“해수야, 학교는 어떠냐, 친구는 생겼어?”
삼촌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삼촌, 아마 친구 같은 건 안 생길거에요.”
“왜 그런 소릴 해?”
“왜냐면, 다들 나를 <반쪽발이>라면서 상대도 안 해주는걸요.”
나는 다정한 삼촌에게만은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은 마음먹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다.
삼촌은 처음엔 놀란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는데, 잠시 후 등에 진 땔감을 내려놓고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바위에 앉더니, ‘해수야, 이리 와서 앉아 봐라’ 하고 가만히 나를 불렀다. 나는 삼촌 옆에 앉아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던 괴로운 심정을 토해내듯 뚝뚝 눈물까지 흘리면서 얘기했다.
“반쪽발이라고…. 너 그런 말까지 들었던 거냐?”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수 삼촌이라면 괴로운 내 심정을 알아 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삼촌의 말은 어린 나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해수야, 모두 네 잘못이다. 애들에게 ‘반쪽발이’란 말을 들어도 별 수 없네. 네가 계속 일본만 생각하니까 애들이 그런 소릴 하는 거 아니겠어?”
“일본?”
“해수야, 넌 지금 네 나라에 있는데, 먼 일본만 생각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너를 ‘반쪽발이’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네가 너무 어려서 아직은 내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까….”
삼촌은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실은 나도 같은 경험이 있단다. 내가 가족들과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너와 비슷한 나이였어. 일본어를 전혀 몰라서 나또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거든.”
“삼촌도?”
“응, 어째서 일본 같은 곳에 왔을까, 온통 그런 생각만 했었지. 그런데 그때 돌아가신 아버지, 너한테는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어.
‘넌 이제부터 일본에서 살 거니까, 조선은 잊어라. 이제부터는 일본인한테 지지 않을 만큼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이 나라에서 살아갈 일만 생각해라’ 하고 말야.”
나는 삼촌에 말을 듣고 어린 마음에도 충격을 받았다.
“해수야, 어차피 네 어머니와 동생들도 올 거야. 그런데 네가 일본만 생각해서야 되겠냐. 넌 이제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잖아.”
삼촌의 말은 너무 가혹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삼촌만의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삼촌에게 많은 조선말을 배웠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자,
“할매, 지금, 돌아왔어요!”
하고 조선말로 소리쳤다.
그날부터 나는 익숙하고 친근한 일본어를 봉인하려고 마음먹었다. 집에서 아버지, 할매와 이야기 할 때도, 물건을 사러 갔을 때도, 좌우간 서투른 조선말이라도 자꾸 말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까지는 그저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생각만 했지만, 언젠가 남동생과 여동생도 이곳에 온다고 생각하니 외롭지 않았고, 모두를 위해서도 빨리 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작은 희망을 사라지게 만든 사건이 얼마 안 있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그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수해
귀국 후 1년째 가을, 아버지의 논은 대풍작이었다.
누구보다 기뻐했던 아버지는 일부러 우리 집 마당에 ‘농악대’라는 한국의 악대를 불러서 농사일을 도운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풍작을 축하하는 축배를 들었다.
꽹꽤갱 꽹꽹꽹….
꽹과리라 불리는 동으로 만든 작은 악기를 나무채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사람 뒤를 따라, 징이라고 하는 좀 더 큰 악기를 끝에 천을 말아 만든 봉으로 두드리면 징―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뒤를 장구라는 큰 북 같이 생긴 것을 어깨에 메고 덩기덕 쿵덕 하고 경쾌하게 두드리는 저고리를 입은 여자. 작은 나팔처럼 생긴 것을 춤을 추며 부는 사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머리 위에 달린 기다란 끈을 춤을 추면서 빙글빙글 고개만으로 돌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그 광경을 보고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마당 여기저기 작은 상에는 막걸리와 돼지고기 같은 맛난 음식이 차려졌고, 마을 사람들은 이따금 젓가락으로 밥공기를 두드리며 밝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할매도 만수 삼촌도 기쁘게 웃었다. 그래도 가장 기뻐한 사람은 고향으로 금의환향을 했던 아버지인 것 같다.
“이대로라면 내년엔 네 어머니와 동생들도 데려올 수 있겠어!”
아버지는 취해서 붉어진 얼굴로 흐뭇해하며 내게 말했다.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동생들도…’
기뻐서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기쁨과 기대를 가슴 가득 품고 농악대 사람들에게 섞여서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아버지의 농사일은 2년 만에 파탄하고 만다.
이듬 해 가을, 갑자기 많은 비가 울산을 덮쳤다.
논이 수몰되어 벼가 일주일 이상 침수되고 만 것이다. 간신히 물이 빠졌을 때는 이미 벼가 누렇게 변색되어 거의 전멸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들인 논은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장소가 아니었는데 그걸 숨기고 사게 만들었다고, 자신을 속인 거라며 아버지는 분개했다.
“전에는 수해가 더 심했어. 이번에 산 논이 이 정도로 수몰되다니 아무래도 이상해. 그 자식들이 나를 속인거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아버지는 연신 막걸리를 마셔댔다. 설마, 이전에 고향을 떠난 계기가 되었던 수해를 또 다시 체험하게 될 줄이야….
아버지가 괴로운 심정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린 많은 비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집 근처 강은 범람했고 엄청난 기세로 여러 가지 것들을 휩쓸어 갔다.
그것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는데 커다란 집이 통째로 떠내려 왔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집 처마에 한 남자가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자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일어서서 양 팔을 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어떻게 좀 해봐!
몇 사람인가가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밧줄을 던져!”
“서두르지 않으면 떠내려가겠어!”
다리 위에서 쳐다보고 있던 사람 하나가 밧줄을 던져서 구하려 했지만 남자에게는 닿지 않았고 집과 그 남자는 허무하게 다리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 홍수를 계기로 일단 농사를 그만두고 다시 한 번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할매와 나, 그리고 만수 삼촌을 남겨두고 혼자서 가는 것이다. 둘째 삼촌은 이미 결혼해 근처에 따로 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한테는 일본에서 재기하기 위한 쓰라린 결단이었을 것이다.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할매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아버지는 나를 보시며,
“할매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감이 여전히 있었기에 슬픔은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나는 몹시도 서글퍼졌다.
아버지가 가는 곳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것이다.
“아버지―!”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고함을 치면서 아버지가 탄 버스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나도 가고 싶어!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이런 외침도 아버지에겐 닿지 않았고, 버스는 흙먼지를 뿜으며 달려가고 말았다.
버스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나는 계속 달렸다.
드디어 강에 다다르자 이번엔 하류를 향해 몇 번이나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오로지 계속 달렸다.
그 때를 떠올리면, 강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가 나오고, 그러면 어머니가 있는 일본에 갈 수 있다고 어린 마음에 필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우리 가족 살림의 기둥은 만수 삼촌이 되었다.
삼촌은 수해를 피할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은 논과 밭에서 농사를 계속 지으면서 세 식구의 살림을 꾸려 가는데 갖은 애를 썼다.
우리 집의 토지뿐만 아니라 남의 논과 밭의 경작을 거들며 품삯을 벌기도 했다. 아버지와 달리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성격도 온화해서 언제나 나를 몹시 귀여워해주었다.
혼자서 가지고 놀았던 축구공을 만들어 준 것도 만수 삼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삼촌의 보호 아래서 내가 구김살 없이 자라는 나날을 보낼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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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영씨는 잠이 없어지셨나벼... 요즘. 오늘 새벽에 들어가서 새벽에 일어나서 번역한 원고를 올리니... 대단하신 정미영씨 ~~
강단있으신 아버지와 따뜻한 삼촌의 모습이 잘 느껴집니다. 아이들 어느정도 키워 놓고 난 지금 저런 결정을 할 생각을 할 때 얼마나 많은 걱정과 근심, 용기와 열정...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등등... 잘 느껴집니다..
저도 잠뽀여요~ ㅋㅋ 어제 고생 많으셨습니당~ ^^
매번 감상을 남겨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나나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