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큰스님 법문
“도리는 가깝지만 체득하려 않는다”
대저 참선하는 이는 첫째로 무상함이덧없이 빠르고
나고 죽는 일이 큰 것임을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은 비록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하기 어렵다”
하였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게으름이 없는 다음에
온갖 세상일에 조금도 간섭하는 뜻이 없이
고요하고 하염없이 지내야 한다.
만약 마음과 경계가 서로 흔들려서
마른 나무에 불 붙듯이 번잡스레 정신없이
세월을 보낸다면
이것은 비단 화두 드는 공부에만 방해로운 것이 아니라
나쁜 업보만 더할 뿐이다.
가장 요긴한 것은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마음에 일이 없게 하면
마음 지혜가 자연히 깨끗하고 맑아진다.
모든 일이 모두 마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이 나타나고,
포악하면 범과 이리가 되고,
어리석으면 지렁이와 곤충이 되며,
가볍고 분주하면 나비가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되
“다만 한 생각의 차이 그대로 만 가지 형상이 나타난다”
하였으니 무릇 그 마음을 텅 비워서
성성하고 순일하게 하여
흔들리지도 않고 혼미하지도 않게 해서
허공같이 훤출하게 하면
어느 곳에 생사가 있으며
어느 곳에 보리가 있으며
어느 곳에 선악이 있으며
어느 곳에 가지고 범할 게 있겠는가.
다만 이 활달하고 역력히 밝아서
마루에서 밑바닥까지 사무치면
살아도 삶을 따르지 않고
멸해도 멸을 따르지 않고
부처도 조사도 짓지 않으며
크게는 대천세계를 감싸고
작게는 가는 티끌에도 들어가며
능히 부처이며 능히 중생이다.
또한 크고 작음도 아니요
모나고 둥근 것도 아니요
밝고 어두움도 아니어서
자유로히 융통함이 이렇게 철저하여
조금도 억지로 만들어내는 도리가 아니다.
무릇 이 현묘법문을 참구하는 이는
항상 반조하기에 힘쓰고
참구하는 용심을 성성하게 깨어 있게 하고
세밀하여 끊어지는 사이가 없이 하며
참구하는 것이 지극히 간절하여
참구한다는 마음조차 없는 경지에 이르면
홀연히 마음길이 끊어져 근본생명자리에 이르게 되면
저 본지풍광이 본래 스스로 갖추여져
원만한 경지에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느니라.
귀에 부딪칠 때에
백천 개의 해와 달이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과 같으며
눈에 부딪칠 때에
바다의 풍랑소리가 수미산을 치는 것도
억지로 이렇게 함이 아니니라.
이 도리는 너무 가까이 있지만
다만 사람이 스스로 체험해서 알려하지 않을 뿐이다.
무릇 현묘한 이치를 알려는 이는
마음자리를 돌이켜 비추는 공부를 착실히 알아
분명하고 세밀히 해야지 아무렇게나 용심해서는 안된다.
수행해 나가서 수행의 공력이 익어지면
실상의 이치가 스스로 나타난다.
태고 화상이 이르기를
“겨우 활을 들어 쏴 화살이 돌에 박힌다”하였고,
청허 화상이 이르기를
“모기가 쇠소 등어리를 뚫는 것 같아서
부리를 댈 데가 없는 곳에 온 몸이 들어간다”하였으니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이들은 마땅히 이 말로써
지남(指南)을 삼아야한다.
만약 우리 일상생활의 온갖 행동을 논할 것 같으면
가슴 속에 텅비어 아무 것도 없으며
육근(六根)이 텅 비어서 이렇게 너그럽고
넓은 이것이 보시(布施)이며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것이 지계(持戒)이며
이와 같이 비고 부드러운 것이 인욕(忍辱)이며
이와 같이 본래 밝고 항상 나타나서
어둡지 않은 것이 정진(精進)이며
이와 같이 밝고 고요해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정(禪定)이니
이와 같이 고요하여 명료하게 법을 간택하여
공을 관함이 본래 어리석음이 없음이며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함이 움직이지 않음이며
내지 세상 인연을 따라주며
장애없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에
달마대사가 이르기를
“마음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위를 포섭한다”하였으니
다만 뿌리를 잘 복돋아 주는데 힘쓸지언정
가지가 무성하지 않음은 근심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견성(見性)하여 부처가 될지언정
부처가 신통과 삼매가 없음은 근심하지 말지니
요즘 사람들은 흔히들
진정한 도인과 본색납자들이 해야 할 참선을 하지 않으니
저 불법 가운데 법의 이치도 밝지 못하고
도의 안목도 시원치 않으니
이는 도무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 같고
취한 듯 꿈꾸는 듯 헛되이 일생을 보냄이니라.
슬프지 아니한가.
동산 화상이 이른바
“가사(袈裟) 아래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함이 이것이다.
대개 길을 가는 이는 처음 길을 떠날 때
길을 바로 들지 못하면 천리를 갔어도 헛걸음이라
길을 떠나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규봉 선사가 이르기를
“결택을 분명히 한 뒤에 깨닫는 이치를 닦아 나아간다”
고 하였다.
대개 삼칸 초가집을 지으려 하더라도
먹줄을 치고 자귀로 깎아 내고 자로 재는 공력이 없으면
성취하지 못하나니 하물며
원각대가람(圓覺大伽藍)을 조성하는데
그 조성하는 이치대로 하지 않고 어찌 성공하겠는가.
작은 일을 하는 데도 잘못되어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그 이치를 모르면 누구에게 물어라.
그 사람도 분명하지 못하면
다시 지혜 있는 이에게 물어서
기어이 차질없이 성공하는 것이 조예가 아니겠는가.
깊고 오묘한 도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거의가 경솔하거나 함부로 소홀히하지
자세히 결택하여 공부하는 이는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실패하지 않는 이는 거의 드무니 슬프다.어찌 경계하지 않을까 보냐.
대개 무상함을 경계해서 큰 일을 깨달아 밝히고자 하는 이는급히 스승을 찾지 않고 장차 어찌 그 바른 길을 찾겠는가.
일화
어느날 경허 스님이 길을 걷고 있을
때 아이들 몇 명이 어울려 놀고 있는 것
이 보였다. 스님은 무엇인가를 생각하
고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누구든 이 막대기로 나를 가장 세게
때리는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
그러나 소년들은 스님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눌려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스님은 한 아이의 손에 막대기를 쥐어
주고 미소지으며 치라고 시켰다. 그 소
년이 처음에 살짝 때리자 스님은“나는
안 맞았으니까 돈을 줄 수 없다”고 했
다. 그러자 그 소년은 점점 세게 때리게
되었고 스님은 계속 천진스런 미소로
안 맞았다고만 했다.
소년들은 스님이 돈을 내지 않으려
고 그러는 줄 알고 돌아가며 스님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스님은 소년들이
지쳐 그만둘 때까지도 안 맞았다고 되
풀이했다.
스님은 이를 두고 사람들이 자기의
본심을 믿지 아니하고 아이들처럼 경계
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했다.
경허 스님이 천장사에 계실 때이다.
한 문둥이 여인이 스님의 방문을 두들
겼다. 스님은 그 여인이 천대 받으며 방
황중임을 알고 방에 들게 하여 함께 지
냈다. 일주일이 지나자 스님의 제자인
만공이 참다 못해 말했다.
“스님의 높으신 법은 알겠습니다만
저희가 견디기 어렵습니다.
경허 스님은 이 말을 듣고“자네는 걸
리는 경계가 많은가 보이. 그러면 할 수
없지.”하며 여인을 떠나도록 했다.
하루는 경허 스님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법문을 하겠노라며 제자들에게 어
머니를 모셔 오라고 했다. 스님의 어머
니는 매우 기뻐하며 옷을 깨끗하게 갈
아 입고 법회에 참석했다. 스님은 법상
에 올라 옷을 남김없이 벗어 버리고 어
머니를 향해 말했다. 법문을 기다리고 있
던 어머니는 깜짝 놀라 화를 내며 자기 방
으로 돌아갔다. 이에 경허 스님이 대중에
게 말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내 옷을 벗
겨 몸을 닦아주고 안아주며 뽀뽀도 해주
시더니 지금은 왜 안되는 것일까.”
행장
경허 성우(鏡虛性牛) 스님은 9세 되
던 1854년 어머니를 따라 경기도 의왕
시에 있는 청계사에서 계허(桂虛) 스님
을 은사로 출가했다.
1859년 동학사에 가서 조선 제일의
강백으로 불리던 만화 보선(萬化普善)
스님에게 경전을 배우며 유교와 도교의
사상까지 두루 섭렵했다.
1868년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해 대강
사로 명성을 떨쳤다. 34살이 되던 1879년 은사를 찾아 천안을 지나다가 콜레라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시신이 널려있는 현장을 보고 죽음 앞에 문자와 중생의 알음알이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절감했다.
동학사로 돌아온 스님은 강원을철폐하고‘여사미거 마사도래(驪事未去馬事到來)’라는 화두를 참구하며 처절한 수행을 거듭해‘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없다’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17년간 천장암,개심사, 문수사,
부석사, 수덕사, 정혜사, 마곡사, 갑사,
동학사, 등지에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한
후 스스로 박난주(朴蘭州)라 부르며 머리
를 기르고 평북 영변 희천과 강계, 갑산 등
지에서 중생교화에 나섰다.
67세 되던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
이방 도하동에서 열반송을 읊은 뒤 일
원상을 그리고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