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못된 버릇이 생겼다. 지인들이 자식이야기를 하며 걱정과 자랑을 풀어놓을 때면 여지없이 올라오는 마음이 있다. 초등학생 조카를 애지중지하는 동생을 보면서도 여지없이 드는 생각이 있다. 이야기를 듣다 여지없이 옆길로 새 속으로 되뇌고 있는 내 자신을 만난다. ‘입만 열면 걱정해주고, 입만 열면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놔 주는 이런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애들한테도…’ 이 못된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물론 알고 있다.
오늘은 나도 우리 작공 아이 자랑을 하게 될 것만 같다.
나는 위영(가명)이를 5년 전에 만났다. 00중학교가 작공에 대체 수업을 의뢰하여 만나게 되었다. 얼굴에 여드름을 많이 달고 있던 위영은 내가 처음 만난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사니?”라고 물으니 위영은 “아닙니다. 저는 부모님이 안계십니다. 저는 꿈나무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위영은 의연했고 난 당황했다. “미안, 내가 네 아픈 데를 건드렸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첫 만남에 빚을 지고만 느낌이었다. 대체수업이 종료된 후에도 위영은 가끔씩 작공에 들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위영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년 후, 다시 어느 날 갑자기 조금 살 찐 모습에 하얘진 얼굴로 위영이 찾아왔다.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꿈도 야무지구나(웃음). 그럼, 여드름쟁이 너 위영을 어떻게 기억 못하겠어?” “저 마음이 아파서 다른 데 가 있었어요.” “그것도 모를 줄 알아?” “어떻게 알아요?” “관심이 있으면 바람이 다 소식을 들려줘. 몰랐어?”
위영은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3,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자신은 헤어질 준비가 안 되었는데 결별하게 되니 자기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냈는데 선생님들이 그런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멀리 보냈다고 설명했다.
“네가 보기에 내가 미친 사람 같아?” “아니오.” “그럼 너는?” 위영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떨구 었다. “위영, 사람이 사람을 정말 좋아할 때, 그런데 헤어져야할 때, 누구나 미치광이가 돼. 나도 그래, 너도 그랬을 뿐이야.” “그런데 난동은 부리지 말았어야했어요...” “ 좀 심하게 난동을 부렸어?” “네.” “근데 말이 어눌해졌어. 똑똑하게 발음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이 후 위영은 작공에서 랩 메이킹 수업에 참여했다. 유은경 선생님 덕분에 시행하게 된 프로젝트 ‘Listen! My fucking Story'에 누구보다 성실히 참여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부랴부랴 아르바이트를 가면서도 토요일 오전 수업에 늦잠도 반납한 채 4개월을 꼬박 참여하였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랩으로 들려주며 누에고치 밖으로 커밍아웃하였다.
위영에게 자신의 존재조건은 더 이상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고, 마음이 아파 멀리 가서 보낸 시간도 치부가 아니었다. 위영은 그 해 은평구 축제 여러 무대에 서서 당당해져갔다. 출연료를 생각보다 너무 많이 받았다며 해맑게 웃었다. 2018년 은평이야기, 2019년 앵콜 공연 무대에서 위영은 당당히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 공연 전 위영에게 공연의사를 물었을 때 동일한 랩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위영은 자신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노래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작년 앵콜 공연에서 위영은 우리에게 다른 랩을 들려주었다. 성큼 어른이 되어있었다.
방황하다 밑바닥까지 내려왔고 어두운 방에 갇혔다 앞이 너무 깜깜해
그 시간이 나에겐 버린 시간이 아니라 생각해 경험을 통해 난 깨우쳤고 더욱더 성숙했고
그 시간이 버린 시간이 아니었다고 날 울린 억울함이 더 날 당당하게 만들었어
이 무대 직전까지 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난 이제 직접하지 슬픈 생각들은 지워줘
내게는 마지막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기에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기에
내가 이 무대를 고른 이유는 누군가에게는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는 내 이별을
누군가에게는 내 아픔을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잊지 않겠다고
언제나 내 마음속에 일부였다고 전해드리고 싶었어
계속해 속으로 곱씹었어 나만의 말들로 옷 입혔어
행복했었다고 언제나 고마웠다고 내 마음속에 있을 거라고
나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 사람
내가 이 무대를 고른 이유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누군가에게 내 시간을
누군가에겐 내 아픔을 들려주고 싶었어 알려주고 싶었어 위로받고 싶었어
열여덟 어른으로 시설을 퇴소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 위영이 들려 준 인생이었다. 위로 받은 건 우리였다.
하필 먹을 게 없던 시간에 와서 배고프다고 밥을 내 놓으라 어리광을 부리다 파송송 라면 한 그릇을 맛있게 먹던 위영, 구산 사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갑자기 정차한 택시와 부딪혀 사고가 났는데 기사 아저씨가 자신에게 사과를 안 한다며 와 줄 수 있냐고 전화하던 위영, 지방에 있는 회사로 취직해서 가며 돈 버는데 그 정도 고생도 안하겠냐며 세상 밖에서 첫 발을 내디딘 위영, 기어이 작공에 전자레인지 선물을 하고 간 위영. 회사에서 주야 교대로 근무하는데 이주일 마다 바뀌어 그나마 다행이라며 걱정 말라고 전화하는 위영.
헤어질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오히려 '나'다.
강아지, 네 앞의 생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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