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에 대항하다 사망한 소령 김오랑의 38주기 추도식-12월 12일
■ 참군인 故 김오랑 중령 38주기 추도식
1. 사전-현장모임: 서울시 동작구 현충원 정문에서 10시 모임
2. 추도식-일시: 2017. 12. 12(일). 11:00
3. 장소: 국립서울현충월 29번 묘역(東2923)
4. 주관: 평화재향군인회
■ 故) 김오랑중령 약력보고
* 약력보고
고 김오랑중령은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인 1944년 4월 5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김종수씨와 어머니 임순이씨 사이에,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해의 삼성초등학교, 김해중학교, 김해농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5년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입학하여, 1969년 3월 28일 졸업,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임관 후 2사단 수색중대와 월남전 참가를 비롯한 전후방 주요부대에서 소대장, 중대장, 참모장교로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고등군사반과 육군대학을 발군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1973년 1월 3일 백영옥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채 두지 않은 채 짧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1974년 7월 17일 3공수여단 16대대 19지역대 중대장으로 특전사에 첫 보직 명령을 받은 다음, 19지역대에서 중대장 19개월 보직, 16대대 작전장교로 12개월 보직, 16대대 18지역대장으로 13개월 보직을 마친 다음, 육군대학과정을 마치고 1979년 3월 특전사로 원복을 자처하여 5공수여단 21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임하여
1개월여를 근무한 뒤, 사령부 추천으로 운명의 보직인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에 임명되니, 마침내 12월 13일 0시 15분경 특전사령부에 무장진입한 반란군의 병력에 맞서 응사하며 용감하게 싸우다가 군반란군에 대항한 '정의로운 국군수호" 그리고 국가와 민족를 위해 장렬히 순직하였습니다.
이후 부인 백영옥씨가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기 1년 전, 부인백영옥씨의 국방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수차례 민원제기등의 갖은 노력으로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되었습니다..
그후 부인 백영옥님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으며, 1991년 6월에 의문사의 추락사을 당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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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013년 4월 2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고(故)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과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법', 군사반란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안 2건을 심의 및 의결하면서 추모사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과정에서 군 출신 국회의원들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고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 훈장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와 추모비를 육사 내에 세우는 안에 대한 호오가 갈렸다. 김관진 국방장관마저 "대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결국 무공훈장 대신 보국훈장으로 수정하여 통과하게 되었다
2014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2014년 4월 1일 특전사 연병장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전수식이 열렸다
#-무공훈장(武功勳章, Order of Military Merit)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보국훈장(保國勳章, 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자에게 수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