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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언약과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한 톰 라이트 신학 = 서철원 신학’을 비평함: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바울 사도 증거에 담긴 뜻(암시)
{바른 믿음} 정이철 <후쿠마, 프롱크, 황준호 구원론 공통점 - 무성경 사변신학>
{바른 믿음} 서철원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
{바른 믿음} 정이철 <김병훈 교수는 아직 기독교의 구원의 원리를 모르고 있다.>
{바른 믿음} 정이철 <존 오웬은 계 22장 18절 저주를 받은 흉한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존 오웬은 계 22장 18절 저주를 받은 흉한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지금 합동의 많은 분들이 이런 사람들을 그냥 두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같다면서,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 위해 긴급헌의안을 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이철 목사만의 정신승리, 서철원 교조주의자들만의 정신승리를 드러낸 이 문장이 없군요.
얼마 전 {네이버} ‘무물(평이협: 평신도, 이단대책협의회) 카페’에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가 했던 칭의 논쟁에서 톰 라이트가 압승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던데, 정말로 존 파이퍼가 뭐 손 쓸 수도 없이 처참히 대패했나요?”라는 질문을 담은 젊은이 글이 올라왔습니다. ‘톰 라이트에 빠진 예장 합동 목사님’을 떠올리며 저를 웃음 짓게 만든 글이었습니다.
제가 떠올린 예장 합동 목사님은 제 고교 동창으로 ‘새관점 구원론을 비평하는 서철원 목사님 강의’를 직접 듣고 그 소감을 전화로 저에게 들려주셨습니다. 1 년이 훨씬 지난 일입니다. “서철원 목사님은 톰 라이트 저서 단 한 권도 읽지 않으셨다. 다만 들은 풍월로만 톰 라이트나 새관점 신학을 비평하신 것뿐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아, 내가 (서울 청담동) 개혁신학원에서 서철원 목사님 권위에 눌려 아무 생각 없이 서철원 목사님 가르침들을 받아들였구나.’ 하며 내 무지를 탓해야만 했다.”는 소감이었습니다. 그리고 “톰 라이트는 범접할 수 없는 신학자”임을 내세우며 “나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를 열 번 넘게 읽었다.”며 저에게 톰 라이트 저서들을 탐독할 것을 적극 권장하셨습니다. 참고로, “서철원 목사님 권위”란 ‘서철원 목사님께서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실 때 최우등(Cum Laude)으로 받은 석학이시다.’는 권위입니다.
젊은이 질문에 답하는 댓글들에서 제 눈길을 끈 댓글들 가운데 하나는 “도무지 사상이 교정 안 되는 새관점주의자들 입장에서에 정신승리로 봅니다. 그들만의 정신승리요.”였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댓글을 ‘도무지 사상이 교정 안 되는 서철원 교조주의자들 입장에서 정신승리로 봅니다. 그들만의 정신승리요.’로도 읽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과 톰 라이트 칭의 논쟁’에서 존 파이퍼 목사님께서 톰 라이트에게 완패하셨다면, 이는 곧 개혁 신학 ‘행위언약 교리’와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를 부정한 정이철 목사의 완승입니다. 즉, 서철원 교조주의의 완승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지방교회 같은 이단들 특징은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성경} 전체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펠라기안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의 아류’로서 {성경} 전체를 못 보는 이른바 “새관점”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행위(생명)언약 개념과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공효)의 전가 개념’을 부정합니다.
새관점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톰 라이트는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서울: 에클레시아북스, 2016)’ 22쪽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 만드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가 돼, 그들 자신의 예배와 찬양을 통해 세계 전체의 예배와 찬양을 집약해야 했다. 이것은 ‘행위언약’이 아니라 ‘소명’언약(covenant of vocation)이다.”고 주장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하나님의 언약]과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서 고백하는 행위언약 개념과 이를 받드신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의 행위언약 개념’을 ‘{하나님의 구속경륜} (광주: 성문당, 1989)’에서 부정하신 서철원 목사님1)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칭의를 말하다.} 351쪽~353쪽에서 톰 라이트는 개혁 신학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교리’를 부정하며 개혁 신학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를 두고 존 파이퍼 목사님을 언급하면서 “이런 설명은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그 순종이 예수의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암시, 더구나 모세의 율법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3)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구속경륜}, {복음과 율법의 관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는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가르치셨건만, 현재는 위에 링크한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에 적힌 대로 이 가르침을 “폐기했다.” 하시며 “이 교리는 종교개혁 신앙의 중심도 아니고 그 정신에도 맞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전혀 불가한 내용입니다. {신약 성경}에 전혀 없는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신 서철원 교수님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지난해 2018년 4월에 쿰란출판사에서 펴낸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3권: 인간론} 179쪽에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창 2:17)은 언약을 지켰다면 의를 얻어 영생이 이를 것이라는 말씀에 해당하는가? 이 명령은 백성을 삼으시는 약정의 말씀이고 영생을 주시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런데 톰 라이트가 말한 “암시”…. 고故 김홍전 목사님께서는 ‘지키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선악과 금령 행위(생명)언약에서 ‘지키면, 살리라. 생명을 얻으리라.’라는 암시, 이른바 “행간 의미”를 독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 사고를 두고 “유치한 사고”4)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에 담긴 암시, 행간 의미를 독해하지 못한 채, ‘계시 의존 사색’을 하지 못한 채 유치한 주장, 어리석은 주장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세계적인 신학자들”이라는 톰 라이트와 서철원 목사님입니다.
서철원 목사님 주장대로 개혁 교회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과 그 공효에 따른 의義의 전가 교리’는 “성경적으로 전혀 불가한 내용”일까요? 중세 천주교 스콜라 철학자 안셀무스와 종교개혁 시대 알미니안 신학자들 주장을 반대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 {부활의 참뜻} 같은 강설집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과 그 공효에 따른 의義의 전가’를 강조하고 강조하셨던 김홍전 목사님5)은 서철원 목사님 주장대로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지 않고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이셨을까요? 서철원 목사님 제자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저주를 받은 흉한 인물”이셨을까요?
그리스도 구속사역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은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분리하면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이른바 “부활 복음” 같은 다른 복음,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한 이단이 태어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에서 수동 순종과 능동 순종’은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을 분리해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 부활’을 부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능동 순종에 따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단들 특징에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행위(생명)언약 개념을 부정하신 스승 서철원 목사님에게 “율법의 요구(기능)에는 ‘죗값을 치러라.’는 형벌, 죄에 대한 형벌이 있다.”는, 이 하나만을 배운 까닭으로, 스승 서철원 목사님에게 “율법의 기능에는 ‘지키면 살리라. 영생을 얻으리라.’는 축복 기능과 ‘지키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저주(형벌) 기능이 있다.”는 개혁 신학을 배우지 못한 까닭으로 칼빈 선생님을 포함6) 수많은 개혁 신학자를 “저주를 받은 흉한 인물들”로 이단 정죄한 정이철 목사에게 이 특징이 있습니다.
다음은 서철원 교조주의에 빠진 짧은 신학으로 개혁 교회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교리’를 이단시하며 오직 ‘그리스도 수동(십자가) 순종에 따른 의義의 전가, 칭의’만을 주장한 정이철 목사 {성경}에는 없는 하나님 말씀들입니다.ㅡ그리스도 수동 순종을 증거하는 구절은 제외합니다. 즉, 그리스도 수동 순종을 증거하는 구절은 정이철 목사 {성경}에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ㅡ 그동안 제가 이 카페에 올린 글들,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한 정이철 목사 신학’을 비평한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㉑ ~ ㉝>을 요약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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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영생: 의義, 혹은 칭의)을 주는 율법의 축복 기능을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켜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8:5)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 (롬 7:10 상)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했거니와, (롬 10:5)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해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 1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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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죗값은 사망이다.”는 율법의 저주(정죄)를 받으심. 즉, 택함을 받은 죄인들 죗값을 대신 치르신 그리스도 수동 순종을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예수께서는 우리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롬 4:25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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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지키심으로써 “율법을 지키면 살리라. 생명을 얻을 것이다.”는 율법의 축복을 얻으심. 즉,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덧입혀 줄 의義(거듭난 새 생명,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를 얻으신 그리스도 능동순종을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 4:25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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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능동 순종에 따른 부활을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그분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건하심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느니라. (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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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서 수동 순종과 능동 순종’, 그리고 ‘그 공효에 따른 의義의 전가’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곧 우리가 원수 됐을 때에 그분 아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됐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분 아들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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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위치로 자신을 낮추셨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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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 전체를 지킴으로써 얻는 칭의(의義)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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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께서 부활 때 받으신 칭의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딤전 3:16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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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율법 아래 나심과 이에 따른 우리 속량과 양자 삼으심(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을 증거하는 갈라디아서 4장 4절~5절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 담긴 뜻을 독해하지 못하는, 선악과 금령 행위(생명)언약에서 ‘지키면 살리라. 영생을 얻으리라.’는 율법의 축복을 독해하지 못하는 정이철 목사는 ‘아기 예수께서 받으신 할례의 뜻’, “경건의 비밀”을 독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ㅠㅠ.
덧말: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독해력이 뒤떨어지는 정이철 목사가 “성경에 ‘할례할 팔일이 되니, 그 이름을 예수라 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아기 예수가 할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고 주장할까, 웃픕니다. 웃픔이라기보다는 ‘계시 의존 사색 없는 사변 신학에 따른 좌충우돌 논리로 자신뿐만 아니라 스승 서철원 목사님을 정죄하는 줄도 모르는 정이철 목사’를 낳으신 서철원 목사님7)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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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7쪽에서 옮깁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성에 도달한 존재가 아니고, 자기가 도달해야 할 길 시작에 서 있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존재로 창조됐음으로 행위 언약을 체결해 하늘의 그리스도에게 인양하려고 하셨다고 이해하는 전통적 언약 사상은 성경 계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 아니고, 영생은 하나님 백성으로 그분 법대로 사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봐야 옳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심으로 자기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왕이 되셔서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들 봉사를 받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특별조물로 곧 하나님 복사물로 지으셨다.
2) 더 자세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파이퍼 문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계승자 중 일부를 (절대 전부는 아니다) 추종해, 예수의 완전한 순종(십자가상 죽음과 같은 ‘수동 순종’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능동 순종’)이 이러한 안전의 기초라는 전제를 통해 이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예수는 ‘율법을 성취해서’, 율법에 기초를 둔 ‘의’의 보고를 쌓아 올렸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의’가 없으며, 쌓아 놓은 법적인 공로도 없고, 선한 행실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쌓아 올린 보고로 피할 수 있다. 내가 파이퍼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런 설명은 신학적으로나 주석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3) 더 자세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그 순종이 예수의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암시, 더구나 모세의 율법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는 암시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로마서 5장에서 살펴봤듯이 예수의 ‘순종’(빌립보서 2장 8절을 상호 참조하는 로마서 5장 19절)이 반영하는 실제는 이사야서 종의 ‘순종’과 일치하는 예수의 죽음이란 성취다. 율법은 그 단계에서는 단역배우가 돼(롬 5:20), 전체 과정에 새로운 굴곡을 더하기는 해도, ‘능동 순종’(예수의 이 순종에 힘입어 의가 쟁취된다고 생각된다) 신학의 기초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중략)··· 따라서 예수는 ‘율법에 순종했으며’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의’를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생각이 내가 속한 전통을 포함해 그 아무리 경건한 개혁주의 전통 주장이라 해도, 명백한 범주 오류다.
4) 기억에 의존한 인용이기에 텍스트를 적지 못합니다.
5) 다음은 그 예입니다. ‘김홍전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 ①} (서울: 성약출판사, 2004)’ 321쪽~322쪽에서 옮기는 강설입니다.
예수님 지상생활의 의미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도달하려고 하신 지점은 전체로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 생애는 율법의 완성으로서 생활입니다. 예수님 지상생활은 십자가를 향해 가기 위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생활 자체가 항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 안셀무스(1033~1109) 같은 사람들이 말한 “예수님이 지상에서 율법을 준수하고 사신 생활은 당신도 사람이니까 사람으로서 당신 자신이 져야 할 의무를 한 것뿐이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무를 충실히 다 이행하셨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올 은혜의 내용을 구성하기 위한 거룩한 공로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초부터 땅에 올 까닭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신 목적은 우리 때문이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올 까닭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것을 당연한 것같이 생각하고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서 의롭게 사신 것은 사람으로서 당신 자신의 의무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는 안셀무스적인 생각대로라면, 예수님 지상생활은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최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이니까, 십자가를 위해서 그 생활이 필요했다.’ 하고 이렇게만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그것을 다 자세히 논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여러분께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 지상생활은 그것대로 우리와 항상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생활은 율법을 온전히 완성하시는 생활입니다.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는 생활을 하심으로써 율법이 당연히 약속한바 율법의 의를 완성할 때 하나님께서 주겠노라 하신 영원한 생명, 영생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완성한 유일의 인물이신 예수님께만 있는 일입니다.
6) ‘칼빈 선생님께서 {기독교 강요}에서 피터 롬바드, 안셀무스, 오시안더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을 대항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써 얻으신 의와 그 의의 전가를 가르치셨음’을 밝힌 제 글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㉕ : 칼빈 선생님께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공효)’ 개념이 없으셨을까?>를 참고하십시오. 링크합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cafe/jMaU/67
7)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에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능동 순종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이루었으므로 우리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귀결에 도달합니다.”는 황당한 주장, 허수아비 논리를 펴십니다. 서철원 목사님께서 가르치시는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피 흘림)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서철원 목사님 이 교리ㅡ개혁 신학 수동 순종 교리ㅡ는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음(피 흘림)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뤄야 한다.’는 귀결에 도달하게 만드는 교리입니까? 이처럼 서철원 목사님 이 주장은 무지몽매한 좌충우돌 논리로서, 자신의 교리ㅡ개혁 신학 수동 순종 교리ㅡ마저 무너뜨리는 황당 논리입니다.
또한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에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이런 신학을 새관점 학파라고 하는데,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지 않고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사변입니다.”고 주장하십니다. 저는 이 문장만 떼어낸 이 주장 자체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는 사변 신학, 새관점 신학’을 반대하는 개혁 신학,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 수동 순종과 능동 순종을 가르치는 개혁 신학’을 뜻하셨다는 점에서 “다만 들은 풍월로만”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안타깝기만 합니다.
※. 지난 10월 29일 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바울 사도 증거에 담긴 뜻>이라는 제목으로 {페북} 그룹 {형람서원}과 {개혁주의 신조 모임} 두 곳에 올린 제 글을 더 자세히 업그레이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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