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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기춘(金淇春, 1939년~ ) 청와대 전 비서실장
1939년 11월 25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외포초등학교, 마산중학교를 거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부친은 태평양전쟁, 6.25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이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일을 하면서 고학했다고 한다.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재학 중이던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서 출세길이 열리게 된다.
거기다 재학시절 5.16쿠데타에 공을 세운 부친 덕에 5.16 장학회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정수장학회의 전신)의 장학금을 받아서 학업을 했고, 입대전 합격했기 때문에 해군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친다. 군복무 시절 대학원에 재학했고,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어 검사로 법조계에 입문하여, 광주지검 근무 시절 지금의 부인 박화자씨와 결혼했다. 이어 부산지검,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대구고검의 검사장을 지냈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그는 출세지향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보였는데, 심재륜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검사 때 법무부 장관 신직수의 눈에 띠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을 오르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찍 일어나 출세를 위해 상관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신직수는 또 하나의 독재정권의 법률부역자로 부친이 박정희의 군 선배인 데다 5.16 때 박정희의 부대에 법무관으로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0대부터 검찰총장을 맡는 것을 시작으로 40대에 법무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는 등, 법조계-관계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김기춘은 이런 신직수에게 아침부터 눈도장 찍는 짓거리를 한 끝에 신직수의 눈에 들고, 신직수는 충성심이 있어보이는 김기춘을 박정희에게 적극 천거하여 박정희의 눈에 띠게 된다. 그 후로 출세.
유신시대 : 제1의 전성시대
유신헌법 저작권자
재선까지 허용한 헌법을 고쳐 삼선을 하고도 만족을 못 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박정희는 아예 연임제한을 없애고 체육관 선거로 국민의 참정권을 차단하는 새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신참 검사이던 김기춘에게 개헌을 맡겼다. 당시 김기춘은 법무부 인권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인권과는 안드로메다로 거리가 있던 그가 이런 직책을 맡은 것부터 코메디.
김기춘은 유신헌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이후에 갈봉근, 한태연과 같은 헌법학자들이 합류하여 헌법 개정작업에 착수하기는 하지만, 갈봉근과 한태연의 회고에 의하면, 이미 김기춘이 만들어 놓은 뼈대는 손도 못 대게 했다고 한다. 즉, 유신 헌법은 김기춘의 손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김기춘은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검찰 기관지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다. (1972.12 <유신헌법 해설>)
유신헌법은 우리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땅에 뿌리 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며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지지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TV에 출연해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적극 해설하면서 유신의 나팔수가 된다.
실제로 박정희 체제는 김기춘의 이러한 논리를 이용해 유신헌법을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며 국민들을 세뇌했다.
이렇게 유신헌법의 실제적인 설계자가 되면서 더욱 큰 출세길이 열리게 된다. 1973년 신직수가 법무장관에서 중앙정보부장(부총리급)으로 승진함에 따라 그는 자신의 가신이었던 김기춘을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으로 데리고 간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검찰보다도 더 큰 위세를 휘두르고 있었다.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을 수사하는데 공을 세워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박정희는 김기춘을 김똘똘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박정희의 예조프
당시 중정 대공수사국은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를 위해 온갖 무리수를 일삼던 중앙정보부 최대 부서였으며, 김기춘은 30대의 나이로 이 부서를 지휘하면서 온갖 무리수를 벌인다. 이 당시 중앙정보부는 스탈린시절의 소련 NKVD와 거의 하는 일이 같았으며, 소련의 대숙청시절과 마찬가지로 독재에 반대하는 수많은 세력을 체포해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하는 일이 본업이었다. 이렇게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지냈던 동안 수많은 용공 간첩조작 사건에 수사 기획자로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가 직접 조작하거나 조작 의혹이 있는 사건만 여러 건이다. 1974년 유신헌법의 긴급 조치위반을 북한의 지령이라고 주장하여 주동자들에게 간첩혐의를 씌운 민청학련 사건이 대표적이며,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재심으로 무죄 및 8명의 사법살인으로 확정된 인민혁명당 사건 (1974년 4월 )등등이 있다.
이 당시 김기춘이 지휘하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이 간첩조작을 일삼았던 이유는 공포정치로 국민들에게 겁을 주고, 사회분위기를 경직시켜 유신에 비판적인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외에도, 북에서 보내는 간첩 수가 실제로 줄어서 공안조직이 개점휴업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비대해진 방첩조직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굵직굵직한 간첩사건은 있어야 했다. 1960년대까지 북에서 보내는 남파간첩은 대체로 지리와 풍습에 익숙한 월북자들이었는데, 분단이 20년 이상 고착화되자 이들도 남한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데다가, 대부분 40- 50대에 이르는 등 고령화되어 남파되어도 효과적인 공작활동이 힘들어졌다. 때문에 북에서도 양이 아니라 질을 중시하게 되고, 특수훈련을 받은 소수의 정예 공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70년대 중반이 되자 남파간첩수가 격감하였고, 그나마 남파되는 간첩도 훈련이 잘되어있다보니 5-60년대처럼 잘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방첩 조직은 노는 일이나 헛발질이 많아졌다. 그러므로 김기춘이 감독한 간첩조작은 정권안보 외에도, 자신의 실적 및 공안 조직보존의 1석 3조의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김기춘이 조작한 사건의 피해자들은 본인도 인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아니라 가족 친지마저도 연좌제 때문에 숱한 고초를 당했다.
이런 것을 보면, 김기춘이 제5공화국 정권에서 찬물을 먹었음에도, 5공정권의 대표적인 고문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을 다룬 변호인(영화)을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바로 이 영화가 자신이 중앙정보부에서 하던 짓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도 내오지만,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 재직 시절 이 영화를 관람한 후, 화를 엄청나게 내면서 그런 영화를 제작한 제작사를 왜 가만히 두냐고 부하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김기춘이 지휘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1975년 11월) 사건이 왜 악질이냐면, 자이니치로 온갖 차별을 받다가 조국의 품을 그리며 유학온 유학생의 조국애에 못을 박았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대한민국에 온 재일교포 출신 유학생이 500여 명 정도였는데, 이 사건으로 거의 그중의 10%에 가까운 40여 명이 연루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앙정보부에서 신나게 "첩보 소설 작가" 노릇을 하던 김기춘은 유신 말기 다시 엄청난 운빨을 다시 만나게 된다. 즉, 1979년 10.26 직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전근하게 된다. 그리고 10.26 이후 김재규를 제압하는 목적으로 보안사가 중정을 역으로 털었는데 이때부터 1차 암흑기가 시작된다. 왜냐면, 아래에 후술하겠지만, 원래부터 보안사와 중정은 유신 정국 상태의 박정희 독재를 통제하던 첩보기관으로 라이벌 관계였는데, 1977년 유운학 대대장 월북사건으로 화가 난 박정희가 중정을 시켜 보안사를 바로잡으라는 명령을 하고 그걸 김기춘의 지휘하에 보안사를 탈탈 털었기 때문에, 보안사는 단순히 경쟁 첩보기관 이상으로 김기춘에 악감정이 있었던 것. 그래서 10.26 이후 보안사가 중정을 제압할 때 보안사 간부들이 "김기춘 어딨어!"라고 이잡듯 뒤졌지만 10.26 직전 (3달 전)에 청와대로 전근갔기 때문에 위기를 피해간다. 김기춘이 만약 중앙정보부에 계속 있었다면 야인 수준이 아니라 그때의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5공화국 : 좌천시대
이렇게 70년대 잘나가가지만, 80년대는 된통 깨졌다. 그것은 김기춘이 중정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후반, 대통령의 명령으로 보안사를 크게 손보았다가 보안사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전두환 하나회 일당, 즉,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보복을 받기 때문이다.
김기춘이 보안사에 칼질을 하게 된 발단은 1977년 20사단 예하 62연대 1대대장 월북 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 듣고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대공국장으로 있던 심복 가신 김기춘에게 지시하여 국군보안사령부 조직 개혁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김기춘은 보안사 조직 축소안을 마련했고, 관련된 보안사-보안대 간부들을 여럿 중정에 끌고와 혼을 내주기도 했다.
이 사건은 보안사가 관할하던 사단 보안대가 전방부대 대대장(유운학 중령)을 과도하게 갈구는 바람에 그 대대장이 참다못해 월북한 사건이다. 보안대 관계자는 유운학에게 진급심사에 관련된 뇌물을 요구했으나, FM적인 성격의 유운학은 이를 거부헀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보안대 소속 장교들이 유운학을 괴롭혔다. 유운학은 보병학교에서 전술교관으로 근무했을 만큼 한국군의 전술을 꿰뚫고 있었으며, 장성진급도 유력한 인재였다고 한다. 이런 유운학이 무전병을 포섭해 월북하여 한국군의 작전교범뿐만 아니라 암호체계까지 모조리 북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한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유 중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고 계급의 현역 월북군인이었다. 이 사건은 명백한 보안사 잘못이어서 사실 보안대의 권한을 줄인 김기춘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필연적인 정보기관 사이의 암투 때문에 김기춘은 보안사 간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10.26 이후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가 중앙정보부를 접수했을 때, 중정에 들이닥친 보안사 요원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김기춘 어딨어!"였다. 하지만 김기춘은 가까스로 몇 달 전 청와대로 전직한 상태여서 보안사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정말 운빨은 기가막히게 터진다.
그나마 검찰에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검찰 부하로 있었던 노태우의 처조카인 박철언에게 줄을 댔고,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이던 대령 허화평에게 충성 맹세 편지를 써 보냈다. 이 일화는 박철언의 회고록에 나온다. 박철언은 나이로는 김기춘보다 3살 어리고, 고시합격은 8년 정도 늦은 사법시험 8회이니 기수를 중시하는 검찰로서는 까마득한 후배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 장영자-이철희 사건에서 김기춘은 국회증언에서 사건 축소가 전두환 지시라는 뉘앙스를 갖는 증언을 했다가 전두환의 노여움을 사지만, 이것도 박철언이 무마해줘서 옷을 벗지 않고 한직이었던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되어 연명할 수 있었다.
이때 끈이 떨어져 법무연수원에 근무하면서 찾아오는 손님이나 이전에는 여럿 거느렸던 부하들도 거의 없이 밥도 항상 혼자 먹는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유신시절 무소불위를 저지르던 과거를 감안하면 몰락의 극치였다. 문제는 이렇게 한직에 있을 때도 육영재단 등, 최태민-박근혜 일에 개입했다고 한다. 최태민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5공시절인 1980년대 남매-자매간 갖은 분쟁때문에 바람잘날이 없던 육영재단 일에 현직 검사이던 김기춘이 최태민-박근혜를 위해 자주 나타났다던 증언이 나왔다.
어쨌든, 공안검사들의 전성시대였던 제5공화국 때 70년대까지 고시 선두주자였던 김기춘은 중앙 요직이 아니라 계속 지방 한직으로 돌았으며, 이는 노태우가 집권하던 1988년 때까지 계속된다.
제6공화국 : 제2의 전성시대
전두환이 물러나자 그는 다시 출세가도를 달린다. 이는 김기춘의 후견인이었던 박철언이 6공의 황태자 노릇을 하면서 자신과 친분이 있던 김기춘을 적극 밀었기 때문이다. 5공 때 먹은 찬밥은 6공에서 전화위복이 되는데, 그는 5공 때 한직으로 돈 사실을 가지고 깨끗하고 강직한 검사로 연극했다. 1988년 만으로 50세인 나이에 검찰총장에 임명되는데, 이는 박정희의 또 다른 가신이었던 신직수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취임 기록이다. 이 당시 자신을 물먹인 5공화국 세력에 대한 단죄에 나서 5공비리 사범 50여 명을 구속시키는 등, 5공청산에 앞장서지만, 6공세력까지 얽혀져 있던 비리나 5.18과 같은 중요사안에 대해서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로 정권이 수세에 몰리자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을 터트려 정권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구원자 역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의혹인데, 이때 서경원의 소속당이었던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연루되어 있다는 언플을 하면서 김대중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으나,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결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5월 27일에서 이듬해 10월 8일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과 힘을 합쳐서 6월 항쟁에 국민의 요구로 이루었던 많은 개혁조치를 되돌리는 반동정책을 행하면서 학생운동권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여기에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386세대 최후의 항쟁이라는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이 벌어져 정권은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때 매주 분신자가 나오면서 전국민 항쟁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김지하는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라는 글을 기고해 운동권이 기획분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와 동시에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루카 신부가 "분신을 부추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5월 27일 막 법무부 장관으로 등판한 김기춘은 주작 솜씨를 발휘, "김지하와 박홍 신부의 말이 근거 있다"며 검찰에 특별 수사를 지시하여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킨다. 즉, 재야단체 전민련에 소속되어 있던 운동권 강기훈이 운동권 동지였던 김기설씨의 분신자살(1991년 5월 8일)을 부추기고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플롯을 짠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 분신정국은 급속히 공안정국으로 반전되었다. 김기춘은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정권의 위기를 찬스로 전환시켰고, 운동권은 치명타를 입었다. 강기훈은 무려 24년 만에 2015년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지휘한 김기춘이나 관련 공안 검사들은 전혀 사과나 반성을 한 바가 없다.
문민정부: 생존의 달인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당연히 청산 대상이 되어야 정상이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운빨이 터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영삼과 동향 및 동문이라는 이유였다. 5공, 6공 시절 김기춘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박철언은 김영삼과의 불화로 정치보복을 받아 소위 "슬롯머신 비리"사건으로 감방에 갔는데 김기춘은 박철언과 가까이 지냈음에도 무사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운빨과 보신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할 듯.
김기춘은 3당합당이후 여당정치인이 된 김영삼에 일찌감치 줄을 서왔으며,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난 1992년 12월 11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 조장을 음모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측은 거꾸로 정주영측의 도청을 문제삼았고, 부산 민심은 김영삼에 기울어, 김영삼은 대통령선거에서 낙승했다.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이 진행되는 중 당시 대통령선거법 규정을 위헌제청신청하는 기발한 수를 낸다. 그러니까 법률적으로는 도저히 선거법 위반 혐위를 피해나갈 수 없자, 본인이 당시 야인이었음을 이용하여, "나는 공직을 퇴임한 일개 시민인데, 이렇게 선거운동할 수도 있는게 아니냐"는 기발한 논리를 개발하여 대통령선거법을 위헌 제청 신청한 것.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선거법의 해당 조항이 위헌결정되면서 검찰의 공소가 취소되고, 김기춘 역시 기적적으로 법적 처벌을 면하게 된다. 정말 위기를 빠져나가는 데는 엄청난 재주가 있다.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995년 2월에는 KBO 총재에 임명된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거제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당시에도 유신헌법의 초안자라는 점, 초원복집 사건의 주범이라는 점이 결격사유로 지적되었는데, 김기춘은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나와 관련된 얘기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유신이 이뤄진 1972년에 나는 당시 임용된 지 7년된 만 32살의 평검사였다. 나는 내가 역사를 왜곡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복국집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내가 경남 분들이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얘기는 했지만 호남을 비방한 적은 전혀 없다.
선거 결과 김기춘은 압도적인 표차로 다른 후보들을 누르고 당선된다. 거제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이었던 만큼, 여당 후보로 출마한 이상 국회의원 당선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절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여 따낸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는 정치적 방탄복이 되었고, 그는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진 유신-5공시절의 여러 조작사건에서 검사나 수사관으로 활약했음에도 아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2004년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서를 보여주는 김기춘. 왼쪽은 당시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이 분당되어 나간 잔류민주당)에 있다가 참여정부 말기 친박으로 전향한 함승희(낙선 후, 강원랜드 사장으로 있다.)
과거 공안 조작사건 기획과 지역감정 유발, 공작정치의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총선 낙선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3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탄핵심판 청구인이 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했다.
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싸이코라고 지칭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의 좌장노릇을 했으며, 원로 친박 정치인으로 구성된 7인회의 일원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에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이 친박 대학살을 할 때 너무 고령이다라는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해서 야인이 되었다.
이후 2009년부터 2013년 8월 박근혜 정부 비서실장이 되기까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이 당시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최순실 일당과 가까이 지낸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