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한 독일과, 승부처로 보고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한 영국의 대응으로 인해 영불 해협에서 런던에 이르는 상공은 다시 재현하기 힘든 사상 최대 항공전의 무대가 되었다. 폭이 50여 km에 이르는 좁은 지역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으나 독일이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 전투기를 저지하기엔 독일의 자랑인 Bf 109의 항속거리와 체공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스피트파이어를 뒤쫓는 Bf 109. 두 전투기는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라이벌이 되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은 항속거리가 짧은 Bf 109가 홈코트의 스피트파이어보다 불리한 여건이었다.
독일 공군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영국의 철벽 같은 방어에 막혔고 그러는 사이에 폭격기들은 불을 뿜으며 사라져 갔다. 심각한 상황을 보고받았음에도 어떻게든 끝장을 보려 한 괴링은 계속해서 후속 비행대를 발진시켰다. 그 사이에 연료와 총탄을 보충한 영국 전투기들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이들을 맞이했다. 수적으로는 독일이 앞섰지만 적진에서 싸우는 핸디캡 때문에 전력의 차이는 그다지 있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오면서 하루 종일 이어진 이른바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은 막을 내렸다. 더 이상 투입할 기체가 없었을 만큼 전력을 다했던 영국은 29기의 전투기 손실을 본 반면 독일은 43기의 폭격기와 18기의 전투기를 잃었다. 탈출한 독일의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포로가 된 반면 영국의 조종사들은 유유히 원대로 복귀했다. 영국의 대승이었고 괴링은 예상을 벗어난 엄청난 손실에 경악했다.
작전을 마치고 귀환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채 동체 착륙한 KG54 소속 Ju 88 폭격기. 갈수록 늘어가는 손실에 독일의 고민은 깊어갔다.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에 분노한 괴링은 즉시 대공습을 계획했으나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 9월 17일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이를 능가하거나 맞먹는 여러 항공전이 있었음에도 9월 15일 전투를 별도로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이라 부르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거시적으로 볼 때 제2차 대전의 분수령이기도 했다.
괴링이 재출격 준비에 분주한 동안 OKW로부터 지지부진한 전황을 보고받은 히틀러는 9월 17일, 괴링과 상륙군을 이끌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에게 바다사자 작전의 실행을 무기한 연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연기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 침공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바다사자 작전의 계획도. 공군의 지지부진한 전과에 실망한 히틀러는 결국 영국 침공을 포기했다. 설령 계획대로 진행되었어도 독일군의 상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출처: (cc) Sealion.svg: Rama at Wikimedia.org>
히틀러가 갑자기 왜 영국을 포기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독일 공군의 손실이 생각보다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영국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오히려 과오를 깨닫고 다시 처음처럼 군사 시설을 중심으로 폭격 작전을 펼쳤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었다. 많은 자료에서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거론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어쨌든 영국은 물론 독일도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히틀러의 결심을 몰랐다. 이제 영국 본토 항공전도 변화가 불가피했지만 괴링은 지금까지 했던 것이 아까워서인지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계속해서 독일 공군은 폭탄을 던지기 위해 영불 해협을 건넜고 대규모의 공중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하지만 진행 과정과 결과는 이전 전투의 재탕이어서 항상 독일의 피해가 영국의 2배를 넘었다.
독일의 본토 상륙이 취소되면서 영국은 살아날 수 있었지만 대공습은 독소전쟁 발발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결국 독일은 한계를 인정하고 10월부터 다시 야간 폭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침공을 포기했기에 이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졌지만 선전 효과가 큰 대도시가 계속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10월까지 넉 달 동안 독일은 2,000여 기를 상실하고 4,9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당했다. 끈질기게 저항한 영국의 피해는 1,700여 기 상실에 2,000여 명으로 독일에 비해 적었지만, 많은 물적 피해와 더불어 10만의 시민이 죽거나 다치는 아픔을 겪었다.
제2차 대전을 구성하는 수많은 전역 중 영국 본토 항공전은 그 시작과 끝이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한국에서는 항공전으로 표기하지만 영어로는 브리튼 섬을 중심으로 독일과 영국이 벌인 일련의 전투들을 의미하니 이론적으로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1939년 9월 3일에 시작되었다 해도 문제 삼기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영국 본토 상공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공중전이 개시된 1940년 7월 10일로 본다.
지붕 위에 올라 하늘을 감시하는 영국의 민방위 대원.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절정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종전 직전까지 감시 태세를 유지했다.
반면 끝에 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분분한 편이다. 우선 히틀러가 바다사자 작전을 포기한 9월 17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궁극적 목표가 영국 정복인데, 이를 포기했다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들에 그다지 의의를 부여하기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독일의 결정을 몰랐고 도시를 지도 위에서 지운 것 같았던 11월 14일의 코번트리(Coventry) 폭격처럼 표면적으로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V2 로켓의 공격에 의해 134명의 시민이 사망한 1945년 3월 27일을 종결 시점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사실 독일은 영국 정복은커녕 패전의 위기에 몰린 시점에서도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작전의 규모에 상관없이 영불 해협을 사이에 두고 계속 이어진 소소한 독일의 공격과 양국 공군의 충돌을 모두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본다면 이 또한 충분히 타당한 의견이다.
V2의 공격에 의해 파괴된 런던 시내의 모습. 이처럼 독소전쟁 발발 후에도 독일의 공습과 영불 해협 일대의 공중전은 종전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주장은 1941년 5월 10일의 대공습 이후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 폭격기들의 활동이 사라진 5월 21일이다. 아프리카, 지중해 일대에서 여전히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영국 본토는 이때부터 독일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 달 후에 소련 침공을 예정하고 있었기에 현실적으로 독일 공군이 더 이상 영국에 매달릴 수 없었고 독소전쟁이 개시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런던의 지하철은 대공습 당시 시민들에게 좋은 보호 시설이 되었다. 영국은 승리했지만 대신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약 11개월간 이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의 의도가 좌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하늘에서의 엄청난 공격을 막아낸 대가로 영국은 너무나 커다란 인적, 물적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나중에 몇 배나 많은 폭탄을 독일에게 되돌려 주게 되지만 이 기간 동안 영국은 무려 4만 9,359톤의 각종 폭탄을 얻어맞았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직접 전투를 벌인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으로 영국은 초유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무튼 덕분에 독일은 배후의 단속을 이루지 못한 채 소련을 침공하게 되었고 결국 이는 패전에 이르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와 관련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국을 처단한 후 소련을 공격해야 했다는 주장과, 애당초 소련을 침공할 생각이었다면 상륙 능력도 없는데 굳이 영국 침공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 등등이 거론된다. 결국 둘 다 양면 전쟁을 자초한 독일의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다.
그런데 영국 본토 항공전은 제2차 대전사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한 전역이지만 정작 마주 보고 직접 싸운 양측의 조종사들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치 모두를 대표해 단기필마로 결투에 나선 중세의 기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처칠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적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로 이들의 노고를 칭송했다. 인류 역사에 이런 전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처럼 이전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하늘에서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은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거침없이 팽창해 오던 독일이 처음으로 맛본 좌절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퍼붓는 폭탄의 비에서 살아남은 영국은 이후 유럽 해방을 이룬 든든한 교두보가 되었다. 만일 이때 영국이 좌절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만큼 영국 본토 항공전은 보이는 것보다 담겨 있는 의의가 큰 전쟁이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