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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탄생하고 발달하다가 쇠약해지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 중에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이 있다. 인류 문명의 역사가 환경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그런데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기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론이 기후결정론(climate determinism)이다. 기후변화가 문명 성쇠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문명의 성쇠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기후변화가 방아쇠의 역할을 했을 수 있다.
4대 문명은 약 5,000년 전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황허 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큰 강 유역’이었다는 것이다. 고대 문명들은 왜 큰 강 옆에서 발달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기후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고기후 연구에 의하면 드라이아스 소빙하기가 끝난 후(기원전 9,000년) 고온기가 3,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도 적절히 내렸다. 지구 상의 상당히 넓은 지역이 농업을 하면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 특별히 강 유역을 고집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5,000년부터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농경 생활을 하던 인류에게 기온 저하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다가 강수량도 급속히 줄었다. 농작물 생산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먹을 물도 부족해졌다. 결국 사람들은 물이 있는 큰 강 유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큰 강 유역에는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있었다. 물을 찾아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물의 소비가 늘고 식량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식량과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개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관개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 같은 조직이 필요해진다. 문명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다.
강 주변에 문명이 발생한 두 번째 이유는 강의 범람으로 주변 토양이 비옥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더스 강의 경우 매년 6~8월경에 우기로 접어든다. 이때 계절풍이 불어오고 비가 많이 내리면 강이 범람해 주변이 물에 잠기면서 비옥한 충적토가 축적된다.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 씨를 뿌리고 다음 해 우기가 되기 전에 수확을 한다. 그러면 다시 몬순이 찾아오고 충적토가 쌓이는 순환구조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범람농경’이다.
강 주변에 문명이 발생한 세 번째 원인은 강이 교통로의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성하면 자연스럽게 많은 물자를 운반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런데 당시의 여건으로 볼 때, 건축에 사용하는 목재나 석재를 육로로 운반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배를 이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 강을 통해 대량의 레바논 삼나무를 운반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상류 아스완의 석재를 하류까지 운반했다. 마지막 이유로 큰 강은 다른 부족의 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방어막의 역할도 했다. 이런 이유들로 큰 강 주변에서 고대 문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학자들은 세계 최초의 문명이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살아온 인류가 맨 처음 농경을 시작한 곳이 중동의 ‘레반트(Levant)’였다(W. K. 스티븐스, 2005). 하버드대학의 고고학자 바요세프(Ofer Bar-Yosef)는 마지막 빙하시대가 끝나면서 기원전 9,000년경부터 인류의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농경이 시작된 것은 기후변화 때문이었다고 바요세프는 말한다. 기후가 온난하고 강수량이 풍부해지면서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로는 당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수렵이나 채취로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농경의 시작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도시 문명이 일어난 계기가 된다. 농업은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돌이킬 수 없는 산업으로 발전했다. 곧바로 밀, 보리, 콩, 완두콩 등이 재배됐다. 농업은 레반트로부터 북쪽으로는 터키, 남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까지 퍼졌다.
농업 인구가 늘어나자 새로운 경작지가 필요했다. 8,000년 전쯤에는 터키 전 지역에 농사를 짓는 작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도 조그마한 마을들이 생겨났다.
《태초에 담수의 신 압수와 바다의 신 티아마트만이 있었다. 둘이 결혼하여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을 낳았다. 땅의 신은 비의 신을 낳았다. 용의 형상을 한 티아마트는 매우 악했다. 아름답고 선한 생명체가 많으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착한 신들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착한 신들이 티아마트를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비의 신에게 티아마트와 싸워줄 것을 부탁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창조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다른 문명과 달리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민물과 바닷물이 주(主)신이 된다. 이것은 기후와 지리적 영향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문명은 기원전 5,000년경에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경계인 습지에 위치해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습지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탄생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지하자원이나 금속자원이 없었다. 농사를 짓기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돌과 나무도 부족한 곳이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진흙과 지하수뿐이었다. 이 지역의 주거지가 진흙과 물로 만든 벽돌로 지어진 점, 그리고 점토판에 기록을 남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강 사이에 있는 좁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강 하류에 형성된 토지는 상당히 비옥했다. 하류는 농사를 짓기에는 좋았으나 강의 잦은 범람으로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았다. 홍수가 빈번하게 일어나 ‘자주 범람하는 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티그리스 강 유역은 더했다. 물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기원전 5,000년경에 사람들은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해 관개사업을 벌였다. 이로 인해 강력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농경 생활을 영위하던 주민들의 거주지는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메르인들이 건설한 가장 오래된 도시는 에리두(Eridu)이다. 현재 이라크의 아부 샤라인 지역, 즉 유프라테스 강에서 남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에리두가 자리 잡고 있다. 1946년에서 1948년에 걸쳐 이라크 박물관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에리두 유적은 그 기원이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리두 주변에서는 당시 농경 생활을 했던 부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적의 가장 아래층에서는 제단과 화덕으로 추정되는 신전 유적도 발견되었다. 신전 유적은 가장 아래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커져, 작은 촌락에서 점차 커다란 도시로 발전해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에리두의 신전에서는 물과 지혜의 신인 엔키(Enki)를 숭배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물은 중요한 자원인 동시에 홍수를 일으키는 무서운 존재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물의 신을 위해 신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숭배하는 일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에리두는 엔키 신앙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기후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커다란 홍수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도시를 재건하면서 다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기원전 3,500년경에는 수메르인들이 세운 고대도시 우루크(Uruk)를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들이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문명이 탄생했다.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원에 세워진 최초의 도시 중 하나가 우루크였다. 기원전 3,000년의 우루크는 잉여 곡물의 강대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돌로 쌓은 이 도시의 거대한 성벽 안에는 웅장한 지구라트와 사원, 그리고 왕의 권능을 과시하는 왕궁들이 있었다. 잉여 식량 생산으로 시작된 우루크의 부는 더 커졌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교역로와 낙타 대상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 개의 주요 교역로를 통해 식품을 팔았다. 유프라테스 강은 시리아와 북서쪽의 아나톨리아에 닿았다. 동쪽으로 가는 육로는 이란 고원을 연결했다. 남쪽 길은 페르시아 만과 마간(Magan)2) 등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이들 교역로는 청동기 시대의 귀중품이 이동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이런 도시국가들은 점차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기원전 3,000년경에는 또 다른 도시국가 우르가 건설되면서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전성기를 맞는다. 성경에도 나오는 우르는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또한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고대도시 우르의 유적은 현재 이라크의 텔엘무카이야르(Tall al-Muqayyar) 지역에 존재한다. 영국의 고고학자 울리(Charles Leonard Woolley)가 1925년부터 1931년까지 약 6년에 걸친 조사를 벌여 왕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 무덤에서 금과 은, 옥을 사용해 만든 도검과 악기 등이 출토되었다. 함께 매장되어 있던 점토판을 통해 우르가 주변 국가들은 물론 세계 각지와 폭넓은 교역을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우르는 타원형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주위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주변 국가와의 교역로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들이 인도와 이집트까지 교역을 했다는 사실이 발굴된 유물을 통해 확인되었다.
우르는 남무 왕(재위 B.C.2112?~B.C.2096) 때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메소포타미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했던 남무 왕은 신전을 건설했다. 세로 63미터, 가로 43미터의 부지 위에 30미터 높이로 쌓은 지구라트였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 각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지구라트로 대표되는 건축물을 남겼던 수메르 문명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밀의 수확량이 40% 감소했고, 급기야는 밀의 수확이 거의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강물을 끌어 관개 경작을 한 결과였다.
농작물에 물을 주기 위해 뿌려진 물이 증발되면서 흙 속의 염분이 지표로 표출되었다. 소금기에 민감한 밀의 생장이 멈춰진 것이다. 밀 생산이 줄어들면서 국가 경제는 약화되었다. 기원전 2,350년경 사르곤 왕이 이끄는 셈족 계열의 아카드인들이 침입하면서 우르의 수메르인들은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기원전 2,200년경에 아카드 제국이 멸망한 뒤 수메르인들은 우르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기원전 2,000년경에 아모리인들(Amorites)이 서쪽으로부터 쳐들어와 수메르의 도시들을 정복했던 것이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을 역사에서는 바빌로니아인 또는 구바빌로니아인(Old-Babylonians)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지배에도 수메르 문화는 남았지만 수메르인의 지배는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