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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황제(漢武皇帝, 기원전, 157년∼87년)
❮사기(史記)❯ 외척세가(外戚世家)에 따르면 경제는 문제의 제5황자로 태어났는데, 형 네 사람이 모두 문제가 대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 일찍 사망하고 기원전 180년 아버지가 황제에 올라 생모 두씨가 문제의 정실로 승격되면서 문제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유학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 두씨로부터 도교를 배웠다. 황태자 시절 오왕(吳王) 비(濞)의 세자 현(賢)과 바둑을 두다가 자신이 지게 되자 한 수 물러달라고 했다가 세자가 거절하자, 홧김에 바둑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는데, 이 문제로 한의 중앙 정부와 오왕의 관계가 냉랭해졌으나 문제의 정치적 배려로 사태는 겨우 수습되었으며, 훗날 오초칠국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57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경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정치를 이어받아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농 정책을 펼치고 세금을 줄이는 등 사회 안정을 실현시켰다(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조의 인구 90%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치세를 문제의 치세와 함께 ❮문경지치(文景之治)❯로 칭송하기도 한다.
중국은 주나라 이래로 장장 550년간의 춘추전국시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가난의 고통을 받고 살았고,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제자백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강력한 억압과 법질서를 내세운 진나라 아래서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결국 곧이어 벌어진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으로 진나라도 박살이 난다.
하지만 항우가 가는 곳마다 전대미문의 학살을 벌인데다가, 유방은 유방대로 항우를 이기기 위해 한계까지 한나라를 쥐어짜며 적국의 영토 또한 여력이 닿는 대로 약탈하거나 파괴했다. 그리고 그 후엔 다시 흉노가 강성해져 한나라를 위협했고, 이런 전쟁고통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그런 와중에 들어선 한나라의 5∼6대 황제 문제와 경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서, 전쟁 등 여러 대외사업을 자제하고 나라를 윤택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과장은 좀 있겠지만 당시 대다수 백성들이 노새를 타고 다녔고, 땅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를 않았으며, 창고에는 쌀들이 썩어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문경지치는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말로 후대의 황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소모적이고 거대한 대원정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황릉을 짓는 등 큰 규모의 토목 공사를 동시에 단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심각하게 낭비된 제국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무리한 정복전쟁으로 인한 군비 확장과 증세와 세금 신설을 단행해 군중들의 삶이 고달파지게 하였다. 또한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한나라를 엄청난 군사제국으로 성장시킨 큰 업적들도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한제국의 국력을 대거 낭비하는 등 폐해도 상당히 남긴 황제이기 때문에 명군과 암군의 경계선상에 애매하게 걸쳐져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성격이 꽤나 다혈질이었는지 심기를 거스르게 하면 혈족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였다. 특히 그의 치세에서 고문당하거나 잔혹한 형벌로 죽은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알고 보면 큰 잘못도 없는 사마천을 고자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였고, 애먼 이릉의 일족을 몰살시켜 이릉이 흉노제국에 투항하게 만들고, 본의는 아니지만 괴철의 이름을 바꾼 황제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황제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한 황제.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漢武盛世)가 있으나, 그보다는 진황한무(秦皇漢武)가 더 많이 쓰인다.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하게 업적도 과오도 뚜렷한 황제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독일의 중국사학자 한스 반 에스는 꽤 과감한 내용을 담은 연구를 하나 내놓았다. 그는 사기에 서술된 진시황제의 전쟁사적 행적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상당부분이 한무제의 기록된 군사적 행적들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많고 의도적으로 배치되어있다고 주장한다. 해당 구절들에 대한 상당히 꼼꼼한 대조와 분석의 결과, 반 에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마천의 본래 목적은 진시황제와 진나라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무제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의고의 전통이 강한 서구의 중국사학자들의 주장 중에서도 조금 심하게 많이 나간 케이스고, 대다수는 사마천의 서술이 그래도 ‘대체로’ 신뢰할 만한 사료임을 인정하고 있다.
원래 한무제는 부황 한경제의 11번째 아들로 교동왕(膠東王)이었다. 경제는 박 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박 황후가 폐위된 뒤에 누구를 새 황후로 삼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무제의 어머니인 왕지는 경제의 유일한 친누나인 관도공주의 딸 진아교와 자신의 아들 유철을 혼인시킨 후 관도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자신이 새 황후가 되고 유철을 황태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관도공주는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황태자 유영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 아마도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관도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 외에 경제가 자신이 죽으면 율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지와 관도공주의 공작의 결과 율희가 아닌 왕지가 새 황후가 되었으며, 유영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유철이 새 태자가 되었다. 이후 경제는 황태자 폐위를 반대한 주아부를 유사하게 했고, 유영의 스승이자 효문황후의 조카며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위기후 두영을 실각시키고 왕지의 동생인 무안후 전분을 승상에 앉혔다. 한편 황태제를 노린 동생 양효왕 유무는 비록 어머니의 편애 때문에 대놓고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입조를 막는 등 냉대했다. 그 후에야 유철, 즉 한무제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성세(漢武盛世)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년∼기원전 104년)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공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즉위 초에는 할머니 효문황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위기후 두영을 처형하는 등 효문황후의 친정 일족을 숙청해버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한 무제는 절대로 유학을 국가 전체의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는 문경지치(文景之治)를 포함하여 상당 부분 도가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효문황후는 이러한 통치 체제를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 무제는 오히려 법가적 성향을 아주 강하게 드러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린 관리인 순리와 가혹하게 다스린 혹리를 각각 별도로 다루고 있는데, 이 가혹한 법가적 관리인 혹리들의 상당수가 바로 한 무제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육가와의 문답을 통해서 유교를 한나라에 받아들인 한고조의 목적이 유교 이념으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위아래가 없었던 초기 조정의 위상을 잡기 위한 것처럼, 한 무제가 동중서의 제안을 체택한 것도 문경지치의 도가적 지침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무제는 유교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실제로는 법가적 통치를 하였고, 이 모든 통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다만 진시황의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된 한나라의 특성상 법가의 이름을 대놓고 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내놓은 것이 바로 유교였다. 이후 전한 시대에도 유교는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원제(元帝 劉奭, 기원전 76년∼기원전 33년)가 유학에 심취하기 시작한 이래 왕망(王莽, 기원전 45년∼기원후 23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교 논리가 국가의 통치논리와 합일되기 시작한다.
위청(衛靑), 이광(李廣), 곽거병(霍去病) 등의 명장들을 파견해 한고조 시절부터 한과 대립하던 흉노족을 개박살내고, 남월과 조선을 정복하며,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했다. 또한 한 무제 당대까지도 이민족 국가의 영역이었던 푸젠 성과 저장 성 일대를 중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킨 것도 한 무제의 공이다.
또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하여 군인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동시에 현지에서 둔전을 개간하여 군수 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흉노로부터 빼앗은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만약에 무제의 영웅적인 재주와 위대한 지략이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이 백성들을 구제했던 일을 바꾸지만 않았더라면, 설사❮시경(詩經)❯이나❮서경(書經)❯에서 칭송한 일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서(漢書)❯ 무제기
한무성세(漢武盛世)라는 말이 존재하면서도 한 무제가 후대 사람들에게도 비판의 주 대상인 것은 화려했던 제국의 겉모습의 다른 한편으로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이것이 결국 전한의 쇠퇴 원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한무제 본인의 군주로서의 결함으로 인한 사치 및 신하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역시 제국의 쇠퇴에 기여했다.
한 무제의 화려한 군사 원정과 로망을 자극하는 기린아 곽거병의 원정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한 제국의 강대함과 위대함을 칭송하게 하며 한 무제-곽거병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하지만 한 무제 당시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성들을 고통의 나락에 밀어 처넣어주신 폭군이다. 문제, 경제 시대부터 이어진 ‘곡식이 썩어나고 창고에는 온갖 재화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박살낸 원수에 가깝다. 특히 즉위 초의 백성을 위해 베풀던 선정의 시절은 할머니인 효문황후(孝文皇后 竇猗, ?∼기원전 135년)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 대부분이며, 효문황후가 죽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폭군으로서의 마각(馬脚)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무제는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능을 일찍 건설하는 것 자체는 평균 수명이 짧았던 그 당시의 황제라면 당연히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효문황후가 죽은 뒤로는 규모를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중국 CCTV의 서한제릉(西漢帝陵)이라는 서한 황제들의 황릉 건설과 사회 정치사 등 12부작 가량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황장제주(黃腸題湊)로 지하궁을 꾸미고 방마다 제물이 가득하며 능침 주변으로 수백 마리 이상의 동물 순장갱이 나온다. 말년에는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長樂宮)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建章宮)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기린아 곽거병의 우주를 뚫는 화려하고도 찬란한 대군을 이끈 군사 원정은 한 제국의 국고를 아낌없이 탈탈탈 털어주었는데 여기에 추가로 한 무제 본인이 벌이는 대규모 토목 공사들이 겹치면서 재정이 엄청나게 낭비되었고 이를 메우기 위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기만 하였다. 게다가 곽거병의 군사 원정을 비롯한 한나라의 흉노, 남월, 고조선 공격은 한 제국의 엄청난 재정 낭비 부담을 덜어줄 추가적인 재정 마련의 일환이 된 것도 아니었다.
한무제 치세 전반에 걸쳐, 흉노 원정은 지속되었다. 기원전 129년 한나라는 흉노를 파멸시키거나 혹은 복속시키겠다는 대전략을 세운 후, 최초의 대규모 장거리 원정을 시행했다. 전쟁 첫 십년에 걸쳐 한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다. 허나 흉노와의 전쟁은 서서히 결말이 나지 않는 지리한 혈투로 고착화되어갔다. 기원전 129년 이뤄진 첫 대규모 원정을 보면, 각기 다른 4개의 기병부대가 동원되었고 각 한 개 기병군단의 숫자는 1만 정예병이라 보고된다. 기원전 119년 원정을 보면 두 개의 독립적인 기병부대가 동원되었는데, 각 기병군단의 숫자는 5만 정도였다. 기원전 97년에 이르면, 총 7만에 달하는 기병과 14만 보병대가 흉노 원정에 파견되었다. 한나라 군대의 공세는 막강한 기병대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다만 사서(史書)에 나온 숫자를 꼭 문자 그대로 신뢰할 필요는 없는데, 한의 사관들은 말버릇처럼 기병에 대해 “수만수만”을 읊조리기 때문이다.
기원전 119년의 원정에서는 말을 14만 필 동원했는데 살아 돌아온 건 고작 3만 필뿐이었다고 하니 원정의 소모가 어마어마했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대규모 기병공세는 수양제가 113만을 동원해 고구려 원정을 갔을 때 중기병만 10만을 동원했다든가, 원명교체기인 1372년쯤에 홍무제가 기병 15만을 3등분해서 몽골 원정을 시켰던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한나라를 제외하면 고대의 그 어떤 정주 제국도 보병은 몰라도, ‘10만’에 이르는 ‘기병’을 지속적으로 ‘장거리’ 원정에 투사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 마우리아 제국 어디도, 보병은 몰라도 10만 혹은 그에 육박하는 기병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그것도 수비가 아니라 ‘장거리 원정’에 투입한 사실은 없다. 무제 때는 아니고 나중인 한선제(漢宣帝) 때의 일인데, 흉노가 퇴각하다가 잘못 걸려서 선우의 친족들과 공주까지 포함된 3만 9천 명이 사로잡힌 적이 있다. 이런 물량공세에 흉노 역시 무작정 도망가는 작전을 맘놓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무제가 흉노와 치킨게임하며 끝내 격퇴하여 밟은 것이 꽤 여파가 길게 가고 북방 민족에 대해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긴 하지만,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과 토목 공사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 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했다. 그는 흉노 원정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제나라 출신 소금거물 동곽함양(東郭咸陽), 그리고 남양 출신 거물 철상인 공근(孔僅)이라는 특출난 재무적 역량을 가진 인재 두 명을 뽑았고, 이 둘을 탁월한 재정능력을 지닌 낙양의 대상인 가문 출신 인물인 상홍양(桑弘羊, 기원전 152년∼기원전 80년)에게 붙여주었다. 무제는 상홍양을 기용하여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심한 상업 통제로 부유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다. 상홍양의 정책은 후일 ‘막대한 국방비 재원 마련을 위해, 비정상적 경제계획과 재정정책, 특별세의 고안과 시장통제계획을 도입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중국학자 창춘수의 비판).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으로 이 점은 사마천이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 이 정책은 이렇게 상업의 발전을 억누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제 사후, 이 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鹽鐵論)”이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이때 술의 전매 제도는 폐지됐지만, 소금과 철은 무제 시기의 전매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정쟁은 국가 정책의 대립인 동시에 고명대신들의 권력 투쟁의 장이었고, 소제는 내조의 수장인 곽광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일제 사후 내조의 제2인자인 상관걸과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홍양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연왕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들키고 말았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비롯한 일족이 모조리 멸족을 당했고 균수, 평준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정책들은 곽광의 측근인 두언년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염철의 국가 개입과 경제 정책의 국가 주도는 이미 제환공 시절 관중이 시행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것이었고 후대 중국 왕조, 한국 왕조들도 사용해왔으며 현대 중국에서도 2017년까지도 소금 전매제가 유지되어오다가 시대의 변화로 소금전매가 더 이상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기가 되어서야 폐지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한 무제의 지나친 씀씀이와 흉노 원정으로 인한 재정적자 때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고 무제 자신은 구난 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다. 문제는 구난 사업을 펼쳐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입힌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 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불만 달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
토목 공사에서 언급되었듯이 곽거병의 흉노 원정은 한 제국의 국가 재정에 기여한 부분은 그냥 병아리 눈곱만큼 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머나먼 원정을 성공한 기린아 곽거병의 군대의 공을 치하하는 데 아낌없이 상을 듬뿍듬뿍 내려줬기 때문에 한 제국의 재정 상태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무제의 문제는 성격이 매우 좋지 않았고 우생학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하들을 죽이거나 가혹하게 처벌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한 무제는 신하들을 대우할 때 심각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의 성격이 있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이릉과 사마천이다. 이릉은 해당 항목에서 나오듯이 소규모 병력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펼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투항한 것이다. 게다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 빠트린 것에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무제 본인의 책임이 컸다. 그럼에도 한 무제는 분노만 터뜨려 소식을 전하러 왔던 이릉의 부하 진보락(陳步樂)에게 책임을 물어 강제로 자살하게 하였고 평소 이릉과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는 감히 이릉을 변호하고 같이 출정한 이광리를 폄하했다는 이유로 처음엔 사형을 명했지만 여기서 사마천에게 알량한 아량을 베푸는 척 하면서 몇 가지 선택지를 줬는데 그 선택지들이라는 게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사마천에게 50만 전의 벌금, 궁형, 사형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는데 알다시피 어지간한 재력가들조차도 갖고 있을 리가 없는 큰돈을 관리에 부과한 사마천이 보유했을 리가 없고 그래도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굴욕도 감내하고 살아남아야만 했으므로 결국 궁형을 택했고 무제는 사마천이 택한 대로 궁형을 집행했다. 이후 다시 후회하였는지 이릉 구출 작전을 시도하였지만, 문제는 무제가 이릉이 흉노의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헛소문만 듣고는 알아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은 큰 충격을 받고는 분노하여 탈출할 생각을 접고 정말로 흉노에게 전향해서, 흉노의 장군이 됐으며 후일 한나라의 전향 설득을 대놓고 거부하기까지 한다. 괜히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일을 키운 셈인데 실질적인 책임은 무제 본인에게 있음에도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 이를 변호한 사람을 도리어 처벌한 것. 이 이릉과 사마천 이야기는 한 무제의 성격의 문제점을 비판할 때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렇게 이릉과 사마천을 천시하면서까지 한 무제가 편애했던 이광리는 훗날 흉노로 군사들을 이끌고 망명했다는 것. 물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한 무제는 장안에 남아 있던 이광리의 일족을 몰살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훗날 서구권에서도 인정하는 역사가로 이름을 새긴 사마천을 인성질로 조지고, 당대에나 후대에나 영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광리를 싸고 돈 점에서 한무제의 인재 안목은 좋게 봐주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한 무제가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金日磾)나 상관걸, 상인의 아들 상홍양, 이광, 장건 등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제는 신하들에게 무자비하며 가혹한 군주였고 이 정도의 인물 발탁은 다른 군주들도 그럭저럭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곽거병, 곽광 형제나 위청, 이광리 같은 인물은 무제의 인척이었고...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는 애매한데 ‘박사’는 이미 전국 시대부터 각국에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진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따랐고 진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이것이 오경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로 이루어졌고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며,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져 이로서 유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작 한무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조선 정벌 시기의 일을 들 수 있다. 한무제가 양복을 누선장군, 순체를 좌장군으로 삼아 고조선을 침공하게 했을 때, 양복은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했다가 격파당해 10여일을 숨어있었으며, 그나마 수도 왕검성 내부의 갈등을 이용해 조선 멸망의 공을 세운 순체조차 양복과 대립하다가 공손수에게 양복을 모함해 공손수에게 양복을 체포하게 만드는 등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고조선에 굳이 누가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항복조건을 강요해서 차라리 저항하도록 만들어 일을 키워버렸다. 순체와 양복의 중재자로 파견된 공손수는 엄연히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순체의 말만 듣고 양복을 독단적으로 체포하여 황제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했다. 물론 처벌은 제대로 이뤄져서 순체와 공손수를 처형하고 양복은 속전을 받는 대가로 평민으로 강등시켜 쫓아내는 등의 조치를 했으나 애초에 중책을 맡을 수 없는 세 무능력자들에게 중책을 맡겨 일을 엄청 키운 본인은 정작 책임을 지지 않았다.
게다가 무제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淮南王), 형산왕(衡山王), 강도왕(江都王)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더구나 무제는 가족들에게도 냉혹하고 무자비했는데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오나라의 손권처럼 모함에 넘어가 황후를 폐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딸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도 간통 및 저주 행위를 했다하여 참수형에 처하였으며, 뒤이어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와 며느리, 손자, 손녀들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한다. 무제는 후궁인 구익부인을 총애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 유불릉을 낳았는데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의 태자를 싫어했던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과 무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에 강충 일행과 작당을 하였던 소문이라는 환관이 장안에서 도망쳐 나와 무제에게 알린다. 무제는 태자가 저지른 살인에 충격을 받았으나 이때까지도 “그녀석이 두려운데다 강충이랑 원수를 져서 한 일일 것이다.”라며 사신을 보내 태자를 다독이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신은 두려워서 태자가 있는 장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제에게 태자가 모반하였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이에 노발대발한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의 호위 군사 및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자 분노한 무제는 관군을 소집했으며 소집된 관군으로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태자는 장안 내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킨다고 선포했고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하지만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 태자를 배신하고는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게 했다. 태자는 장안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병사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관군을 이끌고 온 승상 유굴리와 5일간 혈전을 벌였다. 나중에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안 태자는 휘하 병사들까지 관군에 항복하자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반란을 진압한 무제는 명을 내려 여태자의 어머니 위황후의 인수를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은 무제한테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결코 모반은 아니라며 사면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그렇다고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기에 상소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태자는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치다가 신발 장수의 집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자 목을 매어 자살한다. 태자의 두 아들도 관군과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태자와 아들들을 숨겨준 신발 장수도 관군에게 살해된다. 태자의 후궁인 사양제, 아들 유진, 며느리 왕씨, 딸을 비롯한 태자의 가족과 위황후의 친정을 비롯해 태자를 따르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하고 대거 처형당했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아기였던 유순(劉詢), 훗날의 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사망하고 폭군 창읍왕을 쫓아낸 원로대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여태자보다도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최종적으로 막내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구익부인은 아무 죄도 없는데 있지도 않은 역모죄로 처형된터라 신하들이 경악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하들이 이유를 묻자 무제는 ‘구익부인은 여태후처럼 국정을 농단할 것이니 이를 방지하려고 그랬는데 왜 모르냐’며 오히려 신하들에게 화를 냈다.
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사건은 강충(江充)의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전부 조작에다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도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田千秋, ?∼기원전 77년)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의 건축을 명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의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 가 실의에 빠졌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병을 않다가 곽광(藿光)과 흉노족 태자 출신인 김일제(金日磾)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는 기원전 87년 세상을 떠났다.
진시황은 적어도 거슬리는 말이라도 일단 머리를 식힌 다음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나서 죽일지 말지 결정했지만 한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다행히도 한나라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사실 그러니까 미화를 해서 한무성세(漢武盛世)니 하고 치켜세워 주는 것이겠지만, 실제론 무제는 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 한무성세를 위해 한나라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한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은 지금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데, 한나라 황릉 중 최대 규모이다. 전한이 멸망하고 일어난 적미군(赤眉軍)이 무릉의 부장품을 꺼냈지만 전부 꺼내지 못했으며, 서진 말기 민제 사마업(晉 愍皇帝 司馬鄴, 300년∼318년)은 자금이 없자 무릉을 털어 확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무덤을 가지고 환단고기(桓檀古記) 추종자들은 이것은 사실 고조선의 피라미드이며 중국 정부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나, 그 근거는 없다. - 한 무제의 능묘인 무릉(茂陵, 일명 서안 피라미드)
조선의 세종은 “대체로 사람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와 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