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루레비낭 —희망이라는 것
남의 집 정원을 안 보는 척하며 볼 때가 있습니다. 담장 건너에는 무슨 식물이 살까. 나와 친근한 나무가 있을까. 주인과 연이 닿아서 올래 안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다비치리 갤러리에서 ‘얼루레비’를 만났습니다. 처음 이 나무를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랍던지요. 전시회 보러 갖다가 맞닥뜨렸는데, 하필 얼루레비낭일까? 곱고 아름다운 올레의 끝을 이걸로 마감한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어른들은 얼루레비낭을 ‘구덕’의 ‘속대’, 골체의 ‘에움대’(테)로 썼습니다. 그 옛날, 구덕과 골체(삼태기)는 생활 용구 겸 농기구라 동네에 만들어 파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구덕 때문에 우리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 골체를 뒤집어쓰고 놀던 기억, 구덕을 여러 개 포개서 가로로 지고 길 가득 가는 동네 할머니, 오일장 한쪽에 섰던 구덕장, 얼루레비낭으로 같이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골체야 나무와 대나무 따위로 만든 것임을 누구나 알지만, 구덕에도 나무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구덕의 바위(전) 속에 들어가는 속대는 주로 왕대를 사다 썼는데 경비를 아끼려 나무를 쓰기도 했던 것이죠. 나무를 사용하려면 크게 번거로워서 기술은 필요했다고 들었습니다.
속대, 에움대로 쓸 나무는 탄력이 좋아야 하고 위아래가 쭉 고르면서 길이가 한 발은 되어야 합격입니다. ‘족낭은 길주만 꺾어지젠만’하는 나무라 인기가 없었고 ‘윤유리낭’은 휘칙휘칙 탄력은 좋은데 ‘쫄란’ 안되고, 조건에 맞는 나무는 지금 제가 생각해봐도 어렵습니다.
이런 나무로 딱 맞은 게 ‘얼루레비낭의 도난 가지(맹아지)’인데, 휘갈긴 순이 한 발을 훌쩍 넘긴 것들도 드문드문 있었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다른 곳에는 잘 없고 ‘냇골생이’에 가야 얼루레비낭을 만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특히 ‘지들거’ 해난 자리에서 자란 2년생 맹아지가 참 좋았다네요.
어떤 분은 얼루레비낭을 ‘메조룩’으로 썼다고 알려주셨지만 아버지는 심(고갱이)이 있어서 아주 급할 때는 모르겠지만 진정 조룩 감은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잘 타지 않아서 부지깽이로 쓰기엔 좋았다고 거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벌초하러 다니면서 얼루레비낭을 배웠습니다. 산길을 내던 사람의 ‘나대’에 잘렸을 법한, 둥치에서 자란 미끈한 가지를 보며, 아버지와 삼춘들은 옛날 같으면 없어 못 해갈 나무인데 세상이 좋아져 이젠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매년 듣다 보니 저절로 안 셈입니다. 세상이 좋아지면 산의 나무도 좋아지는 이치를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얼루레비낭이 가막살나무 집안이라는 것을 안 것은 아주 훗날입니다.
가막살나무는 햇볕을 좋아해 공한지 따위에서 잘 자랍니다. 어느 오름 정상, 풀밭도 아니고 숲도 아닌 어정쩡한 곳, 바람맞으며 서 있는 가막살을 봅니다. 억새를 이겨낸 기쁨으로 허리를 곳곳이 폈다가 계요등, 청미래, 인동덩굴 따위에 허락한 몸을 봅니다. 소나무, 사스레피가 다가와 어깨를 부딪치며 시비 거는 모습을 봅니다. 몸을 쌌던 이파리 모두 없어져도 싸락눈 비쳐도 열매를 놓지 않고 누굴 기다리는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는 중문 오일장 날, 젖 마중을 나갔습니다. 중간에 어머니를 만나 젖을 물리면 탐하는 동생이 아까워 걸음을 재촉했다 합니다. 아버지는 배고파 우는 동생을 업고 서쪽으로 가고 어머니는 구덕을 팔고 다시 되돌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장날마다 몇 십 리 길을 걸으셨습니다. 시계도 없고 약속 장소도 없이 서로 마주 보고 향했을, 어머니도 젖이 불어 얼른 만나 길 바랬습니다. 해는 져가고 구덕이 팔리지 않는 날은, 처지 비슷한 ‘쌀장시’를 찾아 보리쌀과 교환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쌀을 지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하며 고갯길을 넘으셨을까요. 어머니가 동생을 보는 눈길은 저와는 다릅니다.
정원수는 선이거나 색감이거나 그딴 거 때문에 심는다고 합니다. 열매가 좋거나, 꽃이 아름답거나, 보통 이런 것들 때문에도 심습니다. 간단한 약이나 향료를 얻기 위해서도 기릅니다. 소문이랄까, 유행을 좇기도 합니다. 나무가 뜻하는 상징성 때문에 택하는 분도 계십니다.
가막살 때문에 가끔 차 얻어 마시러 다닙니다. 다실 안에서는 가막살나무가 지척입니다. 빛으로 가막살 속살까지 다 보이는 날, 먹이를 잔뜩 문 박새가 가지를 드나들고 또 사주 경계음이 날카롭습니다. 잔가지 겹친 어느 곳에 둥지가 있음입니다. 차 식어요, 내 시선으로 박새가 불편해함을 저어하시는 듯 주인은 엷은 웃음으로 저를 당깁니다. 새는 나무를 낳고 나무가 다시 새를 기르는 이치를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첫댓글 주인의 엷은 웃음에서 ~~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차 한 잔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추억이 함께 있는 따뜻한 글 읽으며 마음이 뭉클하네요.
어제 이기대에 갔더니 덜꿩나무 잎이 나기 시작하더이다.
이 봄 편안한 일상이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