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21:1-22
요절 /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은 주가 쓰시겠다, 그리고 겸손의 왕 예수님, 성전을 정화시킨 예수님, 믿음과 기도의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이 귀한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고 실제 삶에 또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주시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주제 별로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주가 쓰시겠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 두 사람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묶여 있는 나귀와 그 새끼를 풀어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만 하라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제자 둘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와 그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오늘날 주인의 허락없이는 아무 것이나 어떤 것도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공용이 아니라면 다 그 주인이 있습니다.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비록 길에 떨어진 것이라도 함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의 허락없이 제자 두 사람에게 나귀와 그 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나귀 주인이 순순히 나귀와 그 새끼를 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 만물의 주권에 대해 생각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물건들과 생명들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 소유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유자라고 진짜 소유자인가 때로 의문이 듭니다. 내 모든 재산의 소유권은 정말 나에게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내가 죽으면 그 소유권은 없어지고 맙니다. 내 생명도 마찬가지로 그 소유권은 매우 일시적입니다. 영원한 소유권은 아닙니다. 마치 자동차를 일시적으로 임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집도 임대해서 사용하면 그 시기만큼 한정적으로 그 주권을 인정받지만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의 본래 주인은 창조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귀와 나귀새끼의 주권이 그 주인에게도 있지만 실은 창조주의 것입니다. 창조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내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본래 주인이 도로 찾을 때 우리는 내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하만물의 본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귀와 그 새끼를 풀어올 때 주가 쓰시겠다 하면 풀어줄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귀와 그 새끼의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해 볼 것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할 계획이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에 나와 있고 말씀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품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뜻도 있습니다. 5절에서 마태는 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주신 말씀을 이루고자 하신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 올라 사람들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서 누구든지 다가 갈 수 있게 하십니다. 휘황찬란한 말을 타고 타고 오신다면 어찌 소경이나 문둥병조차 연약한 자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다가갈 수 있도록 주님은 말씀대로 나귀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주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누구든지 다가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조금만 지위가 있는 사람을 만나고자 해도 부담이 생깁니다. 긴장되고 신경이 쓰입니다. 어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어찌 어려운 부탁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시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가지셨지만 모습은 이웃집 아저씨나 아줌마보다 더 편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하나님, 얼마나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까? 우리 집에 있는 좋은 말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능력이 있으되 그 능력을 죄인들과 함께 하고 죄인들이 다가올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우리들에게 임하신다고 선지자 스가랴가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도전이될 뿐만 아니라 그가 참 지도자인지 참 목자인지 분발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됩니다. 겸손의 사람이 아니면 그는 참 목자가 아닐 것입니다.
다음은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먼저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성전이 전혀 성전의 기능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이 기도의 집이라야 하는데 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매하고 돈바꾸고 번제물을 팔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내어 쫓으시고 그들과 함께 그들이 사용하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성전의 본래 기능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본래의 것을 잊어버리고 동물의 번제와 헌금드리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기울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니 자연 이런 상인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보다는 헌금이 우선되고 말았습니다. 늘 헌금 이야기가 말씀의 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성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지상에서 사라졌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어디서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서든 거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두 세사람이 모여 하나님을 찾고 예배한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날 교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15절에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또한 성전에서 다시 말해 교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 가르쳐주시는 말씀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이것을 옳지않게 여겨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기득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살펴볼 말씀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물러가셨다가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 오실 때 시장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셨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곧 무화과나무가 시들고 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을보고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기도할 때 믿고 의심치않으면 그대로 된다는 는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는 분명 의심치 않는 것이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필요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의심치 않고 기도할 때 산도 움직이고 바다도 메꾸어집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할 때 진짜 필요한 기도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의심치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것이 불가능해 보여도 줄기차게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이 시장 하심으로 덕분에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호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겸손의 왕이심을 배웠습니다. 또한 본래의 것을 놓치지 않고 변함없이 살아야겠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기도가 능력의 원천임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불만과 불평보다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5절 요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경주UBF이모세. 2020.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