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 마태복음 22:15-46
요절 /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예수님은 21장과 22장에서 세 비유를 통해 어찌하든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하나님께서 돌이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기는 커녕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제자들과 헤롯당원들을 교묘히 예수님께 보내 몇 가지 질문을 함으로써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사두게인들과 율법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22장 15절 이후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전혀 곤경에 빠지지 않으셨고 도리어 그들을 곤경에 빠지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의식적인 신앙이 있는 지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진정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지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이 이를 통해 주신 말씀으로 마음을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겠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보다 도리어 분노하여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으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수 없을 까 상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제자들과 헤롯당원들을 보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16절에 보면 달달한 말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는 올무에 걸리도록 교묘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오늘날 이 질문은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자신의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으로서 세금을 내야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세금을 내야하고 것 같기도 하고 세금을 내지 않고 투쟁을 벌이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이 찜찜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자신에게 보여주도록 하고 그 돈에 있는 글과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 물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지적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외식을 지적했습니다. 속으로는 전혀 그러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매사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가이사의 통치속에서 세속문화를 즐기면서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찬양하면서 이 땅에서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취하며 살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외식이 별것입니까?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야겠습니다. 둘째, 종교와 정치의 구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고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이 세상을 모두 하나님 나라로 바꾸려고 했다면 로마를 대항해 정치적으로 싸우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 그 어디에도 로마를 대항해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십자가 틀을 만들어 형벌을 뒤집어 씌울 때 순한 양처럼 끌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검을 들고 종교지도자들을 대항하고자 할 때 칼을 도로 곶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칼의 나라가 아니라 말씀의 나라입니다.
이 일이 있던 날에 사두개인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고자 질문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책과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문제시 했습니다. 부활이 없는데 왜 주장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만 않아보입니다. 지금의 과학법칙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여 예수님과 성경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다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한계속에 가두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찌 부활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사두개인들은 현실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부활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세속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했지만 실은 이 세상을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것을 말하기 위해 어떤 이야기를 지어냈습니까? 바로 일곱 형제와 한 아내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 살았지만 부활때에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니까? 29,30절입니다.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시집도 아니가고 장가도 아니가고 천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부활때에는 우리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살아있다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 앞에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신의 한계에 가둘 때 사두개인들처럼 우둔해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다 듣고 모였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를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율법사보다 더 율법은 모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선생이여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아무래도 큰 계명부터 지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을 겁니다. 예수님을 다분히 무시하는 질문이요 한 번 시험하고자 한 질문이었습니다. 계명 속에 있으면 때로 어떤 계명이 우위에 있는 지 정신을 못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단순히 막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않으시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라고 했습니다. 전인격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힘을 다 쏟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적당하게 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1%도 아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우리는 자신이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금방 압니다. 먹을 것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십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은 내 몸이 아니므로 그 감정을 숨기면 알 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웃을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이웃을 살펴야 한다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아니면 무엇이 억울한지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 처럼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자 살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시민들에게 이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두가지만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는 충분히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자격이 주어질 겁니다. 기도와 말씀묵상도 중요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에서 밝힌 것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하지만 이 셋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준 것은 사랑이 우리 모든 삶의 기초에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이 번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너희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다윗은 어째서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느냐?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때부터는 언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지만 옆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부터 귀중한 메시지를듣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이라 운동임을 믿습니다. 힘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이웃을 살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요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