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1/3
위만에 관한
편편의 기록들을 맟추어 보면
한때
위만이 유방을 도울 무렵 군비와 군량이 부족하여 한나라 노관이란 장수 휘하에 잠시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위만이 고조선의 왕좌에 오른
10여년후
국내외 정국이
안정될즈음 BC175경
왕자를 생산하고
준왕의 숙원이었던
그리고
위만 자신이 겪었던
유방에 대한 치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한의 공략을 대대적으로 준비 한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아쉽고 안타까움을 안은채
위만은 BC160경
68세쯤에 이세상을 하직힌 것으로 보인다.
위만의 아들에 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알려진바가 없으나
일본과 중국의 기록이 검색된다.
일본의 기록에는 그 이름이
"도(悼)" 라 전해 지기도 하고
중국의 바이두 백과란곳에는 그이름이
"위몽(衛蒙)"
이라 되어 있고
BC 129년에 사망한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사학자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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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1/3(조운형 동기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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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록이 부실하여
그당시 역사를 명확히 할 수가 없나보네.........
한국의 고고학자들도 연구를 깊게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