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하나 확신할 수는 없다.”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현대 과학철학의 거두 칼 포퍼(Karl Popper)에 따르면 과학 이론은 비판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신화와 구별되고 비과학과도 구별된다. 그에게 과학의 모든 언명은 잠정적 가설일 뿐이며 확증할 수 있는, 그래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계속되는 비판 속에도 살아남는다면 신뢰도는 점점 높아지지만, 결코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과학적 언명의 속성인 것이다. 포퍼는 과학철학의 문제를 사회 이론에까지 확장하여, 열린사회란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 사회이고 상호비판으로 오류를 교정하는 자유주의 사회이며, 그 어떤 형태의 독재체제도 용인하지 않는 사회라고 주장했다.
천안함 폭침에 관한 논의가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전제한다면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가?”는 질문에 “북한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정부 발표를 신뢰하나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는 대답은 지극히 논리적이면서도 신중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대답이 헌정질서 수호의 책무를 진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것이라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환영해야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지난 주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선출안 표결은 전례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보수정당과 국회의원들에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인 그의 이력이 탐탁지 않았을 터이지만, 천안함 폭침에 관한 후보자의 진술을 이념적 잣대로 평가해 선출을 무산시켰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위 공직자의 국가관을 검증하는 절차는 대단히 신중해야 하고 지나쳐서도 안 된다. ‘관’(觀)이라는 것은 사상과 양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진행된 인사청문회에서 조용환 후보자가 헌정질서를 부정했다는 그 어떤 사실도 규명된 바 없다. 논란이 됐던 천안함 폭침 주체 문제는 북한을 지목한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에 이념과 정치의 영역으로 중심축이 넘어갔지만, 여전히 과학적 논쟁의 영역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천안함 문제가 한 사람의 국가관을 검증하는 시금석이 될 수는 없다. 백번 양보해서 천안함 문제를 통해 국가관을 검증한다 하더라도 정부 발표를 신뢰한다고 했으면 그 정도에서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지만 정부 발표에 대한 ‘신뢰’를 넘어 ‘확신’ 여부까지 추궁한다면 이는 무리한 국가관 검증의 차원을 넘어 개인의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할 고위 법관 후보자를 검증하는 청문회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아이러니를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고위 법관은 상황논리와 여론에 흔들리는 정치인들,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관료들이나 군인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이념보다는 법리와 사실에 충실하고, 확신하기보다는 오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진중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로 채워져야 할 자리다. 폭 좁은 이념에 갇혀 쉽게 판단하고 쉽게 확신하는 법관들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까? 열린사회의 적은 비판 가능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확신’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확신에 기초한 닫힌 사회는 전체주의의 역사적 경험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신뢰하면 확신하는 것이고, 확신할 수 없으면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는 단순 논리를 들이대며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를 말장난하는 자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호통이 오히려 헌정질서를 우롱하는 말장난에 가까워 보인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났듯이 우리사회는 아직도 많이 닫혀 있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사회는 열린사회뿐이며, 점진적 사회공학에 의해서만 그런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대답을 엄밀한 논증에 기초하여 제시한다. ‘열린사회’는 비판을 수용하는 사회이며,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이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추구할 때, 우리는 역사의 능동적인 창조자로 등장한다.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의 주체자임을 주장하고, 스스로의 결단과 행위에 의해 역사가 진전되어 간다는 것을 확신한다.
반면, 열린사회와 대립되는 닫힌사회는 전체주의의 사회이다. 전체주의가 기초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역사법칙주의의 정체가 하나의 허구적 신화라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포퍼는 전체주의를 근원적으로 비판한다. 전체주의의 닫힌사회는 열린사회의 신념이 약화될 때는 언제나 다양한 모습으로 부활할 가능성이 높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계속 의미를 갖는 것은 문명사에서 이성에 대한 반역과 옷을 갈아입은 전체주의와의 대결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사회(the open society)는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사회 전체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차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적 사회이며, 닫힌사회(the closed society)란 불변적인 금기와 마술 속에 살아가는 원시적 종족사회로서,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제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된다.
포퍼는 열린사회를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라고 정의하면서 열린사회의 최대의 적은 역사주의라 불리는 전체론, 역사적 법칙론, 유토피아주의로 규정한다.
포퍼의 열린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된 사회이며 개인이 그의 이성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사회이다. 이때 자유란 다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인간 진보의 원천으로서의 자유이며, 권리란 자신의 지배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로 규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