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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大學校附設體育科學硏究所論文集, 第34號, 2012, pp. 25~42.
Institute of Physical Education and Sports Science Kangwon National Univ.
No.34, 2012. pp. 25~42
강원 투척(投擲)의 종목별 시원(始原)과 기술 전승(傳承)*
김용수**(도계전산정보고등학교)ㆍ박기동ㆍ김명권(강원대학교)
An Examination on Beginning of Wight Throwing and Impartation of Wight Throwing Skills in Gangwon Province
Kim, Yong-Soo․Park, Ki-Dong․Kim, Myoung-Gwoun
ABSTRACT
This study is based on an oral history method which is one of qualitative research methods. Tracking the impartation and the flow of every wight throwing event in Gangwon province and elucidating each event are utilized throughout the method. Its purpose is to provide preliminary data needed to study the history of the wight throwing athletics through the beginning of wight throwing events and its impartation.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Shot put in Gangwon province has been maintained as the order: Ahn Yeonghan - Son Baeyun - Han Dongsi - Shin Seonghyu - Jeong Okja - Ko Yeongdae. Discus throw: Ahn Yeonghan - Ahn Yeongmo - Han Dongsi - Shin Seonghyu - Choi Sanghui - Kim Bongju - Kim Taehyeong. Javelin throw: Ahn Yeonghan - Han Dongsi - Kim Gichun - Shin Seonghyu - Choi Sanghui - Shim Jaechil - Yi Byeongyeon - Yi Eunmi - Kim Bongju - Im Sanghun. Hammer throw: Park Hakbong - Eom Jaewung - Yi Jongtae. In terms of the impartation of each event, the signs of Gangwon wight throwing started to appear when Kim Jongtae had studied the skills, when Shin Seonghyu, Kim Gichun, and Kwon Owon had won a prize in a national competition, and when Han Dongsi had made endless efforts to be a national athlete and had been a third-prize winner in the 5th Bangkok Asian Games, which is the first time of Korea in the discus throw event. Han Dongsi, Shin Seonghyu, Eom Geumsun, and so on established the growth of wight throwing in which Choi Sanghui, Shim Jaechil, Jeong Okja, Yi Eunmi, Kim Bongju, Im Sanghun, Kim Taeheyong, and so on was discovered. Such growth was able to be prepared as they not only maintained their athlete career for their hometown, but also they handed down their skills to their juniors as leaders. At the time of the growing Gangwon wight throwing, athletes took the role of the skill impartation and picking out and nurturing new capable athletes. As a result, Gangwon wight throwing was able to make a huge leap as Ko Yeongdae, Park Jongsul in shot put, Hong Sunmo, Choi Sangbaek in discus throw, Kim Sunyun in javelin throwing, Choi Gyunam, Mun Sunjeong in shot put, Kim Seonhwa, Jeon Hwagyeong, Kim Chunhui, Won Eunhui, Jo Migyeong in discus throwing, Yi Geumok, Choi Jeongsuk in javelin throwing, and so on conquered various national competitions.
Ⅰ. 들어가는 글
역사2) 연구는 어떤 사건이 언제, 어디서, 왜 일어났고, 그 때의 시대적 상황은 어떠하였으며, 주로 누가 혹은 어떤 집단이 영향을 주었으며 역사적으로 왜 중요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연구한다(성태제, 2003: 245). 이러한 맥락에서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어 이를 구술 사료로서 채워야 할 뿐만 아니라, 한 인생의 생애 주기를 중심으로 이들을 재조명하여 주된 자료로 삼아 역사를 다시 인식하고 서술해야 한다. 특히 스포츠 경기사(競技史)에서 체육인들의 잊혀진 생활사에 대한 자료 수집 또한 종래의 화려한 주역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와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역사 쓰기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며, 이에 대한 구술 자료 수집은 간과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박기동, 유근직, 김명권, 2007: 46; 박기동, 김용수, 2010: 8-9).
스포츠 문화 중 육상경기는 달리기, 뜀뛰기, 던지기 등의 기능을 바탕으로 한 인간 본능으로부터 발달된 인간의 신체원리를 기본으로 하는 운동 종목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변천 과정 연구나 당시대의 제요인과 관련되어 온 전승과 흐름의 분석은 육상경기의 문화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역사적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 투척경기의 현주소는 세계 대회 기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아시아권에서도 그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나 기술면에서 비교해 보았을 때 아직까지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계 아시아경기대회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최초 투척 경기 입상자는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에서 투해머에서 3위로 입상한 송교식이다. 그 후 1966년 제5회 방콕아시아 대회에서 한동시가 여자 투원반에서 3위로 입상했다(대한체육회, 2010; http://www.sports.or.kr, 2010).3)
“내가 투원반 종목에서 우리나라 최초였지요. 아시안 게임에서……백옥자(포환)는 후배지요. 복잡해요. 고 2때부터 투척을 했어요. 그 당시 학교나 강원도에는 투척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고 3때, 태릉선수촌에 가서 안영한선생님 하고, 김병기 선생님한테 제대로 던지는 기술을 배웠지요”(한동시 인터뷰, 2009년 4월 1일).
1970년 제6회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대회에서 백옥자는 14m 57을 던져 여자 포환던지기의 금메달, 투원반 3위를 차지하면서 백옥자 시대를 열었다.4) 그 대회에서 박수권이 남자 투창 2위, 이복순이 여자 투창에서 3위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제7회 이란 테헤란 아시아대회에서 백옥자가 투포환에서 1위로 입상하였다(http://www.sports.or.kr, 2010; http://www.kaaf. or.kr/, 2010). 그 후 1978년 제8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1982년 9회 인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 투창 2위 양은령이 체면을 유지할 정도였다.5)
강원투척 선수들의 활동을 기록에서 살펴보면, 1953년 10월 제3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안영모가 원반던지기에서 우승하였으며(강원도체육회, 2004: 71), 1964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제4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여자 일반부 한동시가 투원반 1위로 입상하였다http://cafe.daum.net/kwdtpm/, 2010; 강원도체육회, 2004: 76). 1965년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제4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한동시가 원반던지기 1위와 투포환에서 2위를 차지하는 활약을 펼쳤다(강원도체육회, 2004: 77; 박기동, 김용수, 2010b: 3).
1967년 대구에서 열린 제2회 학도체육대회에서 투원반과 투창의 신성휴(춘천고등학교)가 전국 1위를 차지하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78). 1971년 육상에서 심재칠(沈在七: 강릉상업고등학교)이 한‧일 고교 교환경기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하는 활약을 보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84)정도이며, 선행연구로는 생애사로 박기동, 김용수(2009)의 「투창 선수 심재칠(沈在七)의 삶」과 박기동, 김용수(2010a)의 「봉주(鳳周) 선생의 삶과 투척(投擲) 선수 이야기」와 「강원 투척(投擲)의 변천사, 1962-1997」(박기동, 김용수, 2010b)가 있을 뿐이다.
처음 강원 투척 도입 시기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6) 그 이유는 강원육상경기연맹을 비롯한 관련 단체의 체계적인 자료의 적립 노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연구는 강원 투척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로 기술이 도입되고 전승되었는지에 관하여 알아내고자 한다. 특히, 스포츠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투척 인의 근거를 찾아 강원 투척의 전승과 흐름의 바른 이해를 돕고 시원에 나타난 체육사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하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강원 투척의 종목별 시원과 기술 전승을 찾아 이를 토대로 강원 투척사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강원 투척의 태동 시기부터 역사적인 특성과 시원 및 전승 과정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였으나 당시 신문 기사와 잡지, 정기 간행물, 문헌 자료에서 투척(投擲) 관련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자료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고, 그 때의 상황을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하고자 질적 연구 방법인 구술사 방법7)을 통해 재조명하였다.
Ⅱ. 강원 투척(投擲)의 종목별 시원(始原)
투척 경기 종목이 우리나라에 도입된지도 한 세기 넘었는데, 지금까지 한국 투척사에 관련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와 같이 선행 연구가 없어 기초 자료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강원 투척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로 도입되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질적 연구 방법인 구술사 방법을 통하여 강원 투척의 종목별 발달과 관련된 기술 전승과 始原을 투척人들과 심층 면담한 내용을 중심으로 그 실체를 파악하였다.
안영한(1923년생). 원주중학교, 원주고등학교, 일본 와세다 법정대학교, 국가대표팀 감독, 포환, 투원반, 투창 선수.
그분은 투원반, 투포환, 투창 다 했어요. 그래도 안영한선생님의 주특기는 투원반이라고 봐요. 제가 시합에 나가면 폼이 좋다고 칭찬하면서 자세도 교정해 줬어요. 그래요. 투척에 대한 그분의 애착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요. 강원도 선수들 참 이뻐했어요. 그분은 강원 투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투척에도 공헌도 대단히 커요. 일본 와세다대학교 다니신 걸로…(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4일). 원주 분으로, 1947년 44m 43으로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고, 그 후에도 몇 번 한국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지요. 제가 한·일고교 국가 대표선수가 되어 태능 선수촌에 훈련할 때 감독선생님이셨어요. 창에 대해서 크게 기술적인 지도가 없었어요. 그 분 주특기가 원반이라서…제가 나중에 대표팀 감독해보니 그 때 크게 마인드가 없었던 것 같아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우리나라 투원반의 시조라면…홍순모교수님의 스승이신 안영한선생님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투원반에 애착도 많으셨고, 제가 시합할 때 격려도 해 주시고 그랬어요(최상백 인터뷰, 2009년 3월 25일).
이상의 김봉주, 심재칠, 최상백의 증언에서 보면, 안영한은 투원반, 투포환, 투창 선수 출신이며, 1947년 투원반에서 44m 43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한 점으로 보아 그 중에서 주 종목은 투원반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돌아와 대한민국 투척 종목 기술 전승과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문헌 자료를 살펴보자. “1948년 10월 20~26일 서울 운동장에서 거행된 제29회 전국체육대회는 좋은 기록과 높은 수준의 경기를 보여 주었다. 경성전력의 안영한(安永漢)8)은 투원반과 투포환을 각각 제패했다. 여자부의 박봉식(朴鳳植)은 비록 런던 올림픽에서는 고배를 들었지만 여자 원반던지기에서 제29회 전국체육대회부터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이학래, 2003: 487-488)는 내용이 보인다.
허봉원(1940년생). 강원도 육상경기연맹 부회장, 단거리, 도약 선수.
투척부에 대한 애착심이 많았지요. 저희들이 전국체육대회 훈련할 때 마라톤 선수만 고기 먹였는데, 허봉원 이분이 당신 돈으로 우리 투척부에게 고기 먹여주고 그랬어요. …하여간 허봉원 부회장님은 고영대를 같은 포환선수라고 많이 이뻐했어요. 그런 영향을 덩치는 작아도 고영대가 주니어 대표도 했어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 도약보다는 100m, 200m 선수를 주로 했지요. 맞아요.… 강원도 투척부회장 했어요. 그래서 투척부에 관심은 많았지만 투척 선수 생활은 하지 않았어요(강석구 인터뷰, 2010년 2월 20일).
김봉주, 강석구의 증언에 의하면, 허봉원은 단거리, 도약선수 출신으로 강원도 육상 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투척부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지만 투척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종태(1942년생). 진부중학교, 강릉제일고등학교, 관동대학교, 육상지도자, 강원도 육상경기연맹 전무 이사, 전국 소년체육대회‧전국체육대회 대표 강원도 육상부 총감독, 10종 경기선수.
제가 1977년부터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육상부 강원도 대표를 지도할 때 육상부 총 감독했어요. 10종 경기 출신이지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6월 20일). 7종 경기 선수가 아니고 …그 당시 관동대학교 소속으로 10종 경기 선수로 전국 체전에 출전하고 그랬어요. …강원도 육상선수 육성에 공헌한 부분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요(강석구 인터뷰, 2010년 2월 20일).
심재칠, 강석구의 증언과 문헌(박기동, 김용수, 2010b: 2)에 의하면, 1967년 제48회 전국체육대회 10종 경기에서 3위로 입상한 바 있으며(강원도체육회, 2004: 453), 1960년대 강릉여자중․고등학교 육상부 지도자로 출발하여 1980년대까지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 육상부 총감독을 하였다.
한동시(1945년생). 강릉여자중학교, 강릉여자고등학교, 경희대학교, 강릉시청, 국가 대표선수, 제5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 투원반 3위 입상, 강릉여자중·고등학교 등 육상부 감독 17년, 투원반·투포환·투창 선수.
제가 중학교 1968년 중학교 2학년 당시 강릉여자고등학교 한동시 선생의 지도를 틈틈이 받았지요. 종목은 달랐지만 그 당시 국가대표 출신이라서…트레이닝이 뭔지 그 때 들었지요. 한선생은 1964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태릉 선수촌에서 주로 안영한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지요. 1968년 투원반에서 한국 신기록(44m 51)을 수립했어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처음 투원반 운동을 할 때 한동시 코치선생님 지도를 주로 받았지요. 거의 강릉여중 그 곳에서 연습했어요. 1983년, 1984년, …그러니까 …심재칠선생님 밑에서 전국 소년체육대회 동계 훈련을 마치고 1985년 포항에서 열린 소년체전에서 제가 투원반 1등했어요(최상백 인터뷰, 2009년 3월 25일).
한동시는 강릉여자고등학교 시절 김종태의 지도로 투원반과 투포환선수로 활약하다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2위, 1964년 제45회 전국체육대회 투원반 1위, 투포환 2위, 1965년 제4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에서 1위, 투포환 2위, 1966년 제47회 전국체육대회 투원반 1위, 투포환 2위를 하여(강원도체육회, 2004: 452-453) 투원반 국가 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는 국가 선수로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하여 안영한과 김병기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 1966년 제5회 방콕아시아대회 투원반에서 3위(41m 08)로 입상하였다. 다음 해 1967년 강릉 시청 소속으로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 투포환 3위, 투창 3위로 입상하였으며(박기동, 김용수b, 2010: 3), 1968년 멕시코 선발대회에서 44m 51로 투원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였다(http://www.kaaf.or.kr/, 2010).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보면 여자 투원반‧포환‧투창에서 한동시를 시원으로 꼽을 수 있다. 사실 확인을 위하여 한동시의 구술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고 2때부터 투척을 했어요. 그 당시 학교나 강원도에는 투척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김종태선생님이 지도해 주긴했지만 …고 3때, 선수촌에 가서 안영한선생님 하고, 김병기선생님9)한테 제대로 던지는 기술을 배웠지요”(한동시 인터뷰, 2009년 4월 1일)라고 증언하였다.
권오원(1946년생). 강릉중학교, 강릉제일고등학교, 경희대학교, 투원반, 투포환, 투창 선수.
멀리뛰기 선수 출신 조갑환 선생님이 육상에 관심이 많아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투척에서는 권오원이 강원도 대회에서…투원반, 투포환, 투창은 늘 1등했지…전국대회는 부족한 수준이었지요. 경희대학교로 진학했어요(김종태 인터뷰, 2009년 7월 29일) 그래요. 강원도에서 투척과 멀리뛰기에서 1등했지요. 전국대회는 입상하지 못한 걸로 알아요(강석구 인터뷰, 2010년 2월 20일).
김종태, 강석구의 증언에 의하면, 권오원은 강원도 각종대회에 투원반, 투포환, 투창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박기동, 김용수, 2010b: 4) 전국대회 입상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투척은 물론 멀리뛰기를 비롯하여 여러 종목에 출전한 육상 만능선수로 보여 진다.
김기춘(1948년생). 원주중학교, 원주고등학교, 경희대학교, 투창 선수.
신성휴 교수 다음으로 김기춘이라는 사람 있었어요. 그 때 경희대 4학년쯤 되었는데,…참! 멋있게 봤어요. 지금 서울에서 교사 생활하고 있어요.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합숙훈련 때 잠깐씩 얼굴 비쳤는데, 창으로 경희대학교 다녔으니… 그 당시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에 입상했다고 봐야지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아! 김기춘이라는 창선수가 있었어요. 지금 서울에서 교사 생활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신성휴 인터뷰, 2009년 5월 22일).
신성휴와 심재칠의 증언과 문헌(박기동, 김용수, 2010b: 4)을 살펴보면, 김기춘은 1967년 제48회 전국체육대회 일반부 투창 2위,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 일반부 투창 2위, 1970년 제51회 일반부 투창 2위로 입상한 기록이 보인다(강원도체육회, 2004: 457).
신성휴(1948년생). 화천중학교, 춘천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국가대표 투창 선수, 투원반 선수, 투포환 선수.
화천 사람으로 춘천고 나왔어요.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투창, 포환 3관왕 했어요. 창으로 대학갔으니 주특기가 창이지요. 제가 제일고 다닐 때 군생활로 학교 사감했어요. 지금 아마 성균관대 체육과 교수하실 거예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 그거야 강원 투창의 시조라면 신성휴씨지요. 지금 성대교수하고 있어요. 그 양반이 마지막 시합에서 제가 1등하고, 그 분이 2등했어요. 사진도 있어요. 그리고는 은퇴했어요 (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포환은 아닐거요. 춘천고등학교 출신으로 육상에서 3관왕 한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확실해요(강석구 인터뷰, 2010년 2월 20일).
신성휴는 1967년 제2회 전국 학도체육대회에서 투원반과 투창에서 1위, 1967년 제48회 전국체육대회 투포환 2위, 투원반 2위, 투창 3위로 입상하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78, 413). 청소년대표 선수로 선수촌에 입촌하여 안영한‧김병기의 체계적인 기술 지도를 받았다.
사실 확인을 위하여 신성휴의 증언을 들어 보자. “대표팀 코치는 김병기라는 분으로 한전 소속 원반선수 출신이었지요. 사실 그 분도 창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없었어요 안영한선생님과…우리나라 최초의 투원반 선수라…그 때, 대표단에 한동시, 박수권선수도 있었지요. 김병기선생이 지도하다 안영한선생님도 지도했지요. 한동시선생이 많이 배웠지요”(신성휴 인터뷰, 2009년 5월 22일).
1953년 제34회 전국체육대회 투원반 1위를 한 안영모에 대해 기록(강원도체육회, 2004: 71)이 보이는데, 그와 관련하여 추후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보면, 남자 투원반은 안영한—안영모—신성휴 순이며, 투창은 안영한—김기춘—신성휴가 시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엄금순(1949년생). 강릉여자중학교, 강릉여자고등학교, 멀리뛰기, 높이뛰기, 국가 대표 상비군, 육상 지도자, 5종경기 선수.
그 사람이 한선생 보고 언니, 언니 하면서 꽤 따랐어요. 아마 5종경기 선수 출신일거예요. 그래서 투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당시 속초에서 육상 코치했지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6월 20일). …맞아요. 원래 멀리뛰기 선수였는데, 5종경기로 국가 상비군 대표했지요…속초에서 오래도록 육상선수를 지도했어요(한동시 인터뷰, 2009년 7월 21일).
엄금순은 1967년 제2회 전국 학도체육대회에서 넓이뛰기 1위로 입상하였으며(강원도체육회, 2004: 78), 국가상비군 5종경기(80m 허들, 200m, 투포환, 멀리뛰기, 높이뛰기) 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박기동, 김용수2010b: 4).
여러 명의 증언에서 엄금순이 투척선수 출신일 지 모른다는 말은 아마 5종 경기에 포환 종목이 있고, 연습 과정과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멀리뛰기와 포환 선수 지도에 관심이 많아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상희(1951년생) 강릉여자중학교, 강릉여자고등학교, 투창 선수, 투원반 청소년대표.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강릉여고 투척선수였어요. 투원반 한 걸로 알아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6월 20일).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김종태 선생님한테 배웠고, 그 후 한동시선생님이 지도해줬어요. 강원도에 투척으로는 제 선배는 없고, 2∼3년 후배 김영희가 있어요. 저는 전국대회에서 투원반, 투창 2등해서…투원반 주니어 대표로 태릉에 생활한 적은 있지만…그걸로 끝났지요. 그 당시 홍천 쪽에 투척 선수가 한명 있었는 데…이름은 기억이 안나요(최상희 인터뷰, 2009년 7월 4일).
심재칠과 최상희의 증언에서 보면, 한동시가 국가대표선수를 마치고 모교인 강릉여자중․고등학교에서 지도자 생활하면서 최상희를 투원반 주니어 대표로 길러낸 투척선수로 확인되었다. 최상희는 1969년 전국대회에 투원반 2위, 투창에 2위로 입상하여 고등학교 3학년 때 투원반 국가 상비군 대표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박기동, 김용수, 2010b: 5)
이상에서 살펴보면, 여자 투원반‧투창은 한동시—최상희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심재칠(1953년생). 강릉중학교, 강릉제일고등학교, 강원대학교, 국가대표 출신, 국가대표팀 투척 감독, 전국소년체육대회·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 투척지도 10년, 투창 선수.
저도 그 당시 한·일 교환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는데 체육선생님이 안 보내 주더라고요. 사실 창은 심재칠선수가 독주 했지요. 심재칠교감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투창에서 제가 1등했어요. 제가 춘천 제일고 다닐 때 육군 대표팀 소속이었어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12일).…그 때 저에게는 우상이었지요. 그리고 희망이기도 하고.…제가 고3 때 육군 대표팀 선수였는데 많은 지도를 받았지요(임상훈 인터뷰, 2009년 4월 6일).
김봉주, 임상훈의 증언과 신문기사10)에 의하면, 심재칠은 1970년 제51회 전국체육대회 투창 1위,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 투창 1위, 한‧일 고교 교환경기(동경)에서 투창 2위, 1972년 제53회 전국체육대회 투창 1위로 입상한 바 있다(중앙일보, 1977년 10월 12일; 강원도체육회, 2004: 84). 이러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데 종목은 다르지만 한동시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심재칠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제가 1968년 강릉중학교 2학년 당시 강릉여자고등학교 한동시 선생의 지도를 틈틈이 받았지요 종목은 달랐지만 그 당시 국가대표 출신이라서…트레이닝이 뭔지 그 때 들었지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이상에서 살펴보면, 심재칠은 한동시에게 기술적 영향으로 투창에서 전국대회 3년 전패를 했을 뿐만 아니라 강원 투척의 기록이 향상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강원일보, 1977년 10월 12일; 박기동, 김용수, 2009b: 5).
이상에서 보면, 강원 남자 투창은 안영한, 춘천의 신성휴—원주의 김기춘—강릉의 심재칠 순으로 이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김봉주(1954년생). 원덕중학교,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강원대학교, 강일여고 교사 겸 투척부 감독, 주니어 대표감독, 투원반·투창 선수.
그 당시 육군 대표팀 원반선수 김해수, 투창선수 신성휴란 분이 지도해 줬어요. 그 분들이 사대부고 옆에 방 얻어놓고 근무하며 훈련했어요. 강원도에는 지도자가 없었는데, 운 좋게 제대로 배운 거지요.…기술과 기록이 어느 정도 향상되고 있는데, 3학년 초에 김해수 그 분이 제대했어요. 전역하면서 더 배우고 싶으면 태릉에 가보라 그러더군요. 태릉에 들어갈 수가 없고 해서 카메라 사진기를 들고 가서 담 밖에서 촬영해 가지고와 거울을 놓고, 사진 속의 동작을 보고 연습하곤 그랬어요…그분이 제 투원반의 스승이지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
김봉주의 증언과 문헌(박기동, 김용수, 2010a: 5)에서 보면, 이때까지 춘천에는 투척 전문 지도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합숙 훈련 중인 육군대표 투척 선수인 원반의 김해수, 춘천 출신 투창의 신성휴를 만나 기술 지도를 받고, 1974년제55회 전국체육대회에 투원반 1위, 투창 1위로 입상하였다(강원일보, 1974년 10월 10일).11) 따라서 김봉주의 투원반은 김해수, 투창은 신성휴의 기술 지도를 통하여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병연(1954년생). 제일중학교, 강원사대 부설고등학교, 강원대학교, 투창선수.
그 당시 이은미, 이병연, 김봉주를 상당 기간 지도해줬지요. 이병연이도 전국대회 기록이 있는 것 같은데,… 기록이 좋았어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신성휴 인터뷰, 2009년 5월 22일). …같이 선수 생활한 건 맞아요. 투창 선수했어요. (이은미 인터뷰, 2009년 8월 8일)…전국대회에서 3위 했어요. 지금 속초 동호대학 교수해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7월 29일).
신성휴, 이은미, 김봉주의 증언과 문헌(강원도체육회, 2004: 458)에 의하면 이병연은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창 3위로 입상하여 투창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옥자(1954년생). 홍천서석중학교, 홍천서석고등학교, 투포환선수, 투원반 선수.
이은미 선생님 1년 선배 같아요. 포환을 잘했는데, 전국대회에서 투원반에서 3위했어요. 대학은 진학하지 않았어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 그 때 홍천 서석고에 정옥자라고 투포환, 투창 선수가 있었어요… 전국대회에서 포환 2등했지요(김종태 인터뷰, 2009년 7월 29일).
그 당시 강원도 전국체육대회 및 전국소년체육대회 강원도 육상부 총감독을 한 김종태의 증언과 문헌(강원도체육회, 2003: 458)에 의하면 정옥자는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포환 2위로 입상한 바 있다.
이은미(1955년생). 춘천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강원대학교, 투창 선수.
중학교 때 핸드볼했어요. 중 3때 김종태 선생님 권유로 하게 되었지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육군 대표 신성휴 코치선생님을 만나 일 년 정도 배웠지요… 전국체육대회에서 2등, 3등 했어요. 부산 남성여고 이복순 언니가 늘 1위하고, 원반, 포환은 백옥자 언니가 하고…(이은미 인터뷰, 2009년 8월 8일). …피구를 하는데 공을 잘 던지더라고요. 전국체육대회에 투창 2등했지요 체구는 작은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김종태 인터뷰, 2009년 7월 29일).
이은미는 김종태의 권유로 투창을 시작하여 춘천에서 합숙 중인 춘천 출신 육군대표 투창 선수 신성휴의 기술 지도로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창 2위로 입상하였다(박기동, 김용수, 2010b: 5).
이상에서 살펴보면, 여자 투창은 한동시—최상희—이은미 순으로 이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임상훈(1956년생). 강릉중학교, 강릉제일고등학교, 강원대학교, 투창 선수.
제가 군대갔을 때 심재칠, 임상훈선생님이 전국소년체전 강원도 대표를 지도한 후로 오랜 기간 감독했지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 …옛날, 사실 육군대표팀과 대학 다닐 때, 홍순모 내가 가르쳤지요. 홍순모가 임상훈 3년 후배예요. 당시에 육군대표팀은 집에서 각자 연습을 하고, 대회 때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어요.…우리 집이 강릉이라 임상훈 후배를 태능 선수촌에서 체험한 기술과 트레이닝을 지도해 줄 수 있었지요. …당시 홍순모선수는 고등학생이었지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김봉주와 심재칠의 증언에 따르면, 임상훈은 강릉제일고등학교 선배인 육군대표 심재칠의 투창 기술 지도를 통하여 전국대회에 입상하였다. 사실 확인을 위해 임상훈의 구술 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1972년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단 한 명뿐인 육상부 선배를 만났는데, 3학년인 심재칠 선배였지요.……(중략)…… 고등학교 신출내기인 내가 본 재칠 선배는 늘 자신 있고 당당하게 생활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운동선수였지요. 전문지도자가 없이 운동하면서 고등학교 3학년 그해 전국대회 전관왕을 차지하면서 스스로의 진가를 발휘하여…군 생활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상무로 입단하면서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어요. 그런 선배에게 1년동안 투창을 배우면서 암울했던 시절 목표없이, 열정없이 생활해 온 나에겐 늘 우상이었지요.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제대로 투창을 배우게 된 나에겐…큰 행운이었지요.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자상하게 배움을 주었어요.……(중략)……암울했던 그 시절 나에게는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주었지요(임상훈 인터뷰, 2009년 4월 6일).
이상에서 살펴보면 강원 남자 투창은 안영한—김기춘—신성휴—심재칠—이병연—김봉주—임상훈 순으로 밝혀졌다.
김태형(1958년생). 강릉중학교, 강릉농공고등학교, 관동대학교, 투원반 선수.
그 때 강석구선생이 강농고 코치했어요. 아마 투원반 기술 지도는 한동시선생이 했지요. 그래서 전국체육대회에 1등해서 한국체대갔어요. 한국체육대학 1회지요. …지금 대한체육회 홍보과장인가 그래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내가 지도했어요. 틀림없어요. 내가 강릉농공고등학교 코치할 때 직접 지도했어요. 강릉중학교 나닐 때부터…지도했는데요. 한선생도 어느 정도 봐 줬다고 할 수는 있지요. 한국체육대학으로 진학했어요.…졸업은 관동대학교에서…(강석구 인터뷰, 2010 2월 20일). …절 3년동안 지도해 준 사람은 강석구선생님이지요. 한동시 선생님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전적으로 강석구선생님 한테 지도 받았어요(김태형 인터뷰, 2010년 3월 4일).
김봉주와 강석구의 증언과 문헌(박기동, 김용수, 2010b: 6)에 의하면 김태형은 강석구12) 지도로 1977년 제5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1위로 입상(강원도체육회, 2004: 464) 하여 한국체육대학으로 진학하였다.
고영대(1961년생).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강원대학교, 주니어 대표, 투포환 선수.
…참! 제보다 2∼3년 아래 한 사람 있었어요. 정선의 00이라는 사람인데, 강원도에서 늘 1등했어요. 그런데 시합 도중 구경하던 사람이 크게 다쳤어요. 그 뒤로 운동을 그만두더군요. 지금은 저 세상 갔지만 덩치는 작아도 고영대가 주니어 대표도 했어요. 대시조 허봉원부회장 한참 후 포환선수라 허봉원씨가 많이 이뻐 했어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고영대를 지도한 사람은 여기 사람 아니예요. 임성환인가, 김성환인가? 공주사대 출신 안명식이란 사람 있었어요. 그 사람 지금 대전에서 체육교사하고 있어요. 양구 쪽에서 군생활하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 한테 기술을 배웠어요. 틀림없어요. 제가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투척대표 총감독할 때 그 사람들이 고등학교 남·여 선수들을 체계적인 기술 지도를 해 준거지요. 그래서 투포환을 제대로 배운거지요. 그 사람들은 일반부였는데, 고영대가 고등학생이라 잘 가르쳐 준거지요(심재칠 인터뷰. 2009년 4월 6일). 그렇지 않아요. 그 때 지도자는 정광섭씨지요.…고영대를 3년 동안 직접 지도했는데요…군인들은 한두 달 정도였지요(강석구 인터뷰, 2010년 2월 20일). 제가 양구 2사단에서 군생활 했어요. 충남체육회를 통해서 강원도 투척 일반부 대표로 차출되었지요.…세 달 십일 동안 후평동 누애치는 집인 잠사에서 모포 두 장으로 생활했어요.…맞아요. 포환선수 고영대 지도했지요…심재칠 교감이 군제대하고 대학 1학년이고… 홍순모는 고 2였지요(안명식 인터뷰, 2010년 2월 26일).
김봉주와 심재칠, 강석구, 그리고 안명식의 증언에 의하면 고영대는 육상인 정광섭의 지도와 양구에서 군 생활하던 안명식과 김성환의 도움으로 포환던지기 기술을 배워 전국대회에 1위로 입상하여 주니어 대표선수를 한 바 있다.
10년 이상 투포환의 우수 남자 선수 부진을 김봉주는 “투포환 공백이 큰 이유는 정선의 한 선수의 사고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 당시 강원도에서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아깝지요.… 강원도 남자 선수들이 성공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라고 말하고 있다.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 일반부 투포환 2위를 한 손배윤의 기록(강원도체육회, 2004: 450)이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강원 남자 투포환은 안영한과 손배윤—신성휴—고영대 순으로 밝혀졌다.
엄재웅(1965년생). 영월 연당중학교, 강릉제일고등학교, 동아대학교, 투해머 선수.
맞아요. 역사가 짧아요. …1986년도 심재칠선생님이 강릉상고 육상부감독 시절 영월 연당 중 포환선수 출신 엄재웅, 1987년 속초 중 포환선수 출신 이종태에게 투해머를 연구하면서 지도했어요. 전국체육대회에서 1등해서 동아대학 졸업했지요.…그래요. 역사도 짧고, 선수도 그리 많지 않아요. 현재는 대가 끊긴 상태고요(김봉주. 2009년 4월 4일). …이종태는 중학교 때 포환을 하다가 강릉상고에서 투해머를 했지요. 제가 알기로는 엄재웅선배가 투해머에서 제일 처음이라고 봐야지요. 그 선배도 중학교 때 포환 선수하다가 강릉상고에서 심재칠 선생님 지도로 투해머를 했지요(최상백 인터뷰. 2009년 3월 25일).
김봉주와 최상백의 증언에 의하면, 심재칠이 강릉제일고등학교 교사 시절 투해머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포환 선수 출신 엄재웅, 이종태를 지도하였다. 엄재웅은 1987년 제68회 전국체육대회 1위를 하여 동아대학교로 진학하였으며(박기동, 김용수, 2009: 51), 이종태는 1988년 제6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3위로 입상하여 관동대학교로 진학하였다; 박기동, 김용수, 2010b: 7). 다음은 이종태의 증언 내용이다.
그래요…엄재웅 선배는 영월 연당 중학교에서 포환을 했고, 저도 속초중학교에서 포환했어요… 강릉상고로 진학해서 심재칠선생님이 투해머를 연구하면서 지도했어요.…전국체육대회에서 1등해서 동아대학으로 진학했지요.…엄재웅 선배는 한국 대표 선수를 한 적도 있어요(이종태 인터뷰, 2010년 3월 5일).
그 당시 지도 상황을 심재칠의 증언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참! 어려운 선택이었지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잘 되었지만… 얼마나 위험합니까. 기술도 중요하지만 연습할 때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지… 지금 연구하고 지도하라면 못해요.…그래도 태능에서 국가대표 할 때 투해머 선수들 연습하는 것을 본 것이 많은 득이 되었지요”(심재칠 인터뷰, 2010. 2월 10일).
1970년 제51회 전국체육대회 일반부 투해머 2위를 한 박학봉의 기록이 보인다(강원도체육회, 2004: 456).
이상에서 살펴보면, 투해머의 시원은 박학봉—엄재웅—이종태 순으로 이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1960∼1970년대는 군부가 정권을 통치하던 시대로 군사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쟁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요구하는 시대였으므로 체육․스포츠에 있어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잘 반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특히 스포츠를 통해 국민들의 단합적인 면을 강조하거나 대외적인 활동을 하게 하여 국가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각 시․도별 체육대회를 활성화 하여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등 많은 이벤트적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유나 과정이 정당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체육․스포츠 문화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틀림없다.
육상경기에서 당시 기록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선수층이 얇거나, 선수의 자질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국내에 전반적으로 지도자의 교수법이 부족하고, 특히 투척 종목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거나 아니면 기술 연구에 대한 방안이 모색되지 않는 등 추측을 낳을 수 있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궁금증을 갖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60∼1970년대 당시 선수층이 빈약하고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투척부 대표선수로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송교식(투해머), 한동시(투원반), 백옥자(투포환․투원반), 박수권(투창), 이복순(투창) 등의 입상은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을 만하다. 특히 강원 투척인 한동시는 우리나라 여자 투척 종목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대회 입상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투척 종목의 기록 향상은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겠지만 종목의 특수성을 고려해 볼 때 다양한 제반 조건이 기록 향상에 양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Ⅲ. 강원 투척의 종목별 기술 전승(傳承)
강원 육상경기연맹은 1955년에 발족하였는데, 장거리 종목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투척은 1959년 이후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원 투척의 기술 전승을 김종태(10종 경기), 한동시(투원반․투포환), 신성휴(투창․투원반), 촤상희(투원반․투창), 심재칠(투창), 이은미(투창), 김봉주(투원반), 임상훈(투창), 최상백(투원반) 등을 중심으로 태동, 성장, 그리고 도약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춘천의 신성휴13)는 1962년(중2)부터 화천중학교에서 전문 지도자 없이 연습하여 중학교 3학년 때 제43회 전국 체육대회(중등부)에서 투창 종목에서 1등으로 입상했다. 화천 실고 2학년까지 다니다 1965년 춘천고등학교로 스카우트되었다. 1966년 춘천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체육대회에 투창․투원반에서 1위로 입상하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78). 투창 청소년 대표로 선수촌에 입촌하여 안영한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각종 대회에 1위로 입상하였다. 그 당시 국제대회 출전 투창 기준 기록에 미치지 못하여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14) 원주고의 투창선수 김기춘15)은 전국대회에 입상한바 있으며, 강릉의 투원반 선수 한동시는 1962년 강릉여자고등학교 1학년 재학 시절 체육교사 심덕순에게 발굴되어 김종태의 지도를 받게 된다. 한동시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 지도는 받지 못했으나 천부적인 소질과 체력, 끊임없는 노력으로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2위를 하였으며,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2위, 1964년 제45회 전국체육대회 원반던지기 1위, 포환던지기 2위를 하였다. 졸업 후 경희대학교로 진학하여 1965년 제46회 전국체육대회 원반던지기 1위, 포환던지기 2위, 5종 경기 1위를 하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76; 박기동, 김용수, 2010b: 3). 강릉상업고등학교의 권오원은 특별한 지도자 없이 포환, 원반, 창 선수로 활약하였으며,16) 강릉여자고등학교의 5종 경기(80허들, 200m, 투포환, 멀리뛰기, 높이뛰기) 선수 출신 엄금순은 김종태의 지도로 멀리뛰기와 5종 경기 선수로 전국 각종대회에 입상한 실적을 갖고 있으며, 5종 경기 국가 상비군 대표 선수 후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속초시를 중심으로 육상선수를 지도하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76, http://cafe. daum. net/kwdtpm; 강원도육상경기연맹).
이와 같이 춘천에는 신성휴, 원주 김기춘, 강릉 한동시, 권오원, 엄금순 등이 강원도는 물론 전국대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강원 투척의 성장은 강원 투척 태동기의 선수들의 지도와 춘천에서 합숙 훈련 중인 육군 대표 팀의 도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강릉여고 최상희는 한동시의 지도를 통해 전국체육대회에 투원반, 투창에 2위로 입상하여 고등학교 3학년 때 투원반 국가 상비군 대표 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 춘천 사대부속고등학교 (前 춘천 제일고등학교) 이은미17)는 건강관리를 위해 여러 종목의 운동을 하다 중학교 3학년 때 김종태의 권유로 투척을 시작한 후 고등학교 2학년부터 춘천에서 합숙 훈련 중인 춘천고등학교 출신 육군대표 투창선수 신성휴의 지도로 1973년 제54회 전국체육대회 투창에서 2위로 입상하였다(http://cafe. daum. net/kwdtpm; 강원도육상경기연맹).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의 김봉주는 중학교까지 높이뛰기를 하다 원덕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종태 선생님의 권유로 1972년 춘천 사대부속고등학교(전 춘천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투척 전문 지도교사 없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투포환과 투원반을 연습했지만 1973년(2학년), 제54회 전국체육대회까지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73년 2학년 말 춘천에서 합숙 훈련 중인 육군 대표팀 소속 투원반 선수 김해수, 투창 선수 신성휴를 만나18) 제대로 된 동계 훈련 프로그램으로 기술 지도를 받은 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3학년(1974년) 때 서울에서 열린 제55회 전국체육대회에 투원반 1위, 투창 1위로 입상하였다(강원일보, 1974년 10월 10일).
강릉제일고등학교(전 강릉상업고등학교)의 투창 선수 심재칠19)은 강릉중, 강릉제일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동시의 기술적 도움과 부단한 노력으로 1969년(중3), 제50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중등부)하여 2위를 시작으로, 1970년(고1), 제51회 전국체육대회 1위, 1971년(고2),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 1위, 한․일 고교 교환경기(일본 동경) 2위, 1972년(고3), 제53회 전국체육대회 1위로 3년패를 하여 모교와 향토의 명예를 빛냈다(중앙일보, 1971년 10월 13일; 강원일보, 1972년 2월 10일; 강원도체육회, 2004: 84).
그 후 1973년, 제1회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투창 1위, 1975년,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투창 3위로 입상했다(강원일보, 1977년 10월 22일).
한편, 강원 투척의 도약 시기에 강릉농공고등학교(현 강릉중앙고등학교) 김태형20)은 육상인 강석구와 한동시의 기술 지도로 전국체육대회에 투원반 1위로 입상하였으며, 홍천서석고등학교 정옥자는 투포환, 투창 선수로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창 3위에 입상한 바 있다. 강릉제일고등학교 임상훈21)은 모교 선배인 심재칠의 지도로 전국대회에 투창 종목에 입상하였다(박기동, 김용수, 2010b: 6).22)
이상의 강원 투척의 성장을 살펴보면 태동 시기의 한동시, 신성휴, 엄금순 등의 기술 전승으로 최상희, 심재칠, 이은미, 정옥자, 김봉주, 김태형 ,임상훈 등이 전국대회에 입상하였다. 이런 결과는 강원 투척 선수의 저변 확대와 도약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동시, 심재칠23), 김봉주24), 임상훈 등이 지도한 선수들은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와도 서로 상당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25).
한동시는 1969년부터 모교인 강릉여자중학교와 강릉여자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국가 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습득한 투척 기술과 훈련 방법을 전승하면서 투척뿐만 아니라 강원 육상의 도약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당시 지도한 제자는 최상희, 최선화, 전화경, 김춘희, 조미경, 최정숙, 김숙경 등이며, 간접적으로 지도한 선수는 강릉 지역의 대부분 투척 선수 출신들이 이에 해당된다.
엄금순은 속초를 중심으로 1974년부터 지도한 제자는 투척에 최규남을 비롯하여 많은 육상 선수들에게 기술 지도를 했다.
김봉주는 1978년 대학에 복학하면서부터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를 지도하다가 1982년부터 강일여자고등학교(전 영동여자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 겸 투척부 감독을 1992년까지 10년 동안 지도하다 팀 해체와 함께 체육고등학교로 전출하게 되었다.26) 그 지도 실적은 다음과 같다.
강릉여중 출신 김춘희는 1982년 제6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하여 한국체육대학을 거쳐 1988년 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 속초여중 최규남은 제6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포환 1위하여 한국체육대학을 거쳐 국가대표, 제6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인제중 출신 문순정가 투포환 1위, 문막중 출신 원은희가 제6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 강릉여자중학교 출신 조미경은 제6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를 하였다. 강일여자중학교 출신 이금옥은 제68회 전국체육대회 투창에서 1위, 강릉여자중학학교 출신 최정숙은 제69회 전국체육대회 투창에서 1위, 김숙경은 제7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포환 1위로 입상한 바 있다(htt://cafe. daum. net. kwdtpm; 강원도육상경기연맹; 박기동, 김용수, 2010b: 7) 그 당시 활동했던 강일여자고등학교 육상부 OB와 관련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강원도민일보, 2009년 6월 10일).
“나도 한 한때는 꿈나무”…강일여고 육상부 OB 20년만에 회동…과거 강원 육상의 전성기를 이끈 육상부 출신 아줌마들이 스승을 만나기 위해 태백 종합 운동장에 모였다. 화제의 주인공들은 강일여고 육상부 출신 40대 아줌들이다. 이들은 10일 오전 제44회 육상경기가 열리는 태백종합운동장을 찾아 스승인 김봉주(56) 교사를 찾아 20년만에 회포를 풀었다(강원도민일보, 2009년 6월 10일).
한편, 심재칠은 1977년 대학 생활과 동시에 후배는 물론 전국소년체육대회와 전국체육대회 강원도 대표를 지도하다가 졸업 후 모교인 강릉제일고등학교, 임계고등학교 등에서 많은 육상 선수를 키워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강릉제일고등학교에서 지도하여 대학에 진학시킨 투척부 제자로는 서인석(창, 강원대학), 박영주(원반, 강원대학), 엄재응(투해머, 동아대학) 이종태(투해머, 동아대학) 등이 있다. 특히 선수 육성 중 투해머는 본인이 직접 기술을 익히고 연구하여 강원 투해머의 시원(始原) 선수를 육성한 열성을 보였다.
임상훈은 전국 소년체육대회 강원도 투척부 대표와 원주권을 중심으로 1985년부터 중학교 남녀 투척 선수를 육성함으로서 강원 투척 도약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이 강원 투척의 성장 시기 선수들 중심으로 투척 기술이 전승되고, 체계적인 지도와 학교별로 투척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하여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의 투포환 고영대, 명륜고등학교의 투창 김순윤, 투원반 최상백, 강일여자고등학교의 투원반 김선화, 전화경, 김춘희, 원은희, 조미경, 투포환 최규남, 문순정, 투창 이금옥, 최정숙, 강릉제일고등학교의 투원반 홍순모 등이 각종 전국대회를 석권함으로써 강원 투척이 도약하게 되었다(htt://cafe. daum. net. kwdtpm; 강원도육상경기연맹).
강원 투척의 정착 단계인 1990년대 강원체육고등학교 투척부의 성과를 살펴보기로 한다.
1992년에 강원체육고등학교가 개교되었기 때문에 첫해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1993년부터 2004년 2월까지 각종대회 1,2,3위 및 전국체육대회 2,3위를 제외한 전국체육대회 1위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93년 원주여중 출신 원순미가 전국 각종대회에서 투원반 1위, 제74회, 제7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1위, 영월 출신 임영학은 전국 각종대회에서 1위하면서 제74회, 제7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를 하여, 한국체육대학 졸업 후 경륜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철원중 출신 김수만은 제76회 전국체육대회 투포환 1위를 하여 동아대학교를 거쳐 현재 대표팀 코치, 홍천여중 출신 김서옥은 제7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 철원중학교 출신 서인철은 제7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를 하여 관동대학을 거쳐 국가대표로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적이 있다.
정선 화동중학교 출신 이미경은 제77회 전국체육대회 투포환에서 1위하여 관동대학을 거쳐 국가 대표로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 출전, 춘천여자중학교 출신 김부영은 제79회, 제80회, 제8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투원반 1위를 하여 현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인제중 출신 김은하는 제81회 전국체육대회 투포환 1위하여 한국체육대학 진학, 김부영 투원반 1위, 양양중 출신 정창교는 제82회 전국체육대회 투원반 1위하여 한국체육대힉 진학, 소양중학교 출신 라용진은 제83회, 제84회 전국체육대회 투원반 2위, 양구여자중학교 출신 김란희는 제84회 전국체육대회 원반 1위하여 한국체육대학 진학, 강릉중학교 출신 이재빈은 제84회 전국체육대회 원반 3위하여 한국체육대학으로 진학하였다.
강현중학교 최종범은 제79회, 제80회 전국체육대회에 투원반에 1위하여 한국체육대학을 거쳐 국가대표 선수로, 제15회 도하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였으며 대화중학교 출신 박재명은 강원체육고등학교, 한국체육대학을 거쳐 국가대표선수로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창던지기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강원 투척의 태동은 김종태의 기술 연구와 신성휴, 김기춘, 권오원의 전국대회 입상과 한동시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국가 대표가 되어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투원반에서 3위를 하면서 부터이다.
한동시, 신성휴, 엄금순 등은 향토를 위한 선수 생활뿐만 아니라, 기술 전승과 후배 양성을 위한 지도자로써 활동하면서 강원 투척의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최상희, 심재칠, 정옥자, 이은미, 김봉주, 임상훈, 김태형 등을 발굴하는 투척 성장 시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박기동, 김용수, 2010b: 8).
또한, 강원 투척의 성장 시기 선수들 중심으로 기술 전승 그리고 학교별로 체계적인 지도와 투척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하여 남자 투포환 고영대, 박종술, 투원반 홍순모, 최상백, 박영주, 투창 김순윤, 서인석, 여자 투포환 최규남, 문순정, 투원반 김선화, 전화경, 김춘희, 원은희, 조미경 투창 이금옥, 최정숙 등이 각종 전국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강원 투척이 도약하게 되었다.
특히 성장 시기에 심재칠은 본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국가 대표가 되기까지 모교와 향토의 명예를 빛냈으며, 도약기에는 모교인 강릉 제일고등학교에서 후배 지도는 물론 우수 제자를 육성했으며, 국가 대표 감독으로 아시안 게임 등 각종 대회를 통하여 대한민국 투척에 기여한 바 크다.
임상훈은 전국 소년체전 강원도 투척부 대표와 원주권을 중심으로 1985년부터 중학교 남녀 투척 선수를 육성함으로서 강원 투척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박기동, 김용수, 2010b: 7).
김봉주는 전국소년체전 강원도 대표 선수 지도를 통하여 꿈나무 지도로 투척 도약에 기반을 조성했으며, 도약 시기에는 강일여자고등학교에서 10년 동안 체육교사 겸 투척 감독으로 엘리트 투척선수를 지도하여 강원 투척의 도약과 국가 대표 여자 선수 양성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
한편, 강원 투척의 태동기부터 도약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강원 투척 선수 육성에 기여한 학교는 강릉여자중․고등학교(심덕순), 춘천사대부속고등학교(한장호),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지희천), 강릉명륜고등학교(강희욱), 강일여자고등학교(김봉주), 강릉제일고등학교(심재칠) 등이며, 지도자는, 대한민국 투척계의 대부 안영한교수와 허봉원, 김종태, 정광섭, 한동시, 강석구, 엄금순, 김진묵, 김동주, 송상섭 등이 있다.
육상에 있어 기록의 변화는 국가간의 경쟁력을 갖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현대 문명이 발전하고 종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선진화할 수 있는 모는 환경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스포츠 경기의 기본은 육상에서 시작하여 육상으로 끝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체육․스포츠의 관심도는 그저 인기 스포츠에 편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부분들로 비추어 볼 때 한국 육상경기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통치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스포츠 문화의 다각적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보다 나은 육상경기 문화가 형성되리라 생각된다.
Ⅳ. 나오는 글
투척 종목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개화기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민족성으로 볼 때 오래 전에도 널리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투척은, 세계 투척은 물론 아시아에서의 많은 성장을 했지만 기능과 기록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본 연구는 강원 투척 종목별 전승과 흐름을 통하여 시원과 기술 전승에서 나타난 체육사적 의미를 알아보고, 더 나아가 한국 투척의 史적 체계 정립과 강원 투척 연구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실천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강원 투척의 종목별 기술 전승과 시원(始原)은 투포환은 안영한—손배윤—한동시—신성휴—정옥자—고영대 순이며, 투원반은 안영한—안영모—한동시—신성휴—최상희—김봉주—김태형 순으로 나타났으며, 투창은 안영한—한동시—김기춘—신성휴—최상희—심재칠—이병연—이은미—김봉주—임상훈 순이며, 투해머는 박학봉—엄재웅—이종태 순으로 맥을 이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원 투척의 태동은 김종태의 기술 연구와 신성휴, 김기춘, 권오원의 전국대회 입상과 한동시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국가 대표가 되어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여자 투원반에서 3위를 하면서 부터이다.
한동시, 신성휴, 엄금순 등은 향토를 위한 선수 생활뿐만 아니라, 기술 전승과 후배 양성을 위한 지도자로써 활동하면서 강원 투척의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최상희, 심재칠, 정옥자, 이은미, 김봉주, 임상훈, 김태형 등을 발굴하는 투척 성장 시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강원 투척의 성장 시기 선수들 중심으로 기술 전승 그리고 학교별로 체계적인 지도와 투척 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하여 남자 투포환 고영대, 박종술, 투원반 홍순모, 최상백, 박영주, 투창 김순윤, 서인석, 여자 투포환 최규남, 문순정, 투원반 김선화, 전화경, 김춘희, 원은희, 조미경, 투창 이금옥, 최정숙 등, 투해머에서 엄재능, 이종태 등이 각종 전국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강원 투척이 도약하게 되었다.
이상의 결론에서 이제 더 늦기 전에 기록되지 않은 스포츠 문화의 원류를 찾는 노력에 많은 땀과 인내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그 중 비인기 종목으로 음지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체육사적 유산을 찾는 것은 잃어버린 체육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요한 시도이며, 시대적 요청이자 과제라고 할 수 있다(박기동, 김용수: 2010b: 9).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신 강원 투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투척사에 길이 남을 투척의 대부 안영한선생님, 그분의 생애사가 기록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 너무나 아쉬운 부분과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강원 투척에 대한 심층적이고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 연구를 기초로 하여 강원 투척의 변천 과정을 검증하고, 보완하여 추후 구체적이고 세밀한 강원 투척사 연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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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 : gangwon province, wight throwing skills, wight throwing and impartation, beginning.
* 이 연구는 한국체육사학회 동계 학술대회(2011년 11월 25일)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논문임.
** kimys1655@hanmail.net
2) 역사란 두 가지의 의미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개념상으로는 구별되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으므로 통일된 개념으로 역사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3) 하계 아시아경기대회 최초 투척(남․여) 입상자: 송교식, 1954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아대회 투해머 3위. 한동시,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대회 투원반 3위. 백옥자,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아대회 투포환 1위, 투원반 3위. 박수권,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투창 2위. 이복순,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아대회 투창 3위( http://www. kaaf. or. kr/; 대한육상경기연맹).
4) 백옥자는 제7회 대회(1974년, 테헤란) 우승하여 2연패를 이룩했으며, 제1회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1973년, 마닐라)와 제2회 아시아선수권대회(1975년, 서울)에서도 역시 여자 포환던지기의 2연패를 달성했는데, 특히 서울대회에서는 투원반던지기까지 제패했으니 그녀는 아시아의 투척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황옥철, 장유현, 2004: 7).
5)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 투창 김재상 (금), 남자 투창 박종삼 (은), 여자 투원반 이상역(동), 여자 투창 장선희의 (은)메달 수상이 보인다(http://www.sports.or.kr/, 2010. 1. 19).
6) 박기동, 김명권(2008: 59)은 “얼마 전 구술 자료 구축 및 채록을 위해 원로 체육인 한 분을 면담하고 있었다. 이후, 그 원로 참여자와 관련하여 나는 강원도체육회 (강원스포츠 저널, 2007: 16)을 통해 ‘시간이 많지 않다’라는 주제로 구술사의 필요성과 연구자의 안일한 타성에 대해서 작은 지면으로 나마 제시한 바 있다”라고 기술하면서, 이는 격동의 시절 근현대를 겪어온 체육인들의 삶과 자료의 한계성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박기동, 김용수, 2010b: 2).
7) 질적연구 방법인 구술사는 연구자의 시각이 아닌 개인의 내부자적 시각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삶을 수치로 객관화시키는 양적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는 장점으로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구술사는 체육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인으로서, 전쟁의 분단과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현실과 제도권 속에서 우리는 체육인의 역사를 작위적 기록에만 바라보는 경향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서이다(박기동, 김명권, 2008: 61-62).
8) 안영한(1923년생)교수는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1940년대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원주에서 초,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 와세다 법정대학 재학 시 투원반에서 全 日本 육상경기대회 1위를 비롯하여 투창, 포환 종목에서도 각종대회에 입상함으로써 한국인의 긍지과 명예를 드높였으며, 해방 이후 1960대부터 1984년까지 김병기선생 등과 함께 투척에 대한 기술연구와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했다(심재칠, 2009년 2월 11일; 신성휴, 2009년 5월 22일). 故 안영한은 한국체육대학 교수와 국가 대표 감독을 하면서 과학적인 트레이닝(웨이트 트레이닝, 서킷트 트레이닝 등)을 최초로 도입하여 투척 부분에서 한국 기록이 큰 폭으로 갱신하기에 이르렀고(한동시, 2009년 4월 1일), 안영한(2005년 사망)은 선진 투창 기술을 도입하였으며, 여자 투원반에서 19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대회에서 한동시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로 동메달,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남자 투창에서 박수권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로 은메달, 투포환에서 백옥자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심재칠, 2009년 2월11일)고 증언하고 있다.
9) 김병기는 인천고등학교,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투원반 선수 출신으로 대학 및 한전 소속 시절 한국 투원반 기록을 8번이나 갱신하였으며, 안영한과 더불어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면서 한국 투척 기록 갱신에 기여한 바가 크다(박기동, 김용수b, 2010: 8).
10) 51회 전국체육대회 때는 당시 강릉상고 1년생으로 국체에 출전, 남고 투창에서 우승한 이래 53, 54회 연속 3년간 우승한 바 있는 강원의 호프, 현재 강릉상고 투원반 선수로 이번 대회 유망주로 꼽히는 후배 홍순모 선수를 지도하기도 하였다(강원일보, 1977년 10월 12일).
11) 제55회 전국체육대회 육상 필드경기에서 강원의 김봉주(춘천공고)가 2관왕의 영예를 차지했다. 선수 경력 1년의 ‘집념의 사나이’로 알려진 金군은 10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남고부 투원반에서 45,44미터를 던져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 지난 9일 투창에서도 51,88미터를 던져 금메달을 따냈다. 김군은 지난 54회 체전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도 올리지 못하다 1년 만에 2관왕의 명예를 차지, 육상 불모지의 강원에 활력소가 된 셈이다(강원일보, 1974년 10월 10일).
12) 강석구(姜錫九)는 춘천고등학교와 관동대학을 졸업했으며, 고등학교 시절 1963년 제4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800m 1위, 1964년 제4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1,500m 신기록, 800m에서 1위, 1965년 제4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800m, 1,500m, 5,000m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3관왕의 명예를차지하였다(강원도체육회, 2004: 76-77).
13)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균관대에 진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4) “그 당시 선수촌에는 연습할 운동장이 없고, 육사구장에서 연습했어요. 육사에는 운동장이 여러 개 있었지요. 대표팀 코치는 김병기라는 분으로 한전 소속 원반선수 출신이었지요. 사실 그 분도 창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없었어요. 안영한선생님과…우리나라 최초의 원반 선수라…그 때, 대표단에 한동시, 박수권선수도 있었지요. 김병기선생이 지도하다 안영한선생님도 지도했지요. 한동시선생이 많이 배웠지요”(신성휴 인터뷰, 2009년 5월 22일).
15) 경희대학으로 진학한 후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16) “멀리뛰기 선수 출신 조갑환 선생님이 육상에 관심이 많아 선수들을 지도했는데, 투척에서는 권오원이 강원도 대회에서…투원반, 투포환, 투창은 늘 1등했지….전국대회는 3위 수준이었지요. 경희대학으로 진학했어요”(김종태 인터뷰, 2009년 7월 29일).
17) 강원대학 체육교육과에 진학, 현재 경기도에서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8) “그 당시 육군 대표팀 원반선수 김해수, 투창선수 신성휴란 분이 지도해 줬어요. 그 분들이 사대부고 옆에 방 얻어놓고 근무하며 훈련했어요. 강원도에는 지도자가 없었는데, 운 좋게 제대로 배운 거지요.…… 3학년 초에 김해수 그 분이 제대했어요. 전역하면서 더 배우고 싶으면 태릉에 가보라 그러더군요. 태릉에 들어갈 수가 없고 해서 카메라 사진기를 들고 가서 담 밖에서 촬영해 가지고와 거울을 놓고, 사진 속의 동작을 보고 연습하곤 그랬어요. 그분이 제 투원반의 스승이지요”(김봉주 인터뷰, 2009년 4월 4일).
19) 심재칠은 군을 제대하고 1977년 늦은 나이로 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의 길을 선택했으며, 끊임없이 후배 양성과 제자 육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0) 한국체육대학에 진학, 현 대한체육회에 근무하고 있다.
21) 강원대학 체육교육과에 진학, 졸업 후 원주를 중심으로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22) 이날 투창경기에 출전한 임상훈군(강릉상고)은 유망한 메달 후보로 기대했었는데, 경기도중 뜻밖의 실수로 실격되어 탈락된 것이다. 임군은 지난 5월 육상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유망선수로 알려졌는데, 체전 출전을 앞두고 실시된 강화훈련 중 팔부분이 탈골되어 치료를 받으면서 도저히 출전이 어려웠는데도 관계자들이 출전을 강요해 ‘필드’에 나갔다가 경기도중 다시 탈골이 되면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해 실격된 것이다(강원일보, 1974년 10월 9일).
23) 심재칠은 국가 대표팀 투척부 감독(1989년∼1995년)시절에 1989년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투창 이욱종 은메달, 1990년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北京) 김기훈 은메달, 1993년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남녀 투창 금메달, 남녀 포환 금메달, 제1회 동아시아 육상경기대회 투창 2위, 포환 1위, 1994년 제12회 아시아 경기대회(히로시마) 투창 이선영 은메달, 1995년 세계 유니버시아드대회 투창에서 이선영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http://www. kaaf. or. kr/; 대한육상경기연맹).
24) 김봉주는 1982년 대학을 졸업 한 후 1882년 10월1일 강릉 영동여고(現 강일여자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 겸 엘리트 투척 선수를 10년 동안 지도하다 팀 해체와 동시에 1993년 3월 1일자로 강원체육고등학교 개교와 함께 전출하여 12년 동안 체육교사 겸 투척부 감독, 홍천여중 4년 근무, 다시 강원체육고등학교에 4년째 근무하고 있다.
25) 1980∼2000년까지는 전국소년체전과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전해에 선수들을 선발하여 6개월 이상 장기적인 집단 합숙훈련을 한 후 출전하였음.
26) “김봉주는 고등학교 2학년 때(1973년) 강원도민체육대회 투척 경기장에서의 첫 만남이 었어요. 처음 만난 그의 첫 인상은 어찌나 크던지 경기 시작 전부터 긴장되기 일쑤였지요. 그의 주 종목은 투원반이고, 나는 투창이었는데…투포환경기에서는 우열을 가려야만 했어요. 나는 늘 투포환에서는 지는 편이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수로서는 최고의 황금기를 가졌던 그는 강원대학교를 같이 입학한 후, 바로 군 입대로 .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만 했어요. 제대 후, 교직에서의 그는, 선수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후배양성으로 한풀이를 하였으니…많은 제자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동하고 있지요. 지금도 열정으로 육상 꿈나무를 육성하고 있어요. 한 때 급작스러운 병마로 인해 위기가 오기도 했지만…육상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열정을 불태우는 진정한 육상인이지요”(임상훈 인터뷰, 2009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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