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약속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상이자 함께 사명을 이룰 대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거절함으로 사명도 왜곡 되고 세상도 황폐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노아와 맺은 보존의 언약을 통해서 기회를 주시고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 언약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거듭되는 백성들의 연약함과 실수를 보여줍니다.
롯은 보기 좋은 세상 땅을 찾아 갔다가 하나님 백성에서 멀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게다가 흉년 때에 이집트에 내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속이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던 단점들이 문제가 생기자 집중적으로 부각됩니다.
이삭도 그랬습니다.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야 말로 우리의 인간성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사람이 별거 아닙니다. 배고프면 죽는 존재입니다. 또 죽음 앞에 떠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함께하시며 잘 되게 도와주십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가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잘 해주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실수투성이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예수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책임지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종종 흉년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 흉년 때에(창26:1~5) 논지/ 부족해도 의지하면 돌보신다. 목표/ 나는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이 부족해도 더욱 의지하도록 돕겠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 평안하셨는지 이런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도 가정과 교회와 삶의 현장을 꿋꿋이 지켜나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전하고 싶다. 정말 고맙고, 잘 해나가고 있고, 함께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이 때에 우리가 평범하게 누리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막상 이렇게 팬데믹 소위 세계적인 감염위기를 맞고 보니 가장 소중한 것만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교 가는 것, 스포츠 하는 것 등등 다 필요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드는 것은 가정이고,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수는 예배임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력으로는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전 40일 즉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고 우리 교회적으로는 제 13차 믿음행전 창세기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으로 33일의 약 절반에 위치해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같이 다시 외쳐보자. ‘너는 사랑스럽고 보배롭고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야!’ 이러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시간이 이번 믿음행전 기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완전한 세상에 주인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먼저 사랑하시고, 이후에 사명도 함께 나눌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데 사람이 그 사랑을 거절함으로 사명도 왜곡되고 세상도 황폐해졌음을 들었다. 그 죄악과 황폐해짐의 결과는 물로 세상을 한 번 쓸어버릴 정도의 심판을 불렀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절멸이 아니라 구원이다. 치유이며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위 사람들과 언약을 맺어 가시면서 그것을 이루셨다.
이미 창세기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셨는데 이를 소위 원시복음이라 하고 하나님의 시선은 이미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할 것까지 다 내다 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물 심판으로 완전 절멸했으면 어떻게 그러한 구원을 보겠나! 그래서 첫 번째 전체 인류 사람들과 언약을 맺은 것이 노아 홍수 이후에 적어도 예수님께서 온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때까지 보존해주시겠다는 보존의 언약을 맺으신다. 이를 다른 말로 무지개 언약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주중에 전달된 말씀을 통해서 보았던 소위 횃불 언약을 맺으신다. 보존의 언약의 상징이 무지개이고 그 대상이 전 인류를 향한 것이라며 이 횃불 언약은 상징이 당연 횃불이고, 그 대상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백성들로 좁혀졌다. 즉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삼으셔서 그 씨를 통해서 구원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잘 보라 이 씨가 연결 되는 데에 무수한 난관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삭이 오기까지 75세에 100세 25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하다가, 여종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니 씨를 통해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생리적인 능력으로는 전혀 얻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내신 아들이 이삭이었다.
25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다. 40세에 결혼한 이삭이 60세에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형이 에서고, 동생이 야곱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따지면 에서가 하나님의 백성 계보를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렀다. 이 계보에 속한 이들에게 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신약이 시작되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계보가 제일 먼저 나온다. 이 계보가 놀라운 은혜를 준다.
다 남자의 이름을 따라가지만 여자의 이름이 동정녀 마리아 포함 딱 5번 나온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기생이었던 라합, 이방 여인이었던 룻,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어디 하나 자랑스러운 이름이 없다. 더러운 치정, 입밖에 내기 부끄러운 출신들이였는데 그들이 놀랍게도 구원 주시는 거룩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랐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느냐?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잘남,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렇듯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백성이다. 우리가 어디를 살펴봐도 복 받을 건덕지가 없는데 은혜로 불쌍히 여기셔서 마지막 시간에 부르셨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주셨으면 이제 그 부름받은 백성답게 좀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안타깝게도 말씀은 거듭되는 백성들의 연약함과 실수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난 주 내내 봤던 내용들이다. 롯은 보기 좋은 세상 땅을 찾아 갔다가 하나님 백성에서 멀어졌다. 아브라함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다. 게다가 흉년 때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속이기도 했다.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던 단점들이 문제가 생기자 집중적으로 부각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도 그랬다.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다. 흉년이야 말로 우리의 인간성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때이다. 사람이 별거 아니다. 배고프면 죽는 존재이다. 또 죽음 앞에 떠는 존재이다. 이 세상에 흉년이 들면 우리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흉년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드러내시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여러분 절망하지 말라! 우리의 흉, 허물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 흉년의 때야 말로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삭의 허물을 보라! 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판박이인가! 아버지가 하던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 아내도 지키지 못하는 천하에 찌질한 못난이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그가 믿음을 보였기 때문에? 용기를 냈기 때문에? 아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가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서 잘 해주듯이 말이다. 이삭은 그 흉년의 때에 농사를 지었는데 자그마치 100배의 소출을 얻었고, 그 지역에서 특히나 흉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물인데 파는 곳마다 나오는 복을 주셨다. 그래서 그 땅의 지배자 아비멜렉이 화친을 맺자고 올 정도였다. 여러분이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막역히 소통하는 은혜가 있을 뿐 더러, 여러분들의 자녀가 잘 되고 하는 일이 잘 되는 이러한 복도 받게 되기를 바란다. 잘 낫다고 뻐기는 용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용도로 말이다.
우리도 실수투성이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예수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책임지신다. 이 땅에서 우리는 종종 흉년도 만날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줄 믿기를 바란다. 왜? 우리는 변덕맞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지독한 흉년의 때를 지나고 있다. 흉년의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연습해야 한다. 이제 흉년이 지나면 다시 풍년의 때도 온다. 그러면 풍년의 때 흥청망청 할 것이 아니라 마치 요셉이 풍년때에 흉년 때를 대비해 이집트와 그 일대를 구원했던 것처럼 절제하고, 준비하여 그 때를 맞이할 줄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우리는 흉년의 때에 무엇보다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 나라에 가깝게 경제적인 흉년이 97년 IMF,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코로나발 경제 위기로 근 10년 단위의 큰 경제 흉년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감염병으로는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사태, 이후로는 근 5년 단위로 커다란 흉년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준비해야 할까?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기회는 결국 천국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잘 산 하루가 평안한 잠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종의 단위들을 주셨다. 짧게는 하루가 천국을 엿보게 한다. 24시간을 살면 잠자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일주일이다. 일주일 열심히 살다가 또 안식일, 주일을 맞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한 달이다. 그리고 1년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 오고, 다음에는 가을 오고, 겨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흉년의 때가 결국에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 전체에서 열심히 살 때가 있으면 또한 부를 때가 있음을 계속 기억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이 때에 결국에는 주님께서 최종 결론 내시고 심판하시며,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안식임을 기억하고 오늘에 주신 소중한 시간들을 믿음으로 잘 채워가야 한다. 작게는 잘 산 하루가 평안한 잠을 주듯이 믿음으로 잘 산 인생이 평안한 마지막을 예비케 할 것이다.
코로나 밉다. 빨리 지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가장 소중한 생명, 가정, 예배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만큼 한 주간도 가족과 더불어 육적인 건강 잘 지켜가는 만큼 예배와 함께 영적인 건강도 꼭 챙겨가기를 바란다. 이번 주에는 성도간의 교제가 더욱 활발히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첫댓글(관찰) 1.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삭이 택했던 방법은 무엇이었나요?(1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해석) 2. 나는 문제가 생길 때에 주로 어떻게 반응하나요? 문제를 만나면 처음에는 태연하게 대하려 노력하지만 생각이 늘어가면서 걱정도 늘어갑니다.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대처방안도 생각해보고, 사람들의 조언도 구합니다. 그러나 결국 평안과 안정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서 찾는 응답입니다.
(적용) 3. 문제나 우리의 연약함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어떻게 하면 더 충분히 누릴 수 있을까요? 결국 무엇을 묵상하느냐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문제와 나의 연약함을 묵상하면 걱정만 늘어가겠지만, 무한한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묵상하면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의 힘과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간섭하심, 실재하심을 더 자주 느끼게 되고, 그럴 때마다 모든 문제를 뛰어 넘고 새롭게 살 힘과 용기도 갖게 됩니다.
첫댓글 (관찰) 1.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삭이 택했던 방법은 무엇이었나요?(1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해석) 2. 나는 문제가 생길 때에 주로 어떻게 반응하나요?
문제를 만나면 처음에는 태연하게 대하려 노력하지만 생각이 늘어가면서 걱정도 늘어갑니다.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대처방안도 생각해보고, 사람들의 조언도 구합니다. 그러나 결국 평안과 안정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서 찾는 응답입니다.
(적용) 3. 문제나 우리의 연약함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어떻게 하면 더 충분히 누릴 수 있을까요?
결국 무엇을 묵상하느냐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문제와 나의 연약함을 묵상하면 걱정만 늘어가겠지만, 무한한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묵상하면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의 힘과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간섭하심, 실재하심을 더 자주 느끼게 되고, 그럴 때마다 모든 문제를 뛰어 넘고 새롭게 살 힘과 용기도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