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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요약>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1~5)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이 해석이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믿음’에 해당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끼며 자포자기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안에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삶을 살며, 다른 이들에게 건강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쥐었던 권력을 사람들을 해하고, 원수를 갚는데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값싼 동정이나, 다른 마음을 품는 야심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실 관계가 낱낱이 드러났을 때에 정확히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즉, 고난의 세월에 현실을 원망하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주님과 교제하며 깊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일들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녀들을 양육하듯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은 모두 섬김의 재료가 됩니다.
특별히 우리를 먼저 믿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양자'로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살리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 구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이 되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을 통해 나를 보는 정체성만 달라져도 세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먼저 보내셔서 분명히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전문 >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1~5)
논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게 하신 이유가 있다.
목표/ 나는 말씀을 듣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먼저 경험케 하신 것을 이웃과 나누도록 돕겠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시고, 가장 분명한 답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으며
교회적으로는 창세기 믿음행전 이제 마지막 주를 남기고 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조하신 세상은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다.
반역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선이고 세상을 다스림이 나중인데
하나님을 제껴 놓고 자신들이 왕인 줄로 착각하고 나선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사랑이 먼저이고, 사명은 다음인데
하나님 사랑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바꾸고,
이웃 사랑이라는 사명은 망각한 채 억압하고, 착취하여, 탐욕으로 바꾼 죄 값을 받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회복하려면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여 우선순위에 놓고,
이웃 사랑이라는 사명을 차선으로 놓아 감당하면 되는 것임을 꼭 기억해자.
요셉의 형제들은 그것이 무너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도 두려운 줄 몰랐고, 형제마저 팔아넘길 정도로 이웃 사랑도 무너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죄악을 품고, 모질게 살아가면 그게 참 행복한 것일까?
오늘도 특송을 통해서 참 행복을 최집사님 가족이 노래했던 것처럼
결국 우리가 사는 이유도 행복하려고 사는 것일 텐데 진짜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데에 있음을 믿기를 바란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랬다.
다 덮어 놓고, 잊고 살려고 그랬다.
마치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소, 코로나 이야기는 꺼내면 안 되는 금기되는 단어였다.
그렇지만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인가?
오히려 덮고 있다가 더 큰 폭발과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오고 있듯이
병은 덮어놓으면 더 키워서 죽음에 이르게도 될 수 있듯이
죄라는 것이 딱 그렇다.
그들은 벌써 십수년 전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여서 죽이려 했고, 모질게 팔아버렸지만
그 인상은 그들의 심령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어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왔었을 때에 간첩으로 몰려서 3일을 감옥에 갇혔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간첩이 아니라면 너희들이 말했던 동생을 데려오너라’는 서릿발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이 그들의 죄악이었다.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사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 죄악이 공동의 흉측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그런 죄악의 기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땅에서도 결국 그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을 안고 짓눌려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심판 주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낱낱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할 때가 온단 말이다.
이번에 소위 n번방 사건이라는 흉측스러운 죄악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국민 청원 최대 수를 훌쩍 넘었을 만큼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자그마치 그 숫자가 26만명이라 한다.
26만이면 우리나라 5000만명 중 절반을 남자라 하면 약 2600만명 정도 될 것이고
26만은 그 100분의 1이 되는 숫자이다.
거기에 아이들과 노인들을 제외하면 50분의 1에 해당되는 숫자이다.
그냥 우리 주변에 아주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가담했다는 뜻이다.
이 일이 밝혀지려고 하니까 벌써 자살한 사람이 한명, 자살을 시도하다가 자수한 사람이 1명, 다 지워달라는 내용들이 검색어 수위에 오르고 있다.
박사라는 이름을 더럽힌 조모씨는 잡히면서 악마의 삶을 끝내게 해서 감사하다 햇다.
무슨 말을 하고 있나?
결국 다 드러나게 된단 말이다.
심지어 익명성 뒤에서 행했던 추악함마저 하나도 감추일 것이 없단 말이다.
지난번 설교 때 ‘흉년 때에’라는 말씀을 나누며
흉년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게 하는 때이며
그렇기 때문에 흉년을 보며 우리는 평상시에 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지금 보라 아브라함 때에도, 이삭 때에도, 또 야곱과 그 아들들의 때에도 한 번씩 이렇게 흉년이 든다.
평상시 배부를 때에는 잘 모르다가, 이렇게 힘든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우리 발목을 잡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가 품고 있으며 해결되지 않은 죄악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렇듯 평생을 품고 살던 죄악이 문제를 만나니까 빵 터졌다.
사실은 평생을 발목잡고 있었던 문제였던 샘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죄악은 반드시 폭로하여, 용서받아야 해결된다.
에베소서 말씀에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입에도 담기 부끄러운 죄악들을 폭로하라 말씀한다. 자백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 죄마다 빛 가운데 드러나 힘을 잃게 된다고 말씀한다.
형제들의 이러한 죄고백, 폭로, 자백을 누가 들었나?
동생 요셉이 들었다.
자신들은 자기들끼리 떠든 말로 여겼겠지만 요셉은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들어가서 한참 운 다음에 씻고 나오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제 지난 주에 보았듯이 그들의 진정성을 시험한다.
그들은 과연 세월을 지내며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지, 남은 형제들 간에는 사랑하고 있는지, 아버지는 잘 모시는지 등을 시험한다.
그런데 세월이 그들을 다듬었다. 특히 4째 유다의 변론이 절정이었다.
베냐민 막내동생마저 어떻게 되면 우리 아버지 죽어요!
이 클라이막스에서 요셉은 정체를 드러낸다.
요셉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 형들의 마음, 형들의 얼굴은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 얼음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형들의 첫 마음은 ‘우린 죽었다’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정 반대의 아주 심오한 이야기를 한다.
본문 5절을 읽어보자.
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은 그들이 판 것이고, 요새 좋아진 것이지 사실 생고생의 연속이었잖은가!
나는 생각해보았다.
당시에 그가 성경책을 쥐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17세에 팔려서 왔다면 그 이전에 받았던 신앙교육이 다였는데 어떻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을까?
그는 묵상과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소년시절 부모로부터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 배웠다. 아버지 야곱과 함께 가는 곳마다 제단도 쌓았다.
그 소년시절의 신앙교육이 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경외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했다.
그래서 똑같은 고난의 시간을 지났지만 그는 그 시간을 불행과 자포자기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가다듬으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을 통해서 그 가운데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건강한 영량력을 끼쳤다.
이렇듯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따라해보자.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믿음’에 해당한다.
요셉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쥐었던 권력을 사람들을 해하고, 원수를 갚는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값싼 동정이나, 다른 마음을 품는 야심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다.
형들마저 요셉의 진심을 믿지 못해서 머뭇거리다가 나중에 베냐민과 얼싸 안고 울고, 15절에 또 한명씩 입 맞추고 안고 운 다음에야 그제야 입을 뗄 수 있었다.
이러한 요셉의 용서를 보면 예수님이 떠오른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피눈물을 쏟으시고, 십자가에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 간구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예수님 역시 정확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셨기 때문에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순종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도 고난의 세월에 현실을 원망하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주님과 교제하며 깊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갔으며, 마침내 형들을 만났을 때 분노를 쏟아낸 것이 아니라 용서를 쏟아낼 수 있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일들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다.
부모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녀들을 양육하듯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은 모두 섬김의 재료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명인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흑인 사생아로 태어나 9살에 성폭행을 당하고, 14세에 출산하여 미혼모가 되었는데 아기가 출생 후 2주 만에 죽었다. 그 충격으로 가출 후 마약복용으로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그가 주일학교 목사님의 말씀 중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을 듣고 변화 받아 모든 상황에 감사하는 생활을 했더니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이후에 평생 독서와 감사일기 쓰기를 실천하면서 삶을 바꿀 수 있었다. 감사생활을 했더니 1 무엇이 소중한지, 2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다.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다.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짐이 아니다.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보내셨던 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니 사실은 사명이었고, 이스라엘 온 가족들을 살리시려는 뜻이 있있던 것처럼
우리를 먼저 믿게 하신 것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생명의 부양자로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살리려는 것이다.
또한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 구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이 되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을 통해 나를 보는 정체성만 달라져도 세상이 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아멘! 하는 우리를 먼저 보내셔서
분명히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같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 청지기들을 통해서 이루실 일이 많으시다.
첫댓글 (관찰) 1. 요셉은 자신이 팔려 이집트에 오게 되었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나요?(5절)
5절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해석) 2. 처음에는 잘 몰랐다가 나중에야 잘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이 있나요?
대학교 시절 목사님들과 아내를 만났던 것이 그 때에는 그저 즐거운 일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 청지기교회를 이루시려는 커다란 그림이셨음을 느끼며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됩니다.
(적용) 3. 현재 당하는 고난이 나중에는 우리 삶에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답답함과 괴로움이 있지만 결국 이러한 고난이 선배 신앙인들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고, 현재의 내 믿음을 점검케 하며, 후에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바르게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