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보리심 발원
원보리심에 의지하여 보살로 새로 태어난
는 부처님의 고귀한 가문에 어울리는
신구의 삼업을 닦기 위해 최상의 보리방편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합니다.
-4032일의 붓다로 살자-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면
이제는 그것을 직접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천수행자에게는 그 행보리심의 중심은 당연히 대비주 수행일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만들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정진의 힘이 필수입니다.
<입보살행론>에서는 정진을 바람으로 비유합니다.
"이와 같이 인욕을 수행하는 이는 정진을 시작해야 하리니
깨달음은 정진에 달려있기 때문이며
바람이 없으면 움직임도 없는 것처럼
정진이 없으면 복덕도 생기지 않는다네."
아무리 큰 보리심을 지니고 있어도
행보리심의 실천이 없으면
멋진 차를 지니고 있지만 기름이 한 방울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정진은 대승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과 같기에
우리는 정진의 힘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입보살행론>에서는 정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정진이란 선행을 하려는 노력이라네."
정진의 목적은 이고득락이기에
고통의 원인인 불선에서 멀이지고,
즐거움의 원인인 선에는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실 논의 다른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정진이란 선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이라네."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즐겁다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고,
대비주 수행을 치열하게 이어나가는 것이 당연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왜냐구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선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불정진의 방해 때문입니다.
<입보살행론>에서는 불정진의 구성요소를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반대는 게으른 것과 나쁜 행에 집착하는 것
낙담과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라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선행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을 막는 첫번째 장애는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새로운 것을 익히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냥 힘이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게으름 때문에 힘이 없다면
당연히 고통의 원인이 되는 불선의 습관을 떨쳐버릴 힘이 없는게 당연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쁜 행에 집착하는 것이죠.
이러하면 어떻게 될까요?
수 많은 이들이 작심삼일의 고리에 걸려 넘어질 때 나타나는
낙담의 감정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낙담하고 크게 실망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는데,
스스로를 경멸하며 신뢰하지 못하고,
낙담하고 실망하는 감정은 점점 더 게으름과 무기력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불정진의 네 가지 요소는 완벽한 순환고리를 형성하는데
게으름 -> 불선에 대한 관성적 집착 -> 낙담과 실망 -> 자신에 대한 경멸 -> 게으름과 무기력 ...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건강하고 즐겁게 바꾸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이 불정진의 순환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네 가지 요소를 좀 더 명확하게 기억해놔야 하겠죠?
지피지기여야 백전불퇴니까요.
부디 게으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바꾸는 행보리심의 수행을 꼭 이어나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_()_
첫댓글 불선업의 순환고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증명 감사합니다 어떨때는 열심히 선업이라고 생각했던일이 불선업이 될때 낙담하곤 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법광합장
정진..선행
행보리심의 수행
스님
가르침에 삼배올립니다 _()()()_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