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면
서양의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수행문화는 그 유서가 생각보다 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표면에 드러날 수 없었는데, 철저히 분노에 희생 당했기 때문입니다. ‘마녀사냥’이라는 환상은 범부들의 눈을 번뇌로 가리기에 정말 좋은 도구였고, 이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어제까지 웃으며 함께 행복을 누리던 사람들을 마녀라고 믿으며 그들을 화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교회의 권력자들에게 신비주의자들은 위협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성서의 권위를 침해하는 말들도 서슴치 않았는데, 만약 이런 분위기가 일반화된다면 권력을 지키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교회의 권력은 바로 성서의 권위로부터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비주의자들은 진리 외의 다양한 교리, 규칙 등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눈엣가시와 같았습니다.
오랜 세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의 눈과 귀를 막았던 시대가 지난 후 근현대에 이르러 신비주의자들의 수행과 철학은 세간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기적수업>이라는 텍스트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이들도 그 흐름 중 하나입니다.
<기적수업>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종, 성령의 순수한 통로가 되기 위해 자아를 죽이는 것 즉, 무아를 깨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응용과 해석들이 존재하는데, 그 주석서 격에 해당하는 저서 중 하나의 한국어 제목은 <우주가 사라지다>입니다.
<기적수업>은 철저히 무아의 지혜 즉, 반야를 근본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자아라는 관념과 이 세상이라는 관념조차 용서해내면, 그 순간 실제라고 믿던 꿈과 같은 우주가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죠.
붓다는 분명 이 세상을 꿈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붓다라는 보통명사의 의미는 ‘깨달은 자’이기도 하지만 ‘깨어난 자’이기도 합니다. 무엇에서 깨어났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만든 온갖 관념들의 꿈에서 깨어난 것을 말합니다.
범부의 일상은 생각에서 시작해 생각으로 끝납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와 미래의 생각에 빠져서 지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죠. 범부가 생각에 사로잡혀 얼빠져 있을 때는 마치 반쯤 잠들어 있는 상태와 유사합니다. 바로 앞에서 중요한 일들이 지나가도 모른채,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도 흘려들으며 그렇게 멍하니 살아갑니다.
장자의 <장자(莊子)>에 등장하는 호접몽의 일화는 장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엿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는 정말 꿈과 현실 중 무엇이 꿈인지가 구분이 잘 안되는 것이죠. 왜일까요? 둘 다 꿈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현실보다 꿈이 더욱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본능에 솔직하기 때문에 어쩌면 더욱 현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꿈속에서 백 년 동안 행복을 누려도 깨고 나니 바뀐 것이 무엇이며 꿈속에서 한순간 행복을 누렸지만 깨고 나니 바뀐 것이 무엇이던가. 깨고 나면 이들 둘의 행복은 끝이 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장수하든 단명하든 두 가지 다 죽을 때에는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네.”
꿈에서 깬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범부는 깨닫지 못하는 한 윤회의 꿈에서 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꿈에서 깬다는 것은 지금 이 삶이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이 끝나고 다음 생을 받기 전, 대부분의 영가들은 삶에 대한 후회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깨고나면 꿈과 같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못한, 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후회가 함께 하는 것이죠.
만약 범부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것 역시 꿈을 깨는 것입니다. 이 때는 단 한 생을 꿈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았단 모든 윤회의 생이 바로 꿈인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꿈에서 깨어나 이 윤회에서 자유로워진 붓다들에게 과연 꿈 속에서의 일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많은 재산을 모아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려도 죽을 때는 도둑들에게 모두 빼앗긴 것처럼 우리는 빈손에 맨몸으로 떠나야 한다네.”
해인사의 경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백년동안 탐했던 재물은 한 순간 사라지는 티끌과 같고, 삼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된다.” 범부에게 이 한 생을 꿈으로 비유하고 있는 구절로써, 이 생이 끝나는 순간 꿈과도 같은 이 삶에 애지중지했던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집니다. 오직 삶을 가치 있게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공덕만이 다음 생의 꿈을 행복하게 바꾸는 재산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어차피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중생의 삶은 끝 없는 체크인과 체크아웃의 반복입니다. 새로운 생마다 옮겨가는 몸은 숙소와 같습니다. 결국은 체크아웃하고 옮겨가야 할 남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한채 범부들은 남의 숙소를 꾸미고, 그 안에 갖가지 물건들을 수집하고,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에 집착합니다.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며 이것들을 위해서는 온갖 나쁜 짓도 서슴치 않는 것이죠.
세상에 정당한 분노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분노의 원인은 탐욕이고, 이 집착은 사실 허망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꿈 속의 물건들, 어차피 빌린 남의 숙소에서 집착해야 할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집착하는 습관 때문에 자동으로 집착하는 것 뿐이고, 이를 뿌리로 일어나는 분노 때문에 고통 받고 있을 뿐입니다. 옛 선사들은 이런 번뇌놀음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항상 이렇게 호통치셨다고 합니다.
“꿈 깨!”
첫댓글 예 스님 고귀한 가르침 항상 감사드립니다()()()
생각에 사로잡혀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깨어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평온한 날 보내세요~♡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꿈..깨어나기
스님
감사드립니다 _()()()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번뇌에 빠져 흔란스러울 때 자신에게 호통쳐야겠습니다
“꿈 깨!” 라고 ...
삶을 가치 있게 바꾸기 위한 공덕을 많이 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_()_
저도 항상 잘 알아차리겠습니다 꿈깨~!
감사합니다 법광합장
감사드립니다
스님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