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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8일(토)/주일복음말씀묵상/ † 간질병 귀신을 쫓아내심 (마태17,14-21; 마르9,14-29; 루카9,37-42)
변화산으로 예수님과 함께 간(마태17,1-1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 산 아래서 간질병이 든 어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실 때까지 이 아이에게 들어가 간질병을 일으킨 귀신(18절)을 쫓아내지 못하여 당황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 왔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그분께 나아와 꿇어 엎드려 자기 아이를 고쳐달라고 애원하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병이 낫기를 기도할 때마다 그 질병의 근원이 자연적인지 혹은 초자연적인 것, 곧 귀신에 의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영적통찰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병이라고 말했으나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마태17,14-16절은 “14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리에게로 오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드렸다. 15 주님, 내 아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는 간질병으로 매우 고통을 받고 있는데(He has seizures and suffering greatly), 자주 불 속에서도 넘어지고 물속에도 빠집니다. 16 내가 그를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에 간질병의 원인이 귀신임을 밝히는 첫 내용이다. 여기서 “seizures”는 간질 등의 발작을 말한다. “간질”의 원어적 의미는 달밤에 일으키는 간질병의 발작증을 가리킨다. 고대 의학에서는 이러한 발작 증세가 달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7-18절은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여러분과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내가 여러분에 대하여 참아야 하겠습니까? 그 아이를 여기 나에게로 데려오십시오.’라고 하시고, 18 그 귀신을 꾸짖어시니,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그때부터 아이가 나았다.”라고 말한다.
마르9,22-24절은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자주 불 속에도 던지고 물속에도 던졌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대가 하실 수 있으시다면’ 이라고 말하십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고 하시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외쳤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패역한) 세대여,” 이것은 누구를 향한 책망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귀신을 내쫓지 못하는 제자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조소하는 바리사이 모두를 포함해 “세대”라는 말로 나타낸 듯하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며, 이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이 고백은 아비의 솔직하고 간절한 믿음의 염원을 엿보게 한다. 아들을 살리고 싶은 소년의 아버지의 심한 괴로움과 절망, 그 간절함과 믿음 없음을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장애자를 둔 나에게는 너무나도 애절하고 생생하게 나에게 다가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귀신이 내 아이를 죽이려고 자주 불 속에도 던지고 물속에도 던졌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대가 하실 수 있으시다면’ 이라고 말하십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고 하시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외쳤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바로 이 절박하고 진솔한 고백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와 똑같은 심정으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실 수 있거든”의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말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18절). 바로 귀신이 이 아이의 간질병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어도, 너희가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거라’ 라고 하면 옮겨 갈 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산들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산은 큰 고난일 수 있다. 많은 고난과 각자의 특유의 어릴 때부터의 무의식의 습관들, 곧 트라우마까지도 산들처럼 단단하고 견고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구원과 치유는 믿음이 있느냐? 혹은 믿음이 생기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구원과 치유를 이루는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점화되는 것이며,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사이다(24절). 인간적인 무력감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별도의 가르침을 받는다(28-29절).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에 있음으로써만이 그분의 진정한 능력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배운다.
19-20절은 “19.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우리는 왜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라고 하니, 2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어도, 여러분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거라.”라고 하면 옮겨 갈 것이니, 여러분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마태오복음은 이러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책임이 오직 제자들의 “적은 믿음”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지난주일 복음말씀인 마태14,31절은 “…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는 장면에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제자 됨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라는 점이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갈 때는 예수의 전권에 완전히 참여한다(마태14,29절).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의심”으로 말미암은 시련이 또한 끊임없이 존재한다(31절). 의심이란 한편으로 주님에 대한 신뢰와 다른 한편으로 위험을 불안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현실 사이에서 두 쪽으로 갈라진 틈새에 존재한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제자들과 그들의 임무 수행을 항상 위협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 적은 것”이다. 마태8,26절에서 배는 교회의 의미요 상징이며,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적은 믿음” 안에서 좌초당할 위협을 받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거듭해서 오직 예수님의 임재를 통해서 그리고 그분의 능력의 말씀을 통하여 구출을 받게 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는 특별한 위험은 “적은 믿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는 말씀은 마르9,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의 반향으로 들린다.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우리는 왜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라고 하니(19),” 이런 현상이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능력이 아예 없거나,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자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1코린4,20절은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라고 말한다. 능력이 없는 설교는 지식을 전하는 것이지 생명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이다. 하늘의 임금이 오셨음을 전하고, 임금의 권세가 왔음을 전하고, 이에 따른 이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루카1,37절은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한다.
마태17,21절은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으면 귀신이 나가지 않으리라.”라고 말한다. 전승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기도와 금식이 “믿음”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곧 귀신 축사는 기도와 금식으로 무장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톨릭 성경에는 21절의 본문이 빠져 있다.
루카복음 18장1-8절에서 과부의 끊임없는 탄원을 묵상해보라. 마귀와 그 졸개인 귀신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영을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반드시 성령세례의 체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도와 금식은 참으로 믿는 이들의 “일”이며, 하나의 “삶의 태도”이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들을 향하여 탄식하셨다.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주여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이적이 없습니까?” 하자 “기도 외에는 이런 이적이 날 수 없다. 금식과 기도 외에는 없다.”라고 하셨다. 금식은 밥을 굶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금식의 참된 의미가 이사58,6-7절에 기록되어 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참된 금식 기도는 불행한 사람을 돕기 위한 사명감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자유와 멍에를 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존중함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는”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의 말씀과 권능을 보고 듣고 읽고 체험하면서도 여전히 왜 우리 믿는 이들은 먼저 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가? 제자들의 실패는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기도하는 것에 관한 실패이다.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으면 귀신이 나가지 않으리라.”
주님 말씀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참뜻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는 하느님과 사람의 상호 접촉으로 사람이 하느님을 호흡하고, 하느님을 얻고, 하느님에 의해 얻어진 바 되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과 협력하고 동역하는 것이며,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과 그분의 갈망을 표현하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대신에 제자들은 스스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애썼다. 귀신을 쫓아내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대신에 주님께 기도와 금식을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방언 기도는 내 영의 기도이다. 귀신 축사를 체험하고 있는 나에게는, 특히 귀신을 쫓기 전에 방언 기도가 대단히 중요함을 체험하고 있다. 약한 영을 강하게 강화시켜주며 통역과 예언의 은사도 선물 받는다. 참고로 나에게는 귀신 축사 전에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말씀을 기도로 읽는 몇 가지 말씀이 있다.
첫째는 1요한4,4절의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세상을 이겼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 계신 분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마르9,25절의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이 말씀을 레마로 반복해서 받고, 영으로 기도하면 담대해진다. 벙어리며 귀먹은 귀신인 또 하나의 인격이 그 사람에게서 나가버리면 몸이 원상으로 회복된다.
둘째는 필리2,9-10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이들과 땅에 있는 이들과 땅 아래 있는 이들이 모두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도록 하시고”라고 말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일에 있어서 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능력이며 권세이다.
셋째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똥파리들의 왕을 가리킨다. 그들은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귀신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결의를 다져야 한다. 곧 성령 안에서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과 이어질 때 이성과 상상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놀라운 체험을 가지게 한다. 귀신을 쫓는 방언기도와 믿음의 담대함과 결의와 체험은 당신의 믿음을 반석처럼 굳게 만들어 줄 것이다.
넷째는 귀신을 쫓는 데는 기도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반드시 귀신을 큰소리로 꾸짖음과 예수이름으로 명령함이 필수적이다. 귀신은 주 예수님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악령도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아이가 간질병을 앓고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귀신을 “꾸짖으시고 쫓아내셨다.” 이것은 많은 질병들이 귀신이 원인임을 가리킨다.
바쁜 중에 홀로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시며 오직 하느님만을 의뢰하시는 주님을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안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란 참된 자기 부인을 함축한다. 기도하는 대신에 제자들은 귀신을 스스로 쫓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을 행하였다. 사도행전은 도도히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알렐루야! 아멘!
* 참고로 귀신축사와 관련한 나의 체험을 체계화한 ‘마귀와 타락한 천사에 관한 연구’를 필독서하기 바란다.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한 것이며, 귀신축사의 체험은 당신의 믿음을 한 단계 성장시킬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