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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16일/주일복음말씀묵상/ † 내 딸이 귀신 들려 심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마태15,21-28; 마르7,24-30)) 오늘 본문에서 한 여인이 주님 앞에 와서 “자기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한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쉬고 싶었지만 도무지 쉴 틈을 얻지 못했다. 많은 병자들이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하고, 귀신을 쫓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소문은 병 고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로 시작되었다. 이 이적을 본 자들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감탄했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의 소문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귀신은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가정을 파괴한다. 가족 사이를 이간시키기도 하고, 부부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사업을 망쳐 놓으며, 이웃 간에도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 환경 속에서 가족들은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를 제거함으로써만이 가정을 건강하게 하고 평안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귀신의 역사가 큰 타격을 준다. 오늘 본문에서도 딸이 귀신들리자 그 어머니가 몸부림치며 속수무책인 귀신들린 딸을 살리기 위한 일념으로 소문만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절히 매달리는 장면이다. 15,21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고 말한다. 주님은 이 위선적인 종교인들에게서 떠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곳인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이사23장; 요엘3,4). 하느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티로와 시돈을 저주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은밀한 죄인들을 떠나서 공개된 죄인들에게로 향하기를 좋아하셨다. 지방이라는 말은 영역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가 티로와 시돈에 살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영역 안에 있다. 종말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은 참으로 악하다. 오늘날 우리가 바로 티로와 시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22절에서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여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가나안 여인은 저주받은 가나안 족속에 속했다(창세9,25-26). 가나안 족속은 팔레스타인(블레셋)의 원주민이다(창세10,15). 마르코복음 7장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수로보니게는 그 당시 지명이고 가나안은 그 이전의 고대 이름이기 때문이다(민수13,29). 그녀는 저주받은 땅에서 왔다. 주님이라는 말은 긍휼을 구하는 외침이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녀의 잘못된 외침이다. 다윗의 자손은 가나안 여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은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고 번역했으나 “제 딸이 호되게 귀신들렸습니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마귀와 귀신은 다르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의 몸에는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마귀는 단수로 타락한 천사장이다. 이 부분은 나의 귀신축사의 체험을 성경의 구절들로 체계화한 ‘마귀와 타락한 천사에 관한 연구’를 필독서하시길 바란다. 23절은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보아)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만일 주님이 다만 다윗의 자손이었다면, 그분은 이방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것이다. 이 여인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었다. 다만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그렇게 부를 특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주님을 붙잡는데 있어서 합당치 못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을 부르는 방법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자들은 이 귀찮은 여인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주님께 그녀의 요구를 속히 들어 주시기를 구했다. 24절에서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으셨다. 그러나 이때 그분은 이방 지역으로 오셔서, 이방인들에게 그분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시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곧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오셨지만, 유대인들의 불신 때문에 그분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사도13,46; 로마11,11). 주님은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그분은 이 여인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자 하셨다. 주님은 이스라엘 집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잃어버린 양에게 가시고자 하시므로 그 영역은 훨씬 더 넓어졌다. 그 여인도 잃어버린 양이 아닌가? 그녀는 은총을 받을 수 없겠는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이 잃어버린 양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가 생각할 수 있도록 멀리서 기다리고 계셨다. 비록 주님이 그때 입을 열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은 은총을 베풀기를 갈망하셨다. 그러나 그 여인이 죄인의 위치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주님께서 그녀의 요구에 응답하시기 어려웠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침묵으로 지연하시는 것은 거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한 마디 말씀을 하신 후에 그분은 멈추셨다. 그러나 그분은 속으로 우리를 무한히 기다리고 사랑하기를 갈구하고 계셨다. 그분의 겉으로 보이는 간격은 참다운 간격이 아니다. 25절에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오! 주님! 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좋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잃어버린 양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것이 은총이라면 거기에는 위치의 제한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내가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지만 나도 또한 잃어버린 양이므로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온 이스라엘 나라를 티로와 시돈과 같은 동일한 수준으로 낮추셨는데, 결국 모든 사람은 죄인들이다. 그녀는 예수님이 그녀의 딸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알았다. 무릎을 꿇은 채 그녀는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이제 이 여인은 주님을 다만 ‘주’라고 부르며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삭제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제 구원이 무엇인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처음으로 그 여인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전에 하신 말씀은 그 여인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주님은 유대인들을 양들에 비유하셨고 이방인들을 개에 비유하셨다. 유대인들이 양들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양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잃은 양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방인들은 그들 또한 양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개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양은 굽이 갈라졌으며(외적인 정결함), 그리고 되새김질(내적인 정결함)을 한다. 이 여인은 자신을 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녀가 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를 거절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주님은 그녀에게 또 다시 붙잡을 손잡이를 주셨다. 여기에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숨겨져 있다. 이스라엘이 먼저 택함을 받았건만 어째서 이방인에게로 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루카복음에서는 성경을 응하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곧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그 땅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도 엘리야를 통해서 은총을 입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방인인 사렙다의 한 과부였다. 또 엘리사 시대에는 문둥이가 많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는 문둥병을 치료받을 자가 없고 오직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뿐이라고 말한다. 과부든 문둥병자이든 하느님의 은총은 당연히 이스라엘이 먼저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그 은총이 임했다고 말한다(루카4,25-27). 본문에서 주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은총을 받고 그 다음에 이방인이 받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이 강해서 이방 사람들을 개같이 취급했다. 그런 이방인에게 복음이 먼저 전파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자녀가 배부른 다음에 개에게도 줄 수 있다는 원칙”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나 엘리사가 자기 민족에게로 가지 않고 이방인에게로 간 것같이, 예수님께서도 이방인인 그 여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27절에서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여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고 그녀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주님은 그녀에게 그분의 말씀의 손잡이를 주셨으며 그녀는 그것을 붙잡았다! ‘비록 나는 개이지만 나는 당신의 개입니다. 내가 당신의 개이므로 나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이 병들었기 때문에 주님께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먹는 문제로 전환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밖의 씻음이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는 내적인 음식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기 위하여 그녀에게 먹는 문제를 연관시키셨다. 26절에서 주님은 그 여인에게 자신을 먹기에 좋은 작은 떡덩이로 계시하셨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왕이신 주님 자신을 떡으로 그분의 백성에게 먹이는 것이 그분이 그들을 다스리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은 하늘에 속한 떡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자녀를 위한 몫으로 오신 상(床)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상 밑으로, 곧 이방나라로 던져 버렸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방인들을 위한 몫으로 부서진 부스러기가 되었다. 그 당시 이 이방 여자가 깨달은 믿음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주님께서 그 여자의 믿음을 크게 보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28). 오늘날 우리가 병들었다면 예수를 먹는 내적인 방법으로 치료 받아야 한다. 그녀는 이스라엘에게서 하느님의 축복을 빼앗아 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그 축복의 일부가 그녀의 필요를 채우는데 연장될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28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분이 이스라엘 중에서 찾고 계셨던 그 큰 믿음을 보시고 그 여인의 청을 수락하셨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고 나았다. 여기서 주님은 그녀를 여인으로 부르셨으며 주님은 처음으로 그녀를 칭찬하시고 그녀의 청을 들어주셨다. 주님의 마음은 그녀의 믿음에 크게 놀랐으므로 기뻐하셨다. 하느님께서 지체하시고 시험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훈련 시간과 같다. 응답하는 것이 지연될수록 믿음은 더 커진다! ‘다윗의 아들’은 타고난 관계(옛사람)를 가리킨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행위가 선하고 행동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을 포기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기꺼이 낮추고 개의 위치에 선다면, 하느님은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어떻게 기도하며 하느님의 말씀의 손잡이를 붙잡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깊이가 한량이 없다. 본문에서 여인이 도움을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여인은 자기 딸을 집에다 두고 왔으면서도 주님 앞에 믿음을 보임으로써 딸을 구원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의지는 대개 어머니에게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체험상 대개 일곱 살까지는 그 의지가 어머니에게 있어서 어머니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사람의 의지에 매달리는 귀신을 어머니에게서 쫓아낼 수 있다. 어린아이가 병들었어도 어머니 속에서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가 앓고 있어도 어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아이는 그 즉시 정상으로 회복된다. 따라서 아이의 병은 어머니가 담당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자기에게서 분리시키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의 죄를 담당하고 고통을 담당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가 아픈 것은 내가 아픈 것이요, 내 의지에 속한 내 문제로 인정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듯이 아이의 문제를 어머니가 담당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도 죽은 것같이, 어머니가 아이의 고통을 자기 문제로 인정하고 담당하여 ‘내 속에서 역사하는 귀신아, 예수이름으로 명령하니 나가라!’고 명령하고 대항하면 승리한다. 죄는 인류가 지었지만 예수가 그것을 자기의 문제로 알고 죽음을 통해서 담당하셨듯이, 어머니도 아이의 문제를 그렇게 담당해야 한다. 병든 아이를 끌어안고 이곳저곳으로 안수 받으러 다니는 것은 아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책임을 계속 아이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믿음이 없어서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의지는 어머니에게 있다. 아이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 일곱 살 이내의 아이들의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으니 그 어머니가 해결해야 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오래 전에 충격을 받은 바 있다. 약 30년 전 종합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어느 수도회의 기도회에 정기적으로 수년 간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살리려는 일념으로 전국 각지에서 용하다는 소문만 듣고 참석한 많은 절박한 부모들에게 귀신축사의 방법을 몰라 담대하지 못하고, 비성경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경험이 있다. 귀신을 쫓는 능력은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거저 주신 것이요, 예수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은 그것을 계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십계명만 계명인 줄 아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준 계명이고,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있다. 계명이란 주님이 법으로 만드셨다는 데 있다. 바로 “귀신은 떠나거라!” 하신 말씀도 계명이다. “병에서 나으라.” 하신 것도 계명이고, “전도하라.” 하신 말씀도 계명이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능력 있는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야 한다. 능력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능력 있는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의 복음을 널리 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렐루야! 아멘! * 참고로 귀신축사와 관련한 나의 체험을 체계화한 ‘마귀와 타락한 천사에 관한 연구’를 필독서하기 바란다.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할 것이며, 귀신축사의 체험은 당신의 믿음을 한 단계 성장시킬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