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구석구석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젊은이도 늙은이도 도무지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이 나라와 이 나라 백성들의 오늘날의 참모습이다. 방금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에게 다시 수감결정을 내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분이 홀로 이 시대 주님의 남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 나는 기도로 이 고난에 참여하련다.>
앞의 “잃어버린 작은 자들”이 여기서는 “범죄한 형제”로 언급된다. 예수님은 “작은 자들” 하나를 귀중히 여겼듯이, 범죄한 형제 하나라도 잃지 않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첫 단계는 은밀하게 권고하고, 그 다음에는 두세 사람이 같이 가서 죄를 지적하고 그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게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회부하도록 한다.
마태15-17절은 “15 또한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하거든 가서 너와 그만 따로 있을 때에 그의 허물을 그에게 일러 주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었느니라. 16 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려하지 아니하거든 너와 함께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하라. 17 만일 그가 그들의 말 듣기를 무시하거든 교회에 그것을 말하되 그가 교회의 말 듣기를 무시하거든 너는 그를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고 말한다.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죄를 범하거든, 그 두 사람이 그 일을 상의해야 한다. 일이 그 선에서 끝나면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범죄한 형제가 듣지 않거든 분명한 증언을 위해 두 세 증인을 대동해야 한다. 이것은 신명기 19장 15절에 기록한대로 구약의 전례와 부합되는 일이다.
만일 그래도 범죄한 형제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상황을 온 교회 혹은 회중에게 고해야 한다. 이처럼 비상한 경우에는 그 일을 전체 회중에게 내 놓아야 한다. 최후 수단으로 축출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회중을 언급하신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오순절날 교회가 건축된 후 그들은 이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거기서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로 취급하게 된다. 이방인과 세리는 교회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말한다.
18-20절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19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자기들이 구할 어떤 것에 대하여 땅에서 한마음이 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행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교회의 권세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징벌의 위엄을 보이신다. 19절은 다시 한 번 16절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이 절에서는 가능한 한 17-18절에서와 같은 마지막 조치가 취해지지 않도록 경고하며 그렇게 하는 길을 제시한다. 곧 두세 사람이 그 형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 중에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18절은 공동체의 전권을 뒷받침해 주며 그것을 행사한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20절은 유대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상응한다.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율법 말씀을 연구할 때에 하느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 말하자면, 율법과 하느님 대신에 “예수”가 들어간 셈이다. 이것은 마태5,21-22; 27-28절의 내용과 1,23절과 28,18-20절의 말씀을 고려할 때 이해가 된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여기에 언급된 두세 사람은 교회가 아니다. 이 두세 사람은 앞의 16절의 두세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수는 있지만 그들이 교회는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교회에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17). 만일 두 세 사람이 교회라면 그 문제를 교회에 가져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권징이 사라져 버렸다. 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했음을 말한다. 추기경과 주교들부터 신부들 수도자들 평신도까지 모두 타락해 버렸다. 교회가 너무 타락하여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도 없다. 성직자도 평신도도 모두 망가져 버렸다. 그저 눈물이 난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럽의 교회처럼, 교회건물로만 곳곳에 남아 그 남은 곳도 인본주의 좌파들이 들쥐처럼 들어차 있다. 중국 코로나를 이유로 교회의 예배까지 중지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이 나라는 부패한 독재국가로 이미 전향한 것 같다. 지난 70년간 서서히 몰락하여 자각증세도 느낄 틈도 없이 철지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국가로 이미 전략해 버렸다.
사회 구석구석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젊은이도 늙은이도 도무지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이 나라와 이 나라 백성들의 오늘날의 참모습이다. 방금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에게 다시 수감결정을 내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분이 홀로 이 시대 주님의 남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 나는 기도로 이 고난에 참여하련다.
이제 혹독한 바벨론 70년의 포로생활이 우리에게 예비 되고 있다. 감히 말하겠다. 가톨릭은 망했다. 교회가 아니다. 천박한 독재자와 이념을 같이하는 혼합주의자들이다. 개신교도 망했다. 진정한 참선지자 전광훈 목사를 이단으로 몰고 있고, 거짓 엉터리목사들이 독재 편에 서서 온갖 사악한 짓을 부끄럼없이 자행하고 있다. 교회에 예수의 소문이 사라져 버렸다! 이천년전 예수님 초림 때의 바로 그 모습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 두렵건데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편131-2, 4).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나” 대신에 “이 나라와 교회”를 넣어서 기도하자! 그러면 다윗에게처럼 주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6).
나도 이제 일신해야겠다. 이제부터 주일복음말씀묵상을 요한복음 연구, 마르크복음, 루카복음, 마태오복음 순으로 지금까지의 원고를 정리하면서 매일 일정량을 쓰려고 한다. 그리고 전 성경을 대상으로 영으로 기도하며 “나의 묵상집”을 쓰고 싶다. 내 나이 칠십대 중반, 금년 들어 건강이 현저히 기능이 저하되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고, 눈이 불편하고, 여름에도 다리와 발이 저리고 차가와 내복을 입어야 할 지경이다.
요즘 나의 영성도 많이 약해졌다! 이 정부와 교회에 대한 미움이 커지면서 집중력이 약해졌다. 교회, 정치, 사회, 경제, 이념, 독재, 공산주의, 전체주의, 역사, 철학, 심리 등등. 살아 역사하시는 그분의 뜻을 의심하고 나 자신에게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말씀과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련다.
새삼 다짐하지만, 건강도, 자식도, 노후도, 죽음까지도 주님께 모두 맡기자! 나 자신과 환경에 파묻히면 도무지 소망과 살 길도 없다! 깊은 믿음 안에서 이 세상을 끝내고 주님의 품안에 안기고 싶다. 그래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매일 성경을 읽게 하시고 가정교회와 예배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전 성경을 대상으로 영으로 기도하며 나의 묵상집을 쓰고싶다'는 말씀은 참으로 감사하게 다가 옵니다.
저도 47년생으로 7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16년 1월 3일 부터 매일 복음 말씀을 묵상하여 요약한 나눔글을 대자들과 지인들에게 보내며 뭔가 부족한 듯 하여
묵상 글 대신 같은 복음 말씀을 영으로 읽고 기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보내주신 글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먼지 보다 못한 소인에게 다니엘 형제님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조금전에 형제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갈급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 있는 이 말씀에 내 영이 춤추고,
이 말씀을 나누며 형제님과 우리의 남은 기간동안을 동역하게 됨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이 곧 하느님이시라"(요한1,1).
하느님께서 형제님을 친구로 붙여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소소한 일들까지 형제님과 더 잦은 연락을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