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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2월2일/주일복음말씀묵상(제2독서)/ † “구원”은 이미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루어졌다(히브2,14-18)
<고난을 통하여 구속받을 자(자녀 혹은 형제)들과의 동일시>
히브2,10절은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하느님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묘사하는데, 원문으로 보건데 이는 구원의 창시자가 더 적절하다. 영어번역은 captain(NKJV), pioneer(NRSV), 혹은 leader(NIV)이다.
이 번역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을 계획하고 주도하시는 하느님과 구별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는 구속 계획을 실행하실 때, 예수님은 그 계획을 수행하는 리더 역활을 하신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구원 사역을 감당하실 때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하실 것을 계획하셨다.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먼저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적인 면을 강조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설명한 것이다. 본래 온전한 분이지만 스스로 낮아져 온전케 되는 과정에서 사람과 동일한 과정을 겪으신 것이다(동일시).
이는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야만 구속 사역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구조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감당하실 구속 사역이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고난 없이 온전해질 수 없다.
그 고난의 정점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그 인격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이 문맥에서 볼 때 하느님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셔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이 이러한 일을 단번에 이루지 않고 자신의 독생자를 죽게 함으로써 이루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을 이어진 11절에서 찾을 수 있다.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11절에서 그러므로(왜냐하면)라는 접촉사는 이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10절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모두 동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동일시를 이루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이 이러한 동일시를 이룰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성육신으로 출발한다고 볼 때, 예수님의 성육신은 곧 하느님의 자녀들과의 동일시를 의미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를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묘사한 것은 이러한 동일시를 더욱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내용은 다음의 구원의 창시자와 영광에 들어갈 많은 아들들과 관계가 된다. 곧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구원의 창시자를 가리키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영광에 들어갈 많은 아들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을 구원받을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거룩”은 단지 구원받은 자들이 계속 변화(보다 정확히는 혼의 변화를 말한다)해야 할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신분상의 성격을 말한다.
12-13절은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밝히 보이고(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분을 신뢰(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2,17-18절은 보다 구체적으로 답변한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를 동일시한 결과이다. 사도 바오로는 12절에서는 시편22,22절을, 13절에서는 이사야8,17-18절을 인용한다. 이 맥락에서 시편22,22절은 그러한 기도가 하느님께 응답되었다는 것과 그 기쁨을 그의 백성과 나누어 싶어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시편 22편에 나타난 하느님 안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께 투영시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의 인용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느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기도를 응답받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모습으로 소개하면서, 동일시로서의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13절에서는 이사야 8,17-18절을 인용한다. “17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앗시리아의 침략을 예고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문맥으로 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 18,17절에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나타난다. 결국 여호와께서 야곱 집, 곧 이스라엘을 향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것은 앗시리아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바라볼 것을 다짐한다. 그는 이미 앞부분 이사야8,12-13에서 비슷한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선포하였다. “12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 만군의 여호와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이 말씀에서 ‘맹약한 자’란 앗시리아의 위협에 대비하여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다른 나라와 안보 조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행위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하느님만 의지하기를 기대하셨다. 이러한 가운데 이사야는 하느님의 뜻대로, 그리고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권면한 것처럼 하느님의 심판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기다리고 의지할 것을 다짐하면서, 자기에게 주신 자녀들이 바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보증하는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이사야의 견해를 예수님께 적용시킨다. 곧 이사야가 하느님의 심판가운데 다른 방도를 찾지 않고 하느님만 의지하여 자신에게 주신 자녀들을 통해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거로 삼은 것처럼, 예수님도 심판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만 의지하는 모습과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의뢰하는 모습을 견지한다.
그리고 예수님께도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보장할 만한 자녀들이 있다. 이 자녀들의 존재가 바로 예수님께서 성육신해야 하는 이유이다. 13절에서 인용한 이사야8,18절은 예수님의 상황으로 확실하게 전이된다. 다음 14-16절은 이상에서 설명한, 특별히 “동일시”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발전시켜 설명하고 있다.
14-16절은 “14 그런즉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분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그분께서 죽음(사망)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15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14절에서 예수님께 “자녀들”은 그분이 성육신하셔야 하는 중요한 동기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이 혈육(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이 죽음으로써 죽음의 능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고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죽음의 공포로 종노릇하는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과 동일한 피와 살을 가져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그들의 피와 살에 함께 속하게 되셨다는 것이다.
마귀는 없이 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자유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자녀들과 동일시하여 혈과 육에 속하셨기 때문이다. 곧 이사야는 “자녀들”을 자신의 혈육이라고 말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이사야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구속받은 자들이라고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사야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바오로에게도 하느님의 심판 가운데서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시는 징표가 된다. “자녀들”은 하느님의 신실한 징표가 되기 위해 구속을 받아야 하고 그들이 구속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야 하는 것이다.
16절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위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자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 천사들에 대한 것 이상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필연적으로 고난과 죽음을 수반한다. 하느님은 이러한 방법을 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혈육에 속하여 하느님의 자녀들과 동일시하신다(9-11절).
이러한 동일시는 12-13절에서 시편22,22절과 이사야8,17-18절의 사건을 예수님께 적용함으로써 더 잘 드러난다. 결국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한 동일시를 통해 마귀를 멸하시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자유하게 하셨다(14-16절)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17-18절은 “17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것은 그분께서 하느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이는 하느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러므로” 라는 접촉사로 시작함은 17-18절이 앞의 논증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범사에”라는 문구와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 인해 동일시가 강조된다. 17절에서는 14-16절에서 “자녀들”이라는 표현이 “형제들”로 대체된다. 14-16절과 17절에서 “자녀들”과 “형제들”은 또한 11절에서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결국 17절은 형제들과의 동일시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이 아니라 성육신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동일시, 곧 성육신의 목적은 신실하고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대제사장의 역할은 바로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다. 18절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가 이러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성육신하셔서 모든 면에서 시험을 당하심으로 시험받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되셨다. 히브2,5절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대제사장이 됨으로써 발생한 효과를 정리하면서 마무리한다.
앞에서는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죽음의 능력, 곧 마귀를 없이 하고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는 반면(15절), 여기서는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고,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시므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녀들”과 “형제들”을 “아브라함의 씨”로 표현함으로써 구속사적 맥락을 인식시켜 준다는 점이다.
구속사적 배경은 곧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속 사역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서부터 집요하게 주도적으로 준비되고 성취된 구속 사건이다. 14-15절에 따르면, 예수가 같은 혈육에 속한 인간의 길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 가심으로써 “구원”은 이미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루어졌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