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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11일(토)/부활절복음말씀묵상/ † 그리스도와의 연합 (로마6,1-11)
<부활절복음말씀(제2독서)묵상을 올린다. 세월이 악하다. 거짓된 권력으로부터 교회가 탄압받고 있다. 이에 저항하고 뭉쳐야 할 믿는 자들이 오히려 분열하고 침묵함으로써 악의 세력들과 연합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나는 지난 약 1년간, 지금 죄 없이 감옥에 갇혀있는 사랑제일교회 전광훈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았다. 이 분은 진짜 목사이시다. 이분은 참선지자이시다. 오늘 부활절 날에도, 사랑제일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경찰과 서울시공무원들의 의도된 공권력의 탄압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 곧 이 시대 참 교회를 발견한다.
가톨릭교회는 마치 절간과 같다. 교회폐쇄공고만 정문에 오랫동안 붙어있다. 사랑침례교회 정동수목사는 이 거짓 좌파정권에 하느님의 천벌이 내린다고 말한다. 교회를 탄압하는 잘못된 권력에 순교의 자세로 대항하고 있는 전광훈목사와 사랑제일교회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교묘히 변질된 공산주의자들의 술수인 동성애, 이스람, 차별금지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는 이 정부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비례정당 19번인 기독자유통일당을 지지한다. 이 정부는 거짓 방법으로 초중고 교과서에 이미 이 내용을 실어 이 못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 나는 이들의 저항에 동참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이것은 교회를 없애고 하느님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교회들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도무지 선과 악에 대한 방향감각이 없다. 주사파에 동조하는 가짜 성직자들이 70%에 달한다니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어찌할꼬!>
<세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란다>
로마5,12절은 로마서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전환점은 죄들에서 죄로, 위치에서 인격으로, 칭의에서 거룩으로, 또한 구원에서 생명으로 바뀌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제 사도 바오로는 방향을 바꾸어 우리의 행위 대신 우리의 인격을 다루기 시작한다. 로마서의 첫 네 장반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람 자신이 아닌 사람의 행위에 관심을 두었고, 타락한 사람의 죄의 행위가 모두 언급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타락한 상태에서 하느님을 누리는 은혜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상태와 한계와 위치의 변화였다. 아직 사람 자신이나 사람의 본성이나 성분의 변화는 없다. 사람의 행위가 처리되었고, 상태가 바뀌었지만 사람 자신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부터 바오로는 사람 자신에 대하여 다룬다.
우리는 사람의 상태와 환경과 위치에서 전진해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앞에서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것이 객관적인 방면이다. 이 문제들은 모두 처리되었고, 사람은 씻어지고 죄를 사함 받았고,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화목 되었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사람 자신이다. 이것은 주관적 방면이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로마서 5장부터 8장에서처럼 사람이 철저히 드러난 곳은 없다. 이 네 장에서 사람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 세밀히 밝혀진다. 마치 바오로는 병든 사람을 진단하기 위해 갖가지 모든 영적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5장 11절까지는 죄들(복수)을 다루었다. 5장 12절부터는 죄(단수)를 다룬다.
로마서 5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죄는 다만 하나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 속에 들어오고(5,12), 왕 노릇하고(5,21), 주관하고(6,14), 사람들을 속이고, 죽이고(7,11), 사람들 안에 거하며 그들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도록 하는 인격과 같다(7,17-20).
<로마서의 이신칭의>
로마5,20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남쳤나니” 라는 말씀은 불경스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려면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로마3,5절 이하에 의하면, 사실 바오로가 선포한 이신칭의의 복음에서 방종주의적인 추론을 끌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 바오로에게 신학적인 반기를 들고,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고 주장했다(3,8). 그렇다면 우리는 로마서 6장을 바오로의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한 오해를 변호한 것이라고 보아도 된다. 로마6,2-4; 6,5-7; 6,8-10절은 내용상 약간의 발전적인 이동이 있지만 상호 병행을 이룬다.
이런 반론을 염두에 두고 바오로는 6,1a에서 수사학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참조3,8). 이 질문에 대하여 바오로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6,2a).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생각은 심각한 오해이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형벌에서 구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물론 죄는 여전히 믿는 자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지만, 더 이상 믿는 자를 노예로 삼고 주인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죄의 통치에서 자유함을 얻었는가?
바로 죄에 대한 죽음을 통해서이다.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는다(6,2b). 어떤 믿는 자가 습관적으로 계속 죄를 범하고 산다면 그는 여전히 죄의 종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바오로는 로마서6,3-4절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세례는 물에 잠기는 의식을 말한다. 그것은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세례에 비유하셨다. 곧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은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르10,38). “나는 받을 세례가 있느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루카12,50).
그렇다면 믿는 자들이 세례 받을 때 물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는 것을 의미한다(6,3-4a). 로마6,3-4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로마6,2-11절의 기본 사상은 2절에 언급되어 있다. 아무도 죽은 사람에 대하여 지배나 권리나 요구를 내세울 수 없다. 우리의 대표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고 장사되셨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동참하게 된다. 콜로2,12절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례는 일종의 장례식이다. 그런데 세례라는 의식 그 자체가 어떤 신비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의식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믿음과 세례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경험이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믿는 자는 세례 받지 않을 수 없다.
4절과 관련하여 비록 우리는 첫 사람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둘째 사람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았다. 세례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그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선하건 악하건 모두 아담 안에서 태어났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인 그리스도를 본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우리는 그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분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그 길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는 것이다. 세례란 아담의 지체들을 죽음에 넣음으로써 그들을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았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도 로마서 6장 3절에서 “안으로” 라고 번역한다. 사람들에게 세례를 행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는데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의식이나 형식만이 아니다. 세례의 행동에는 반드시 영적 이동이 있어야 한다. 결코 의식적으로 세례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를 행할 때 우리에게 그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고 있다는 확신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 비록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지만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unite)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육에서 영으로 변화되었다.
그리스도 자신도 육에서 영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죽음과 부활이 필요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함으로 우리는 위치적으로 아담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아담의 일부에서 그리스도의 일부로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이 연합의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이에 관한 두 가지 또 다른 사항을 분명히 보고 이해해야 한다. 로마6,5절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have been united)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will certainly also be united)”고 말한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으심을 본받아”라는 말은 세례를 가리킨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다. 6,5절을 헬라어 원문에서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세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란다. 이 “함께 자란다.”라는 말은 번역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헬라어 단어가 루카복음 8장 7절의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에서 사용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을 때 어느 의미로 우리는 죽임을 당하지만, 다른 의미로 우리는 자라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흙에 씨를 뿌리는 것과 흡사하다. 씨를 뿌릴 때, 그 씨의 껍질은 흙 속에서 썩어 죽음에 넣어지지만 껍질 속의 생명은 살아나 자라서 실제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죽음과 부활과 새 생명!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자란다. “그의 부활을 본받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새로운 생명의 잉태이다. 우리는 모두 이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 죽고 이제 그와 함께 자라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세례 안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이제 그의 부활 안에서 그의 거룩한 생명 안에서 그와 함께 자라고 있다.
<죄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의 방법>
로마서 6장은 믿는 이들이 죄로부터 해방 받는 하느님 방법을 계시한다. 이러한 해방은 개개인 믿는 이를 위해 하느님이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이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객관적인 진리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로마서 6장의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죄인이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그 순간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거나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이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게 된 동기에 따라, 혹은 교회에 무심코 다니다가 어떤 계기에 주님을 영접할 수도 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믿는 이가 된 지 오랜 후에야 다시 로마서 6장의 복음을 깨닫는 이유는 그들이 들은 복음이 온전하지 않았거나, 그들 자신이 완전히 영접하지 않았거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것은 위의 어느 단계에서든 새로 태어난 믿는 이가 공유하는 축복인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얻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로마6,6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실직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다음 세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 “죄”(원문에서는 단수이다). (2) “옛사람” (3) “몸”(죄의 몸), 이 세 가지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데 특히 범죄 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역할이 각각 다르다.
이 “죄”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죄의 뿌리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다고 말한 것은 “죄”가 주인 노릇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죄 하는 일에 있어서, 첫째로 우리는 “죄”에게 능력이 있고 우리로 종노릇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죄”는 쉬지 않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옛사람”으로 하여금 순종케 하고 범죄하게 한다.
이 “옛사람”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이다. “옛사람”이란 우리의 혼 안에 있는 타고난 생명을 말한다. 옛사람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타락한 바로 우리의 존재 자체이다. 그것은 혼 그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소망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 놓여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혼 생명이다.
만일 우리가 “옛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새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새 사람외의 모든 것이 “옛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새사람은 바로 거듭날 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새로이 얻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우리의 인격 안에서 새 것 외의 다른 모든 것이다.
우리의 이 “옛사람”은 바로 우리의 낡은 인격이요 모든 낡은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옛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죄”를 좋아하고 “죄”의 능력에 굴복하기를 좋아한다. “죄의 몸”은 우리의 육신이다. 범죄 할 때 육신은 죄의 꼭두각시 노릇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물질에 속한 부분이다. 이것을 “죄의 몸”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죄”의 능력 아래 굴복하기 때문이요, “죄”의 정욕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죄”는 이 육신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지 않을 때 “죄”는 보이지 않는 능력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죄”는 우리가 범죄 하도록 우리를 끄는 힘이다.
“옛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우리가 얻은 정신적인 부분이며, “죄의 몸”은 아담으로부터 우리가 얻은 물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범죄의 체험에서 첫째는 죄이고, 둘째는 옛사람이며, 셋째는 몸이다. “죄”는 그 능력을 발휘하여 범죄 하도록 사람을 유혹하고 강요한다. “옛사람”은 죄를 좋아하고 죄에 찬성하며 죄에게 치우치기 때문에 몸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주도한다.
“몸”은 밖의 꼭두가시로서 죄를 범하는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매번 사람의 범죄는 이 세 가지의 동역의 결과이다. 모든 범죄에는 죄의 능력의 압박과 옛사람의 성향과 몸의 실행이 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이성과 체험들에 근거하여 사람은 죄로부터 모든 악이 시작되기 때문에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죄를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를 근절시켜야 한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그들은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기만 하면 죄를 범하지 않게 되고 거룩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은 범죄를 실행하는 부분이 몸이기 때문에 죄를 이기려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교회 가운데 여러 방법으로 자기를 억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금욕주의자들이 생겼다.
그들은 자기 몸의 요구를 이길 수 있기만 하면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하느님의 방법이 아니다. 로마서 6장은 하느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하느님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거나 밖의 몸을 제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있는 옛사람을 처리하신다.
<우리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죄가 다시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실 때 그분은 우리 죄를 그곳에 가져 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가져 가셨다. 우리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원문에서 완전 과거 시제의 동사로서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영 단번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이미 완성된 사실인 것같이 우리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이미 완성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면, 왜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의심하는가?
많은 믿는 이들은 “함께 죽었다”는 진리를 들은 후에 하느님의 계시가 없거나 믿음이 결여된 이유로 자기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힘껏 자기를 못 박으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죄를 벗을 능력이 없고 어떤 방법을 쓰도 옛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매우 큰 과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못 박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자신을 못 박으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못 박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우리 옛사람을 못 박으라고 말하지 않고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우리 옛사람을 이미 못 박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구절에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못 박아야 한다거나 이 못 박은 역사가 장래의 일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 이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고 또한 함께 못 박힘이 이미 완성된 사실임을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가장 보배로운 한 마디가 낳은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올라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묵상해 보라.
머리로 이해한 진리는 결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여기에 절대로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하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하는 것은 사람의 머리의 이해가 아닌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가 있을 때 이 진리가 사람 속에서 능력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믿음은 계시로부터 온 것이다. 계시가 없으면 믿음도 없다. 하느님의 계시가 있는 사람은 믿는 능력도 소유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믿음이 없는 이유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하느님의 계시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계시를 구하자! 그렇다면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목적은 무엇인가? “죄의 몸으로 실직케 하기 위한” 것이다(원문 참조).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또는 “죄의 몸이 멸하여”라고 번역된 것은 그리 정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죄의 몸이 실직하여” 또는 “못쓰게 되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죄”가 격동할 때 우리 “옛사람”은 이것에 대해 메아리치며 결국 “몸”은 범죄를 시행하게 된다. 범죄한 몸을 육체라고 한다. 이제는 죄가 전과 같이 격동하고 그 능력으로 압박을 가해도 “옛사람”이 이미 못 박혔고, 새 사람이 옛사람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가 다시는 이 사람을 시험할 수가 없다.
이는 그가 새 사람이 되었고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옛사람은 다시 죄에 찬성하여 몸으로 범죄케 하는 일을 주도하지 않게 된다. 바로 “옛사람”이 이미 못 박혔기 때문에 죄의 “몸”은 실직하여 할 일이 없게 되었다. “몸”의 직업은 본래 죄를 짓는 것이었다. 이제 범죄할 수 없기 때문에 실직한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 옛사람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몸으로 실직케 하였는가? 그분의 목적은 우리로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를 위하여 모든 역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고 죄의 압제를 당할 필요도 없으며 죄의 능력에 목 매일 필요도 없다. 죄가 다시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가 찬미해야할 한 가지 일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세례라는 의식 그 자체가 어떤 신비한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의식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것을 상징한다. 달리 표현하면, 이러한 죽음의 동참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로마6,6a 갈라2,20).
여기서 못 박힌 것은 과거완료형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못 박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 안에서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가 주님을 믿은 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의 몸, 곧 옛사람이 무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6,6b).
옛사람은 우리의 혼 안에 있는 타고난 생명, 곧 혼 생명을 가리킨다. 옛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바로 우리 자신(나, 자아)이다. 하느님은 이 혼 생명을 소망 없는 것으로 여기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셨다. 이전에 우리의 혼(생각, 감정, 의지)은 옛사람을 자신의 생명과 인격으로 삼아 독립된 인격체로서 행동했다.
그러나 이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우리의 혼은 성령의 한 기관으로서 행동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삼아 우리 영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죄의 몸은 죄가 안에 거할 뿐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고 소유되고 이용되어 죄에게 종노릇을 하는 몸이다. 그래서 몸은 죄악이 가득한 일들을 행한다.
죄의 몸은 죄짓는 인격이 아니라 옛사람이 이용하는 죄짓는 도구이다. 옛사람은 죄를 범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결국 죄의 몸을 육체가 되게 한다.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어”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죄를 짓는 도구로서 옛사람에게 이용되었던 몸은 이제 할 일이 없다.
그 몸이 해고되었기 때문에 할 일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고, 더 이상 죄의 속박 아래에서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죽음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에 대한 답이 로마6,7절에 제시되어 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해방되었음이니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다(갈라3,22).
죄는 우리에게 사망을 요구한다(6,23). 이러한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부채를 청산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죄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죽었다. 우리 자신이 직접 죽은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 죄는 더 이상 죽은 자에게 아무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어서 6,8절은 진술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리스도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다시 죽지 않으시고 죽음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6,9).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 곧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자들은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다(6,8). 그리스도는 그분의 부활 안에서 몸의 부패와 죽음을 초월하신다. 우리는 이 부활 안에서 그분과 하나이므로 우리 또한 몸의 부패와 죽음을 초월한다.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5b)와 “그와 함께 살 것이다”(6,8b)의 미래적 표현은 분명히 종말론적인 미래이다.
이것은 믿는 자가 미래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미한다.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자들의 영광스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의 실제적인 부활은 분명히 미래에 발생할 사건이다.
그러나 부활 생명의 능력, 곧 성령은 현재 믿는 자들의 삶에 역사하여, 새로운 삶, 곧 동기와 목표와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게 한다(6,4b). 이 새로운 삶에서 부활의 능력이 현실화되는 것이다(갈라2,20).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느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다”(6,10).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여 단번에 죽으셨다. “단번에”는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죄가 요구하는 모든 것, 곧 사망을 다 지불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다. 죽음 후에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시고 주(Lord)로 높임을 받아 영광에 들어 가셨다.
이리하여 죄의 권세는 파괴되고,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제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삶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6,11절에서 바오로는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권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이 붕괴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다(2코린5,17). 믿는 자들은 옛 주인인 죄에게 다시 복종하지 않기 위하여, 이제 자신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인정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계속적으로 동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만 살고자하는 결단을 포함한다. 사실 하느님께 대한 삶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때에만 새 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여긴다.’란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긴다는 것은 배우고 연습하는 기술이 아니다. 6장에 계시된 사실들을 봄으로써 생긴 것이며 자연스럽게 믿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김이란 봄으로써 생겨나는 믿음의 문제이다.
사도 바오로는 사실을 봄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을 언급한 후에야(로마6,6-10) 비로소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에 대하여 산자로 여기라고 말한다(6,11).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이 살아 있으므로, 이렇게 여긴다고 해서 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것 자체로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집행할 수 없다.
현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여김을 지속할 수 없다.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고 여긴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새사람으로만 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오직 로마서 8장에 계시된 그 영, 곧 성령을 누림으로써, 6장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하신 효능 있는 죽음과 그분의 부활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6장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사실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믿고 여길 필요가 있다. 8장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실들을 우리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실제화 하는 성령의 주관적인 일을 보여 준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그분을 누려야 한다.
6장에 언급된 사실들은 8장에 계시된 성령 안에서만 우리의 체험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7장과 8장에서 그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들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부활절을 맞아, 부활 생명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