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2)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조건들/ (2-2)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로마6,11)
<사실, 믿음, 체험>
히브11,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한다. 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2코린4,18). 나는 히브리서 11장이 신약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믿음에 대한 유일한 정의라고 믿는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에서 “실상”은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어떤 상태만을 뜻하지 않고 일종의 행동을 뜻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화요(substantiating)”, 이 단어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이는 “실체화”는 바라는 것들을 체험으로 변화시키는 행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 수 없게 된다.
실상(實狀)은 내 앞에 있는 어떤 물체의 현상을 말한다. 실제화(實體化)는 그 물체를 우리에게 참이 되게 하는 어떤 힘 혹은 기능을 말한다. 지난날 나는 이 부분의 이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오관을 통하여 자연계 안의 것들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세상에 있는 빛과 소리를 실체화시키는 두 가지 기능이다. 세상에 있는 각종 색상들은 참되다. 그러나 눈을 감아 버릴 때 그 색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색상의 실제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나는 시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에게는 색상의 실재화할 능력이 있게 된다.
시력을 통해서 노란색은 내게 노란색이 된다. 나는 어떤 물체를 내게 참된 것이 되게 하고 내 의식 속에 실제가 되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실체화의 의미이다. 만일 내가 색맹이라면 색상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혹 내게 듣는 능력이 결여 되었다면 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없다. 그들의 실재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타고난 감각으로는 신성한 사물들을 완전하게 실제화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바라는 것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들을 실제화하는 능력은 오직 믿음뿐이다.
믿음은 사실을 우리의 체험에서 진실한 것이 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실제화시킨다. 참으로 많은 세월을 지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 6절의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을 읽어보았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나, 의심하거나 영적인 빛이 결여된 채 머리로만 동의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참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약속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다루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붙잡도록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여전히 참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사실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
그 사실 자체는 믿음에 의해 결코 그 진실성이 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이 그것들을 만질 수 있고 그것들을 우리 체험에서 참된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우리는 마귀의 거짓말로 여겨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한17,17).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만이 나에게 진리이다.
마귀는 노련한 거짓말쟁이다. 말로만 아니라 또한 태도와 행동으로도 속인다. 그는 위조지폐를 사용하듯이 거짓말을 한다. 마귀는 노련한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그자는 어떤 표시나 느낌, 혹은 체험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요동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나의 중점은 거짓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계시된 위치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사탄은 최선을 다하여 매일 우리 체험을 증거로 하여 우리가 근본적으로 죽지 않았고 도리어 매우 활동적임을 믿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거짓을 믿을지? 아니면 하느님의 진리를 믿을지?’를 선택해야 한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어떻게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2코린5,1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체험이 이 사실을 확증하든 안 하든 간에,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사실 위에 서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을 공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될 때, 마귀의 목적은 달성되고 우리를 그의 능력 아래 둘 수 있게 된다. 사실과 믿음과 체험은 담 꼭대기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과 같다. 사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게 전진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믿음은 사실을 따라서 간다. 오직 믿음의 눈의 초점을 사실에 둘 때만이 만사가 순조롭다. 그러나 체험에 관심하여 그가 어떻게 전진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면, 그는 즉시 담에서 떨어진다. 거기에 따라 계속되는 체험도 이어서 가련하게 떨어지게 된다. 모든 시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시험은 우리의 눈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보이는 것들로 돌아가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좇아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거짓말이 우리의 체험과 일치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과 상반된 것들을 거절하고, 단순히 그분을 믿는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사탄의 기만이 허물어지고 우리의 체험이 한 걸음씩 하느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만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는 그분이 참 공의인 것과 참 거룩인 것과 참 부활 생명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본래 우리가 보았던, 그분 안에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이 이제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그러나 참되게 역사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숙의 표시이다. 갈라4,19절이 바로 이런 뜻이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사실을 실제화시킨다. 믿음은 항상 영원한 사실, 곧 영원히 참된 사실을 실제화시킨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