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십자가와 두 창조(벧전3,21)/ 옛 창조와 새 창조
골1,16-17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한다.
요한12,31-33절은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말한다.
이 세상 왕국은 하느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계획과 갈망 안에서 그분이 창조한 우주, 곧 그 아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우주를 갖고 계신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육체를 사용하여 대적하는 체계를 세웠는데, 성경은 이것을 “이 세상”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 체계 아래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 사탄 자신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사실상 사탄은 “이 세상 임금”이 되었다.
이 때문에 첫 창조는 사탄의 손에 의해 이미 옛 창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의 관심은 더 이상 첫 창조가 아닌 두 번째 창조에 있게 되었다. 곧 새 창조, 새 왕국, 새 세계를 가져오셨다. 이 새 창조 안으로는 옛 창조와 옛 왕국과 옛 세계 안의 어떤 것도 가져올 수 없다. 이제 문제는 이 대립되고 대적하는 두 왕국 중 우리가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어느 왕국에 속하느냐에 대해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다. 골1,12-13절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한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대한 감사가 하느님에 대한 지식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다.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심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선사하시는 새 생명에 가담하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은 이미 지금 흑암의 권세(갈1,4; 에페5,5-8)에서 빼내어져서 그리스도의 해방하시는 통치 아래 옮겨져 있다. 악과 죄의 권세는 그 세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우리를 하느님의 새 왕국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셔야 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새 창조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새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게 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한3,6), ”혈과 육은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1코린15,50)“라고 말한다. 당신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얼마나 교양이 있든지 또한 얼마나 자신을 개선하든지 간에 육체는 여전히 육체이다.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느 창조에 속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옛 창조에 속하는가? 아니면 새 창조에 속하는가?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결국 우리의 근원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옛 창조에 속하는가? 아니면 새 창조에 속하는가? 우리는 육체로 난 자들인가? 아니면 영으로 난 자들인가?
우리가 새 왕국에 적합한가는 결국 우리의 근원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문제는 선하고 악한가에 있지 않고 육체냐 영이냐에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육신은 결단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옛 창조에 속한 어떤 것도 결코 새 창조 안으로 넘어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서 구하시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일임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결코 옛 창조의 어떤 것으로 새 창조에 공헌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위해 우리를 얻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원래의 낡은 우리들을 그분의 계획 안으로 이끄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먼저 우리를 십자가로 제하시고 그런 다음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2코린5,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기능을 지니고 새로운 왕국, 새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이전 것“을 해결하시는 방법이다. 그분은 우리 ”옛사람을 완전히 한쪽으로 제쳐 놓으신다. 또한 하느님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 새 세계 안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로마6,4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우주 가운데 가장 큰 부정은 십자가이다. 하느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일소하셨다. 그 반면에 우주 가운데서 가장 큰 긍정은 바로 부활이다.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새로운 영역 안으로 이끄셨다. 그러므로 부활은 새 창조의 부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첫 왕국에 속한 모든 것들을 끝내는 십자가와 두 번째 왕국에 속한 모든 것을 가져오는 부활을 깨닫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러므로 부활 이전에 시작된 모든 일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부활이 하느님의 새로운 기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낡은 것이고 하나는 새로운 것이다.
낡은 세상 안에서 사탄은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옛 창조 안에서 당신은 선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당신이 옛 창조에 속해 있을 때 당신은 사망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옛 창조에 속한 것들 중 새 창조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죽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선포이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것 중 십자가 이편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모두 저편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옛 창조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을 그분의 아들에게 돌리셨다.
그런 다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다. 이 점은 우리를 세례의 문제로 이끈다. 로마6,3-4절을 다시 묵상해 보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만 한다.
성경에서 세례는 구원과 관계가 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마르16,16).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구원은 이 세상 체계와 관계된다. 우리는 사탄에 속한 세상 체계 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을 사탄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갈라6,14절은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한다. 벧전3,20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한다.
이 예표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노아와 그의 일가는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가 옛 세상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그들이 익사를 면한 것에 중점이 있지 않고 그들은 부패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는 데 중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벧전3,21절은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느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한다. 곧 하느님은 세례로 표명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당신을 구원하신다. 또한 당신의 세례로 말미암아 이점을 확증하셨다.
세례의 한 방면은 ”그분의 죽으심에 합하고“ 옛 창조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의 다른 방면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새 창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로마6,3). 당신이 물속에 들어갈 때 당신의 세상도 함께 물속에 들어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질 때 당신의 세상은 이미 감겨 버린 것이다.
바오로와 실라는 빌립보의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한 그들은 간수와 그의 일가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다. 간수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즉시 세례를 받았다(사도16,31-34). 그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께 속한 백성과 영적인 권세 앞에서 심판받은 세상으로부터 그들이 구원되었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된 매우 중대한 일이다. 세례는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된 매우 중대한 일이다. 또한 두 세계와도 관련된다. 벧전3,21절은 계속해서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느님을 향하여 찾아가는(대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누가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면, 또는 만일 하느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답할(찾아가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와 세상과 옛 창조 그리고 옛 왕국에 대한 심판을 알려 주셨다.
십자가는 단지 그리스도 개인에게 속한 ”개인적인“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십자가요 당신과 나를 포함한 공동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각 사람을 그분의 아들 안에 두셨고 그분 안에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그분은 이미 첫 아담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완전히 일소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옛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판결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바로 세례를 요청하는 것이 나의 응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장사될 자격이 있는가? 당연히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례받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오직 무덤에 들어가기에만 합당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계속).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