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2) 십자가와 두 창조/ 장사는 바로 옛사람의 끝냄이며, 부활로 인하여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감(로마6,4-5)
<장사(葬死)는 바로 끝냄이다>
십자가는 단지 그리스도 개인에게 속한 ”개인적인“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십자가요 당신과 나를 포함한 공동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각 사람을 그분의 아들 안에 두셨고 그분 안에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그분은 이미 첫 아담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완전히 일소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옛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판결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바로 세례를 요청하는 것이 나의 응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장사될 자격이 있는가? 당연히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례 받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는 오직 무덤에 들어 가기에만 합당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거의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지금도 그 의미를 모르면서 교회를 다닌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떠밀려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다가 고난 중에 그 의미를 깨닫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장사를 죽음의 방법으로 취한다. 그들은 장사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눈이 열려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또한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세례받을 권리가 없다. 우리가 물속에 내려가 잠기는 이유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이미 죽었음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을 간증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질문은 간단하고도 명백하다.
그분은 ”그리스도가 이미 죽었고 또 내가 너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다(1코린1,30). 이 사실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말하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주여, 당신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또한 당신께서 나를 당신의 죽음과 장사에 넣으신 것에 대해 나는 믿고 ‘예’라고 말할 뿐입니다“라고 응답해야 한다.
그분이 이미 나를 죽음과 무덤에 넣으셨기 때문에, 내가 세례를 청하는 것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랑하는 남편이 죽은 어떤 여인이 비통한 나머지 미쳐서 남편의 장사를 거절했다고 하자. 하루 이틀이 지나고 몇 주일이 지나도록 남편의 시체를 집안에 두었다. 그 여자는 ”그이는 죽지 않았어요. 매일 나는 그이와 대화하고 있는데요“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 가련한 여인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을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여인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느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장사하는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방법과 완전성과 내가 죽어 마땅한 것과 하느님이 정말로 이미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믿을 때이다. 내가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때 나는 세례를 청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이미 죽었음을 인하여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당신께서 이미 나를 죽이셨으므로 이제 저를 장사하소서!“
오늘날 옛 세상과 새 세상이 있는데 이 두 세상 사이에는 무덤이 있다. 하느님은 이미 나를 못 박으셨지만, 나는 무덤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나의 세례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십자가 안에서 내게 주신 판결을 확정하는 것이고, 또한 내가 이미 옛 세상과 갈라졌고 지금은 새 세상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옛 생활 방식으로부터 단호하고 의식적인 구분을 짓는 것이다. 로마6,2절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말한다. 곧 ”만일 너희가 옛 세상에 계속 머물기를 원한다면 왜 세례를 받는가? 만일 너희들이 옛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세례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의미이다.
일단 당신이 이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옛 창조를 장사지내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새 창조를 위한 토대를 닦게 되는 것이다. 로마6,5절도 역시 세례받은 사람(3절)에 대해 말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례로 말미암아 상징적으로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긴밀한 연합을 성취하신 것을 시인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연합이 어떤 의미인가? 세례 뒤편에 있는 그 참된 의미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죽음 안으로 잠기고 결국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그분의 죽음과 이같이 친밀히 연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눌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물속에 잠길 때, 우리는 이 역사적인 잠김, 곧 하느님이 완성하신 바 그분과의 연합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대중 앞에서 한 간증은 바로 이천 년 전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유를 포함하고 능력이 있는 죽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분의 능력 있고 만유를 포함한 죽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끝내셨다.
<부활로 인하여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감>
로마6,5절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부활의 상징은 죽음의 상징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새로운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주님의 죽음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부활에 관해서도 물론 ”내가 그분 안에 있지만,“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생명을 나에게 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어떻게 이 새 생명을 얻는가? 사도 바오로는 ”그와 연합하여“라고 말한다. 헬라어에서 연합이라는 단어에는 ”접붙임“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접붙임은 먼저 한 나무에 상처를 내고, 그런 다음 거기에 좋은 나무의 가지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 잘 묶어서 그냥 자라게 둔다. 좋은 나무의 생명을 연결시켜 접붙임으로써만 나쁜 나무에 좋은 과실을 맺을 수 있다. 이는 한 나무의 성질을 다른 나무로 옮겼기 때문이다.
외과 의사가 한 사람의 몸에서 피부 일부를 취하여 화상을 입은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시켜 팔이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이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 나무의 가지를 다른 나무에 접붙일 수 있고, 한 사람의 피부를 다른 사람의 상처에 이식할 수 있을진대, 하물며 하느님께서 더욱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연결시킬 수 없으시겠는가? 나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요한3,8절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한다. 비록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는 것은 하느님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의 생명 안에 접붙여진, 좋은 열매를 맺는 유일한 생명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새 생명“ 이라고 부른다. ”새 생명“이란 전에는 사람에게 없었던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나의 타고난 생명이 완전히 변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생명, 곧 전혀 새로운 생명인 하느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그 아들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옛 창조를 없애셨는데, 그 목적은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를 가져오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이미 흑암의 권세로 향하는 낡은 문을 닫아버리고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다. 나의 영광은 바로 이미 완성된 사실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한 것이다(갈6,14).“ 나의 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개적인 간증이다. 이것은 입을 열어서 하는 간증이 나의 구원을 위함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로마10,10절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한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