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대학자 회재 이언적은 양동마을로 가지 않았다.
회재 이언적은 김안로 세력과의 당쟁에 밀려 한양을 떠나 낙향해야 했다.
그는 나고 자란 양동마을 무첨당으로 가기는 싫었다.
그게 두렵고 겁이 났다. 그곳으로 갔을 경우 양동의 여강 이씨 친가는
물론 월성 손씨 외가까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운 곳은 피했다.
아버지 이번이 생전에 마련한 한적한 옥산리 별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언적은 옥산리 초옥(草屋)을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고 '7년간의 둥지'로 삼았다.
좌청룡 화개산이 실하게 지켜주고 있고 우백호 자옥산도 이에 질세라
단단하게 경호하고 있는 그 둥지는 가히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회재 이언적은 중앙정치 무대로 복귀하기까지 7년 동안 머물면서
친자식 서자 이정인과 함께 그의 학문을 다듬은 곳, 독락당(獨樂堂) 이다.
회재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독락(獨樂), 바로 '홀로 즐김'이다.
"옛날 어진 선비들만이 어찌 홀로 그러지 않았겠는가.
자신의 도(道)를 즐겼고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맹자가 그의 <진심상구> 편에서 한 말이다.여기서 따온 독락(獨樂)이다.
그 독락(獨樂)의 의미를 살려 이 집은 개방적이기 보다는 폐쇄적이고
은둔해 살려는 회재의 의지를 고스란히 담아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곳곳에 가림막 담장을 둘렀다.
그 폐쇄공간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감추려는 듯
담장이 겹겹이 막았고 곳곳에 미로(迷路)가 혼란했다.
독락당의 행랑채 경청재(敬淸齋)이다.
회재 이언적이 청백리에 녹선되자 그의 두 손자
준(浚)과 순(淳)이 화의문을 작성하고 세운 집이다.
청백(淸白)은 공경지심(恭敬之心)에서 나온다고 해서
그 후손들이 당호를 경청재(敬淸齋)라고 했다고 전한다.
1900년 그 후는 며슴들이 사용한 공간이었다.
두 손자의 화의문이다.
"독락당은 우리 선조고(先祖考) 문원공(文元公)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외 유택에는 우리 부모(휘 전인, 호 잠계)의 혈성이 가득하다.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외부인들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종가 안채는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그 독락(獨樂)의 은밀한 곳으로 가는 길은 미로였다.
겹겹이 여러 대문을 거처야 회재가 머물던 그 공간을 만난다.
사랑채 옥산정사(玉山精舍)이다.
玉山精舍 그 현판은 마루 앞 처마 아래에 있다.
회재 이언적을 동방 4현으로 존숭하던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홀수 칸으로 한옥을 지었다.
산 사람들의 공간은 양의 수인 홀수로1칸 3칸 5칸 7칸 9칸으로 구성했다.
음의 수 2칸 4칸 6칸 8칸은 죽은 이의 공간 구성에 적용했다.
옥산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가장 왼쪽 한 칸만 온돌을 들였다. 오른쪽 3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오른쪽 한 칸에 온돌을 깐 흔적은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마루 안쪽에 편액 獨樂堂 편액이 있다.
문장가이며 서화와 서예에 뛰어났던 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회재 이언적이 이곳 산수(山水)을 벗 삼아 즐겼던 곳이다.
아주 맑고 맑은 자계(紫溪)을 끼고 있는 정자 계정(溪亭)이다.
ㄱ자 모양의 정자 계정(溪亭)으로 두 곳에 서로 다른 편액이 있다.
계정(溪亭)은 양진암(養眞菴)이라고도 했다.
이 養眞菴 편액도 회재를 존경한 퇴계 이황의 글씨다.
아름다운 자계(紫溪)를 끼고 있는 곳, 말 그대로 신선의 공간이다.
그 독락(獨樂)을 기가 막히게 만끽할 수 있는 공간 계정(溪亭)이다.
독락당에서 머물면서 회재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 계정이었다고 한다.
溪亭 그 편액은 석봉 한호의 글씨다.
계정(溪亭)은 자계의 맑은 물과 화개산 나무 숲으로 둘려쌓여 경승을 뽐내고 있다.
회재는 독락당을 지으며 주변의 산봉우리에 도덕산 무학산 화개산 자옥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곡의 바위에도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징심대 세심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4산5대로 구성된 계곡의 이름을 '자계'라했다.
계정은 이 자계에 가깝다 못해 일부가 된 듯 보이는 곳이다.
마당에서 보면 한 채의 낮은 건물이다.마루 위에 올라서면, 짙푸른 산과
맑은 계곡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정자로 변하는 게 계정의 묘미다.
회재 이언적은 계정에서 독락獨樂을 노랬다.
-홀로 즐김-
무리를 떠났으니 누구와 더불어 시를 읊을까?
바위의 새와 개울의 물고기가 내 얼굴을 익혔구나.
이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곳을 알고 싶은지
두견새 우는 소리 들릴 때 달이 산을 엿보는구나.
獨樂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행랑채에서 독락당으로 가는 길목에 약숙밭이 있다.
회재는 독락당에 거처하면서 이곳에 약쑥을 손수 가꾸었다.
회재가 거주하던 독락당 뒷벽의 창은 이 약쑥밭과 이어지는
통로였고, 동쪽의 창문은 계곡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다.
해동명적(海東名蹟)이 보관하고 있는 서각이다.
이 해동명적은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의 서예가(書藝家)이며
문신(文臣)인 신공제(申公濟)(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가(名家)의 글씨를 모아서 석각(石刻)한 것을 탁본(拓本)하여
상하(上下) 2책(二冊)으로 엮은 것이다.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이언적수필고본일괄(李彦迪手筆稿本一括),
회재 이언적이 직접 쓴 저술을 말한다.보물 제586호이다.
지정된 유물들은 <속대학혹문> 1책,<대학장구보유> 1책,
<봉선잡의> 1책,<중용구경연의> 9책,<진수팔규> 1책 등 모두 13책이다.
특히 <중용구경연의>는 정조가 친필로 쓴 ‘제선정회재속대학혹문권수’를
붙이고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하였다.
경주 독락당 담장에 나무로 만든 살창이 멋있다.
밖으로 자계천의 흐르는 물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창이다.
회재 선생의 자연과 순응하고자하는 아이디어가 참 대단하다.
이전인(李全仁)은 회재의 서자였다.
그는 7년간 유배지를 따라와 여러 시중을 들며
관서문답이란 책까지 쓸 수 있게 아버지 회재를
옆에서 극진히 모셨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는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마 이전인은 회재를
대감이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평안도 강계에서 그 추운 날 아버지 회재의 주검을
대나무로 고향 경주까지 등짐으로 지구 운구하고
시묘살이까지 한 친자식 이전인이다.
회재는 이전인에게 파격적으로 재산을 남겨주기 위해
먼저 둘째 부인 석씨에게 재산을 주고 아들에게도
자신이 일군 재산인 독락당을 물려줄 뜻을 양자 이응인과
정실부인 박씨에게 설득해 동의를 얻어낼 수 있게 한다.
회재 종가는 서저 이전인의 옥산파와 양자 이응인의 양동파로 나뉜다.
이전인은 회재의 학문과 사상을 밖으로널리 알리고 유품을 보관하는데
열심히 그리고 총력을 쏟았다.그는 서자의 높은 벽을 넘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
서자 이전인을 위한 장산서원이 안강읍에 들어섰다.
이전인은 그 장산서원에 배향되는, 조선사회 최대 기적을 이룬 인물이다.
독락당의 건물들은 더없이 아늑하고 조용해 낙향 후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스승 삼아 학문에 열중하고자한 회재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마음이 홀로 서야 이(理)가 생긴다'던 그의 말처럼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혼자가 아니라 "자신과 학문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선택한 혼자" 이니,
오히려 그의 집 독락당 그 이름처럼 홀로 있으되 즐거움이 넘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