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보(梁山甫)는 16세기 호남의 사림(士林)를 이끈 처사다.
스승 정암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한양을 떠나
낙향을 해서 '은둔의 둥지'를 튼 전남 담양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글의 참뜻을 쉽게 알았으며 원대한 꿈을 품었다.
아버지 양사원은 숙부 양맹촌에게 아들 양산보를 조광조에게 데리고 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 양사원은 15세 어린 나의 양산보의 손을 이끌고
한양 조광조에게 데려갔다. 정암 조광조의 문하생이 된다.
조광조는 어린 양산보를 문하로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소학> 책을 주면서 공부하도록 했다.
조광조 자신도 스승 김굉필에게서 책 <소학>부터 학문을 익혔다.<소학>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필독서였다.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도덕의 원리가 집약되어 있는 수신서(修身書)였다.
그는 조광조에게서 도학과 절의를 이념으로 한 선비정신을 배우고 익히고 수신(修身)할 수 있었다.
양산보는 조광조 문하에 들어간 지 2년 만에현량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합격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가는 데는 탈락한다. 종종은 양산보에게 종이 30권을
하사하면서 위로한다.
그해 1519년 기묘년 겨울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던 수많은 개혁 추진 인재들이
죽임당하는 기묘사화다. 양팽손은 기묘사화 후 낙향했다.그리고 곧장 능주로
조광조를 찾았다.
“어떻게 여기를 오셨는가?”
조광조는 자신을 찾아온 양팽손에게 물었다. 아무도 조광조를 찾는 이가 없었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위로하고 그가 숨질 때까지함께 교유했다. 그리고 조광조를 위해
상소문도 지어 올렸다. 조광조가 끝내 사사되었다.그는 큰 아들 양응기를 시켜
중조산에 묻도록 했다. 그 묘아래 작은 띠 집을 지어 문인과 제자들이 제를 올리도록 했다.
양산보도 숙부 양팽손과 같은 길을 택했다.
그도 스승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를 갈 때 한양을 떠나 고향 담양으로 낙향했다.
그는 스승 조광조는 곁에서 모시고 싶어 유배지 능주에서 가까운 낙향을 해 기회를
보았으나 스승은 곧 사사되었다.그는 기묘년에 끔찍한 사화를 당하고 스승까지
잃게 되어 원통함과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외부와는 단절하고 고향에 작은 정자를 마련하고 학문에만 정진한다.
그의 소쇄원의 삶이다. 훗날 사림이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을 때
양산보는 수차례 자신에 대한 천거를 사양했다.
산과 물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명사들과
선비의 도리를 연구하는 일에 정진했다.
사람들은 그를 ‘소쇄처사’라 부른다.
여기서 양산보는 성리학자들을 만나 교류한다.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규암 송인수 미암 유희춘 청련 이후백 등
호남 유생의 간판급 스타들이 양산보와 학문을 같이 한 인물이다.
양산보는 소쇄(瀟灑)처사다,
瀟는 빗소리 소 또는 물 맑고 깊을 소다.
灑는 물 뿌릴 쇄 또는 깨끗할 쇄다.
소쇄는 맑고 깨끗하고 시원함이다.
양산보는 그 소쇄(瀟灑)한 삶을 살았다.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 갠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光風)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은(霽月)'
양산보의 삶이었다.
양산보는 문장 한 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송순 임억령 김인후 유희춘 기대승
고경명 김성원 정철 백광훈 등 모두 학문과
시문에 있어 걸출한 인물들이 그를 찾아
조선성리학을 논하고 당대 최고의 걸출한
문장을 남겼다.
그 소쇄처사 양산보가 세상을 떴을 때, 고경명이 제문을 짓고
김인후 송순 임억령, 양응정, 기대승이 만장을 지었다.
기라성 같은 호남사림의 명문장가들이 글로써 애도했다.
송시열도 그의 행장을 지었다.
남계 박세채가 묘갈문을 지었다.
그 묘갈문을 간추려 옮긴다.
양공의 휘는 산보이고, 자는 언진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단군 때에 세 명의 신인이 한라산에 내려왔는데, 그중 맏아들이
처음으로 성을 양씨(良氏)로 하였다가 양(梁)으로 고쳤으며
이 분이 실제로 공의 선조라고 한다.
뒤에 휘 순(洵)과 준(峻)이란 분이 있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와
신라 말기와 고려 때에 벼슬하여 한 시대의 명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휘 사위(思渭)에 이르러서는 조선조에 들어와 추천으로 교도(敎導)가 되었다.
증조부 휘 발(潑)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부 휘 윤신은 부사직이며,
아버지 휘 사원은 호가 창암인데 숨겨진 덕이 있어 조정에서 추천으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처음으로 창평현 창암촌에 살았다.
어머니는 신평 송씨이다.
처음에 공이 조 문정공의 문하에 있을 적에 간혹 청송 성수침 형제와
마침 같이 배웠는데 공을 한번 보고서 그전에 교유하던 사람같이
여기며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두려운 친구이다.”라고 하였다.
김 문정공은 항상 형의 예로 섬기며 매번 공의 정밀하게 사색하고
현묘하게 합쳐지는 학문을 칭송하면서 읊고 감탄하며 찬미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급문(及門)의 선비로 존재 기대승 같은 이는 말하기를,
“소쇄옹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안으로는 엄격하여 바라보면
무릎이 꿇어짐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초토사(招討使) 고경명은 말하기를,
“공의 사람 됨됨이는 위대하고 성품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바른 선비라고 칭송한다.”고 하였다.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은 말하기를,
“소쇄옹과 서로 마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을 후련하게 하여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그 후배들의 사모하고
우러름이 또한 이와 같았다.
박세채는 그의 명(銘)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심은 보존하고 지식이 지극하기를 바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았으며,
온 집안에 그림과 글씨를 써 붙여 굽어보나 올려다보나 오묘한 이치와
합하게 하였도다. 효도와 우애를 행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따랐으며
몸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펴서 진술함이 있었도다.
세상이 되풀이하여 변하였으나 초연하게 누됨이 없었으니,
향당과 여리에서는 덕을 흠모하였고 선비들은 생각을 더하게 되었도다.
산과 못에다 비유하면 빛나는 구슬과 온화한 옥같이 광채를 덮을 수 없으며
상서로움을 숨길 수 없도다. 울창한 이현에는 소나무도 있고 가래나무도 있도다.
이에 시를 드러내어 영원토록 후세에 보이도다.
소쇄처사 양산보는 유언을 남겼다.
“소쇄원 역시 남에게 팔지 말되 원래 그대로의 원형을 보존하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중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호남의 거유 기대승과 고경명은 소쇄처사 양산보를 이렇게 추모했다.
“소쇄옹은 겉으로는 여간 부드러운 것 같으나 내심은 강직한 사람이며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였다.” -고봉 기대승
“어릴 때 소쇄옹을 알았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얼마나
못생겼는가 알게 됐다” -고경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