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고시 수석합격”, “명문 S대 수석합격”,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 “최연소 대학교수”, “최연소 국회의원”….
언론지면에서 뉴스 기사의 제목으로 흔히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최연소(最年少)란 단어 속에는 “나이가 어릴 수록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고 “수석 합격”이란 말 속에는 1등에 대한 절대적인 선호가 내재되어 있다. 1등만이 존재감이 있을 뿐 2등은 여전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패배자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급기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은 유독 최연소와 1등에 목을 맨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무시당하고 최고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이러한 나이와 속도에 대한 강박과 1등 지향주의 속에서 우리는 숨돌릴 겨를 없이 끊임없는 경쟁을 하며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간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가. 미국의 언론에서는 “수석합격자”와 “최연소 ___”와 같은 기사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기네스 북에 오른 기록들을 소재로 하는 기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런 말들은 일상생활에서조차 사용되지 않으며 적절한 영어 표현을 찾기 조차 어렵다. 왜 그럴까?
필자는 미국의 학교 현장을 교사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가까이에서 경험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학생들의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 즉,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며 줄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적표에는 등수를 기재하는 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적표에는 학생들의 능력과 퍼포먼스에 대해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적 평가가 기술된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기 학급에서 누가 1등인지 누가 꼴찌인지 모른다. 대학 입학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몇 등인지를 거론하지 않는다. 합격/불합격만을 학생들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성적으로 서열을 매기지 않으니 대학입학사정에서도 “수석합격자”가 한국처럼 언론에서 기사화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왜 그렇게 “속도”와 “1등”에 집착하는 것일까? 빨리 가는 것은 곧 앞서 가는 것이라는 등식이 거기에 깔려 있는 듯하다. 선행학습(이것 역시 영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이 당연시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고정관념이 아닌가 한다. 뭐든지 남보다 먼저 성취하면 이득이 커지고 성공의 가능성도 많았던 시대였기에, 학습에서도 진도에 대한 맹목적인 강박이 생겨났으리라.
그렇게 무조건 남보다 앞서 가야 한다는 강박이 경제 성장의 기적을 이루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여기서 초래된 많은 부작용을 보고 있다. 교육에서도 그 폐해가 여러 가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재니 신동이니 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들의 이후 성장 과정에서 그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는 명문고를 다니고 있는 수학 영재 김모 양이 하버드대와 스탠포드대 두 학교로부터 선례 없는 특별 대우를 받으며 동시 입학 제안을 받았다고 입학통지서를 보여 주며 언론에 인터뷰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스토리는 이 학생에 의해 만들어진 허위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단순히 한 사람의 부도덕한 행동으로 치부하며 비난할 수 만은 없다. 우리는 이 학생의 일탈 행동 속에서 가족과 주위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감과 두려움에서 오는 고통과 절규를 보아야 한다.
“천재소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송유근 군의 경우를 보자. 8세에 대학에 입학하고 17세가 된 지금 그는 이미 박사과정 학생으로 천문학 분야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자신보다 10살 이상인 형과 누나들 사이에 섞여, 또래 친구들과는 어울릴 기회도 별로 없이 공부에만 집중해온 송유근 군이 최근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11살의 나이로 돌아간다면 또래 친구들과 그 나이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것들을 마음껏 하며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수학영재로 떠오른 어린 동생들에게 “또래들과 더 많이 놀고 수학과 과학만이 아닌 다양한 공부를 하고 체력을 키우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몇몇 특출난 천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1985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14개의 명문대에 입학한 한국인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 (이승기, 컬럼비아 박사논문)에 의하면, 이들 중 44%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한 것으로 드러났다. 학업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왜 그렇게 많이 중도에 포기하는가? 스스로 세운 장기적인 인생 목표의 부재와 힘든 상황에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의 결핍이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분석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지식을 허겁지겁 채워 넣으며 경쟁시키는 데만 골몰하면, 건강한 정서발달과 인격의 형성을 소홀히 하게 된다. 한 가지만을 위해 매진하느라,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여러 가지를 잃게 되는 것이다. 정서적인 힘, 관계 맺기와 소통 능력, 도덕성, 변화에 대한 적응력, 자신의 인생항로를 스스로 선택하는 안목과 의지…. 그 공백은 어른이 되어서 결정적인 결함으로 드러나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나 좌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성장은 안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신비로운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일정한 시간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닦달하지 말고 묵묵히 응시하면서 기다려줄 때 내면의 힘은 서서히 형성된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살피면서 아이들이 내면이 꽉 찬 알곡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여유와 인내를 우리는 가져야 한다. 시인 예이츠는 교육의 핵심을 한 마디로 간파했다.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