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아린 손끝을 호호 불며 김장김치를 준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입춘이네요. 수능 치르고 맘이 여유로운 딸아이와 오랜만에 마주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하얀 배춧잎에 빨간 고춧가루 양념 옷을 입힐 때 다섯 식구 외에 누군가와 나누어 먹게 되겠지 생각은 했었지요. 그런데 한겨울 추위 지나고 보니 참 여러 사람이랑 나누어 먹었네요.
딸과 함께 앉아 10년을 친한 이웃으로 지내다 봄에 이사 가신 이웃집 식구들 얘기를 하며 김장김치 양념을 바르는데 마침 그 분이 인근에 볼 일 보려 오셨다가 들르셨길래 김치 한 상자 챙겨드렸습니다. 생업인 조청 만드시는 때라 바쁘실 것 같아서 드렸더니 댁의 김장은 담그셨는데 이듬해 봄에 오빠가 옆에 집을 지을 계획이라 김치가 많이 먹힐 것 같다 하셨습니다.
덧붙이는 말씀이 댁의 김장김치도 이번엔 동물성을 적게 쓰시고 담그셨대요. 마을에서 떠나시기 전 자신과 아이들 보던 책을 한 보따리 주셨는데 그 속에는 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민하고 공부하던 내용들이 담긴 책들이 많아 10년 세월을 먼저 걸어가신 그 분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대안문화공간 품&페다고지 식구들에게도, 시골마을에 귀한 어린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이사 온 이웃에게도, 저로 인해 현미채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며 조용히 실천하려 애쓰시는 분께도, 10년 이상 고혈압 약을 드시던 남편과 <황성수 박사의 힐링 스테이>에 다녀오시고 난 뒤 시골서 대가족이 함께 담근 (젓갈)김장김치를 손도 못 대고 계신다는 분께도,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 애쓰시다 심한 몸살을 앓으신 자매님께도, 음식솜씨가 참 좋으신데도 처음으로 맡은 시민단체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 김장김치도 못 담그시고 앓아누우셨다는 분께도, 늘 더불어 사는 교육을 고민하시며 활동하시는 공간의 새해맞이 음식을 채식떡국으로 끓이신 분께도, 현미채식의 인연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현미채식을 알리는 일을 같이 하며 또래 아이를 같이 키우는 분께도, 빨간 김장김치는 겨우내 땅 속 항아리에서 천천히 익어가면서 간간이 집 바깥으로 날아갔습니다.
자신의 집을 <채식평화연대>의 사랑방으로 내놓은 분의 김치통이 생각났습니다.
전화드리니 겸손하신 그 분은 괜찮다 하셨는데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 밥 해 먹이느라 김치통이 훌쩍 비워진 듯 했습니다.
그 분 댁에서 교육모임이 있는 날 추운 겨울 아침에 같이 가는 친구랑 정말 열심히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보태서 숨이 목에 차 오르도록 헉헉거리며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할 분들과 나누어 먹으려 땅 속 항아리에서 꺼낸 잘 익은 김장 김치를 김치통에 가득 채워 둘이서 들고 달리는데 기차시간이 정말 정말 아슬아슬 했어요. 숨이 가쁘게 뛰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김치통을 버리고 뛰어야 하나, 기차삯 날리고 다음기차를 타야 하나, 조금 가볍게 들고 올 걸 하는 후회하면서 다행히 우리는 기차를 탈 수 있었고, 기차는 우리가 타고 난 나서 몇 초 뒤에 출발했지요.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몸이 약해서 체육시간이나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면 늘 뒤에서 숨 가쁘게 달리는 아이였고, 어른이 돼서도 한 때는 추운 겨울을 넘기려면 심하게 앓아 누웠지만 이젠 무거운 김치통을 들고 뛰어도 건강한 40대 아줌마가 됐습니다. 제가 담은 빨간 김장김치 드신 분들도 저처럼 현미채식의 힘으로 건강하게 겨울 보내고 새 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2015.2.4 울산저널
첫댓글 김치 덕분에 튼튾한 몸으로 봄맞이가 수월하리라 여겨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