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홍로 (감홍로주)
1. 품목명
감홍로 (감홍로주)
2. 품목에 대한 설명*
감홍로는 좁쌀 누룩과 멥쌀 고두밥으로 술을 빚어 두 번 증류해 일정기간 숙성시킨 뒤 8가지 약재를 넣고 침출시켜 다시 1년~ 5년을 숙성시켜 완성한다. 용안육, 정향, 진피, 방풍, 계피, 생강, 감초, 지초가 들어간다. 이중 용안육, 계피, 감초에서 나는 단맛의 감(甘), 지초가 내는 붉은 빛의 홍(紅)을 써 술의 이름이 감홍로이다. 궁중에서 발생한 병이 약을 끓일 만큼의 시간도 없이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일 때 약 대신 급히 감홍로를 처방하곤 했다. 본래 대다수의 술은 체온을 높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내장 기관을 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감홍로의 경우 약재의 성분이 내장기관을 따뜻하게 만들어 막혀있던 기와 혈을 뚫어준다. 한의학에서는 내장기관에 암이 생기는 것은 냉한 기운이 뭉쳐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러한 이유로 감홍로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기도 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2010년 5월에 발간된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에서 감홍로주 제조에 사용하는 약재 침출액들의 항산화 작용에 대해 다루었을 만큼 약리작용이 뛰어난 술이라고 할 수 있다.
3. 품목의 역사
감홍로는 관서지방에서 생산되고, 그 맛이 달고(甘) 붉은 빛깔(紅)을 띄는 이슬같은 술(露)이라는 뜻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의 특산명주로 알려져 왔던 까닭에 ‘관서 감홍로’ 또는 ‘평양 감홍로’로도 불린다. 관서 감홍로는 조선 중기 1787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고사십이집]을 비롯하여 1827년 [임원십육지], 1849년 [동국세시기] 등의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관서 감홍로는 세 번 고아서 만든 소주를 이용하여 만든 만큼 맛이 매우 달고 맹렬하며, 술 빛깔이 연지와 같아 홍로주 가운데서도 으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감홍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밀주단속기를 거치면서 맥이 끊겼다가 한말의 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육당 최남선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의 3대 명주’ 가운데 관서지방의 감홍로를 으뜸으로 꼽고, 다음으로 전라도의 이강고와 죽력고를 소개하며 제조방법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술에는 격이 있는데, 로(露), 고(膏), 춘(春), 주(酒) 의 순서이다. 조선 3대 명주 중 로(露)의 격을 지닌 것은 감홍로가 유일하다.
4. 전통적인 생산 지역*
원래는 평양(관서)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술이다. 평양에서 양조장을 하다가 6.25전쟁 때 월남한 故 포암(浦巖) 이경찬선생에 의해 전해지게 되었다. 선생은 1986년 86-가호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막내딸 이원(利園) 이기숙이 재현하여 2012년 10월 농립축산식품부에서 명인43호로 지정되었다.
5. 현재 생산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 - 마을의 이름 등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윗가마울길 ·149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야산으로 둘러싸여있고
6.25때는 파주읍에 주민들이 이곳에 피난을 하여 살았다고 하며 수온이 일정하여 겨울에도 빨래를 하였으며, 물이 좋기로 알려진 지역이다.
6. 대략적인 생산량에 대해 적어주세요.
연 생산량은 전체를 가동하면 약 12톤을 생산할 수 있다.
7.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정 소비용으로만 생산되고 있습니까?
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 약간의 주류코너, 몇몇 음식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8. 어떤 이유로 이 품목이나 품종이 소멸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감홍로의 주원료는 우리나라 토종 우리밀로 만든 누룩과 메조, 찰수수, 쌀이다. 현재는 메조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지 않아 국내산 메조를 안정적으로 수급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대중적인 술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감홍로 생산을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판매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9. 개인적인 신청 동기
술의 발전은 한 나라의 식문화와도 관련이 있으며 이에 대한 복원을 통하여 우리선조들의 음식문화를 접하고자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과거의 주류문화의 단절은 곧 음식문화의 단절이며, 이는 선조들의 문화를 후대에게 알려야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일환으로 우리나라의 고급술에 대한 보급을 하고자 한다.
제도권에서의 보호가 아닌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지켜야할 우리의 유산이며 후대에 물려 줘야 할 우리의 문화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