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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덫을 피하라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꿈은 그의 생명과 같습니다. 그 꿈은 그의 미래입니다. 그 꿈은 그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그 꿈은 그 사람의 인생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그 꿈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안에 꿈틀거리는 꿈을 보면 그 사람의 내일을 알 수 있습니다. 꿈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꿈의 성격 또한 중요합니다. 꿈의 성격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꿈꾸는 사람에게 가장 혹독한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도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질병이나 실패의 순간도 아닙니다. 꿈꾸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시험은 바로 유혹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도 유혹 앞에 쓰러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인간은 역경의 순간이 아니라 번영의 순간에 약합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역경은 인간으로서 견뎌 내기 힘든 상대이다. 그러나 역경을 견뎌 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유혹 앞에 넘어지기 쉽다는 것을 표현해 준 말입니다. 인간은 인정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반면, 인정받은 후 찾아오는 유혹 앞에는 약합니다.
요셉에게 찾아온 혹독한 시험은 바로 포티파르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유혹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유혹은 무섭습니다. 또한 유혹은 한 순간 극복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은 인생의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보통 20대와 30대의 젊은 날에 찾아오는 유혹은 성적인 유혹입니다. 40대에 찾아오는 유혹은 명예라는 유혹입니다. 성취를 통해서 명예를 얻고 싶어하는 유혹입니다. 50대 이후에 찾아오는 유혹은 물질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안전하게 보내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이런 유혹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유혹의 손길은 사탄의 마수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를 통해서 이루게 될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꾸는 한 사람은 마치 원자력 발전소와 같습니다. 그에게는 엄청난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자력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위력이 있습니다.
1986년 4월 26일에 구 소련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키예프市(현 우크라이나 수도) 북구 피리파티市에 있는 체르노빌 원전의 제4원자로에서 갑자기 열출력이 상승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1995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고 피폭자는 약 80만 명으로 추정되며 오염 지역은 총 16만k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약 4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900만 명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특히 벨로루시의 경우 전국토의 3분의 1이 오염되어 사태 수습에만 국가 예산의 20%를 쏟아 부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원자력 폭발 사고로 피해를 입은 주토미르주(州)에서는 머리가 두 개 달린 염소나 다리가 여덟 개인 망아지 등, 이상 가축에 대한 보고가 이 사건 발생 2년 만에 2,000여 건이나 되었습니다. 신생아의 기형아 발생률은 사고 전에 비해 2.5배나 늘어났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잘못 폭발되었을 때는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힘이 조절되고 통제될 때 그것은 생산적으로 나타나지만, 통제되지 않고 방치되거나 폭발해 버릴 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훌륭한 꿈을 가진 사람은 원자력 발전소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요하게 공격하는 유혹을 잘 이길 수 있는 저력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참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혹을 정복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유혹을 정복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유혹의 성격에 따라, 싸우고 정복해야 할 것이 있고 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에게 찾아온 유혹은 싸우거나 정복해야 할 유혹이 아니라 피해야 할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이런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하느님의 꿈을 가진 사람은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요셉에게 찾아온 유혹은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7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며 ‘나와 함께 자요!’ 하고 말하였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냈습니다. 여자의 다정하고 매혹적인 눈길이 요셉을 괴롭혔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너무나 잘 생겼기 때문입니다.
39장 6절을 보면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요셉의 손에 내맡기고, 그가 있는 한 자기가 먹는 음식밖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로 팔려 왔지만 유능했습니다. 포티파르의 신임을 받을 만큼 탁월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보통 사람과 다른 거룩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그녀에게 와서 아첨하고 주위를 맴돌 때에도 요셉에게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더욱 매력을 느꼈습니다. 요셉에게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적인 용모 또한 준수했습니다. 리처드 범브란트가 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는, 유다의 <세퍼 이에라밀>이라는 책에 나오는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이집트의 내로라 하는 귀부인들이 이 잘 생긴 히브리 청년의 소문을 듣고 그를 직접 보기 위하여 포티파르의 집으로 갔다. 포티파르의 부인은 손님들에게 각각 사과 한 개와 사과를 깎을 칼을 한 자루씩 주었다. 요셉이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모습에 반한 귀부인들은 모두 정신이 팔려 손가락을 칼에 베이고 말았다. 그러자 포티파르의 부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그를 한 순간만 보고도 매혹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당신들은 그를 매일같이 보는 내가 어째서 이토록 정열로 불타오르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잘 생기고 매혹적인 요셉, 이집트의 귀부인들이 모두 정신이 팔려 손가락을 베일 만큼 준수한 요셉에게 찾아온 이 유혹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가 한 번만 유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는 날마다 졸랐지만, 요셉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곁에 눕지도 그와 함께 있지도 않았다.”
한 번의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날마다 요셉을 졸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결정적인 날이 왔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그가 일을 보러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하인들이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때 그 여자가 요셉의 옷을 붙잡고 ‘나와 함께 자요!’ 하고 말하자, 요셉은 자기 옷을 그의 손에 버려둔 채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가장 무서운 유혹의 날은 그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찾아왔습니다. 그날 포티파르의 아내는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셉을 붙잡았습니다. 그 격렬한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가 있었을까요? 이런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 요셉에게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요셉은 젊고 성욕이 왕성한 나이입니다. 인간이 가진 욕망 가운데 성적 욕망보다 강한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지속적인 출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잘못 보이면 앞으로의 진로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에는 그의 미래가 아득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연상의 여자의 따뜻함과 매력은 과히 고통스러우리만큼 요셉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주인집 여자들의 성적인 타락상을 보았을 때, 이것은 너무나 평범한 유혹 중에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여자의 경우에 동정이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왕성한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 아내를 두고 포티파르가 자주 집을 비운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요셉에게 이 여자는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소홀히 하는 여자에 대한 어떤 책임감마저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어떤 이야기와 흡사한 내용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꿈은 곧 사명이다
그런데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이런 유혹을 이기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가진 꿈 때문입니다. 그의 꿈은 단순히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꿈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가족과 그 당시 전세계를 구원해야 할 꿈이었습니다. 한 순간의 정욕에 자신을 내어 던질 수 없는 엄청난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꿈을 생각했습니다. 그 꿈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꿈의 힘이 한 여자의 유혹보다 더 강렬했습니다. 하느님의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한 열망이 이 여자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단식하고 굶주리셨을 때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사탄의 유혹을 어떻게 이기실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지신 선명한 꿈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와 부활의 꿈이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는 자신만의 실패가 아니라 전인류의 실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아셨던 것입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유혹보다 강렬한 하느님의 꿈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꿈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유혹을 이기는 길을 가르쳐 주려면 먼저 꿈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모세의 가슴에 그의 어머니는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집트의 궁전에서도 자신의 몸을 방탕과 타락에 내어 던지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도 무수히 많은 유혹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과 행사가 능한 인물로 이집트의 모든 학문을 익혔다는 것은 그가 값싼 쾌락에 자신을 방치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8절에는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문란해지지만 율법을 지키는 이는 행복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언이라는 말은 비전이라는 말입니다. 비전이 없고 꿈이 없으면 사람들이 문란해진다는 것입니다. 문란해진다는 것은 망할 짓을 골라서 한다는 뜻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찾아 하는 것이 아니라 ‘망할 짓’을 골라서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 민족, 한 백성이 망하고 흥함은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시한 쾌락에 넘어가지 말라
사람이 크다는 것은 꿈이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꿈이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꿈이 큰 사람들은 자신을 지킬 줄 압니다. 시시한 쾌락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시시한 쾌락만큼 인간을 작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모세도, 요셉도 인간을 작게 만드는 시시한 쾌락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성적 욕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큰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꿈을 갖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의 모습 속에서 무절제하게 자신을 방치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꿈을 소유하십시오. 위대한 야망을 가지십시오. 하느님께 그 꿈을 받으십시오. 처음에는 우리가 꿈을 꾸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꿈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문란해지지만
율법을 지키는 이는 행복하다.”(잠언 29,18)
아멘.
아~~멘.
용인센타(축구숙소)에 가면.
잠을 자면 꿈을 꾸고,
훈련을 하면 꿈을 이룬다..
글귀가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기도로 시작하기를
요즘에 와서야 훈이랑 작은 노력이나마 시도하고 있습니다.
절실하게 드리게 되는...기도가..꿈을 이룰수 있도록,
습관화 하기를...
아멘.
아멘.
아~~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유혹보다 강렬한 하느님의 꿈을 갖는 것입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