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왕조였다.
백성은 양반과 상놈으로 구분되는 신분구조를 갖고 있었다.
양반은 족보에 의해서 문중을 관리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그들은 가문의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으며 왕에게 가문의 딸들을 시집보내서 왕권을 확보하였다.
이런 관계는 세도정치로 나아가 당파싸움으로 확대되었으며 급기야 조선멸망의 촉매가 되었던 거다.
이런 조선의 전통은 가톨릭에서도 이어졌다.
경북 봉화 문수산 중턱의 우곡리 골짜기 깊은 곳에 가면 농은 홍유한을 수계자를 모신 우곡성지가 있다.
성지성당 이름도 매우 특이한 ‘칠극(七克)성당’이다.
홍유한은 풍산 홍씨 양반가문의 후손이며 정조임금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으로 뼈대 있는 양반가문이다.
홍유한은 서울에서 홍창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워졌다.
그는 과거의 길에 나아가지 않고 실학자 성호 이익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하다가 <천중실의> <칠극>등 서학을 접하고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유교와 불교에서 감히 만날 수 없는 심오한 진리를 발견하고 천주학에 빠져들었다.
그는 스스로 칠극의 삶을 살고자 고향 예산으로 가서 천주교 수계생활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칠극신앙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다.
비록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 서적만 읽고 난후 천주교 신앙을 지켜나갔던 거다.
7의 배수를 주일로 지켰으며 금식과 금육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지도 않았으며
30세가 지나면서 육욕을 근절하고 정절의 덕을 실천하며 살았단다.
홀로 수계생활을 살다간 홍유한의 집안에는 훗날 13명의 순교자를 배출하는 그리스도 가문이 되었다.
조선시대 전통인 가문을 중시한 이유가 초기 가톨릭에서도 이어진 거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유한의 인척 홍정호, 재종 조카 홍낙민 루카,
강완숙 골롬바, 아들 홍필주 필립보,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이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홍낙민의 셋째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며느리 심조이 바르바나, 손자 두 살배기 홍베드로는 옥사하였다.
홍낙민의 손자 홍병주 베드로, 홍병주 바오로는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홍낙민의 손자 홍봉주 토마스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증손자 홍베드로도 전주 초록바위에서 수장되었다.
4대 박해기간에 홍유한의 집안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순교의 꽃을 피웠던 거다.
다른 가문처럼 세도정치에 혈안이 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순교가문으로 대를 이어갔던 거다.
인간의 힘으로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순교가문으로 거듭났다.
이제까지 홍류한 가문의 순교사를 정리해 보았다.
홍류한은 어떻게 천주학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을까?
‘칠극’ 은 예수회 신부 판토하가 지은 가톨릭수덕서 <칠극대전>의 줄임말이다.
절제의 덕목으로 구성되었으며 유교 이념과 일치하는 면이 많아 양반들이 많이 받아들였다.
‘칠극’은 일곱 가지 죄의 뿌리인 칠죄종(七罪宗)를 이겨내고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교리서로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교만, 시기와 질투, 분노, 음란함, 인색함, 탐욕, 게으름을 이겨내고
복음적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게 바로 칠극이다.
홍유한은 비록 세례 받은 신자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모든 사람에게 유학보다 큰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거다.
이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종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인 거다.
우곡성지 성당은 그래서 칠극성당으로 봉헌되었다.
십자가의 길 대신에 ‘칠극의 길’ 을 걸으며 신자가 지켜야할 도를 깨우쳐야 한다.
성당에 들어가서 칠극을 묵상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제대 오른쪽에 걸어놓은 가족순교자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순교신앙을 나의 일상의 삶속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곡성지는 칠극을 가르치는 특별한 성지로 우뚝 서 있다.
<2019. 5. 14 우곡 칠극성지 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