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는 가톨릭성지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가슴아파해야 할까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성지가 많이 조성되어 있다면 박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증거이다.
당시에는 가톨릭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첩첩산중으로 피신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고 신앙생활을 이어갔지만 진출입이 원활하지 못한 곳은 찾아갈 수조차 없었던 거다.
그러다보니 강원도 일원은 신자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원주교구 성지는 양주 관아 터, 황사영 알렉시오 묘, 남종상 요한 성인가족묘역,
정약종 생가마을 마재성지, 풍수원성당, 용소막성당, 배론성지 등 일곱 곳에 불과하다.
서슬이 퍼렇든 박해를 떠올린다면 어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박해시절 관아는 무엇을 하던 곳인가?
관아는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곳으로 현감, 목사 등이 파견되어 전권을 행사했던 관청건물이다.
동헌과 향교 건물이 함께 있는 전형적인 유교식 배치이다.
박해시절 관아와 수령의 역할은 천주교 신자를 잡아들여 치명시킨 곳이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사전조치 사후보고체계로 이루어졌다.
민중을 보듬던 곳이 아니라 광란의 칼춤을 추던 곳이다.
당시 관아 터는 천주교 순교사에서 중요한 순교성지로 다시 태어난 거다.
원주교구에서 순교성지로는 양주관아 터 하나밖에 없다.
용인, 포천 등에서 숨어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던 다섯 분이
병인박해 때 양주관아로 잡혀와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 곳이다.
김윤호요한, 권마르타, 김마리아,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박서방 등이 양주목관아 다리 밑에서 순교하였다.
의정부교구에서는 역사적 사료를 찾아서
당시 치명 터를 발굴하였으며 현재 부지를 매입 성지조성을 추진 중에 있다.
바로 인근에서는 양주시에서 옛 관아 터를 복원하여 관광지화 하였다.
성지 부지 뒤편에는 ‘전학후묘’ 구조의 향교건물이 현존하며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당시 천주교신자들의 치명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현재는 조립식 구조물이 성지미사 및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비록 박해시대 순교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그 현장에 와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었기에
그들은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스스로 내어 놓았을까 라는 물음에 답을 찾아야 할 거다.
창조주로서 인간 생명을 주관하며 한계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
그 분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오직 내가 의탁할 분,
나의 성채 보호자 되시는 분임을 고백해야 할 거다.
그래서 오늘도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일 게다.
<2018. 10. 21 양주 관아 터 순례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