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성지에 가면 성당으로 올라가는 문 좌측에 3대순교자상이 있다.
3대가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남종삼 요한의 가족을 상징하는 순교비이다.
성 남종삼 요한은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양자로 입적되었다.
남상교 순교자는 정약용의 실학을 이어받아 농학자의 길을 걸으며 충주목사를 지냈다.
뛰어난 총명함으로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철종 때는 승지에 올라 왕을 보필하였다.
‘승지’ 라는 벼슬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승정원의 정 3품 당상관의 높은 벼슬이다.
한국 순교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과도 친교를 가질 정도였다.
러시아가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남종삼을 통해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서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남종삼의 의도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생각이었던 거다.
훗날 일이 잘못되어 대원군은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남종삼 요한도 병인박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4년 요한 바오로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공주에서, 아들 남규희는 전주 초록바위에서,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는 창녕현 유베지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한 ‘한국 순교자의 진주’ 이다.
3대 순교의 피는 이어져 현재 성인의 증손자 남재현 신부는 인천교구에서,
외증손 최우주 신부는 서울대교구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 길음동 묘지 남종삼 성인 가족묘를 찾았다.
큰 벼슬길에 올라 세속의 영광을 누리던
그가 모든 것 버리고 순교의 길에 나섰던 성인의 순교신앙을 묵상했다.
먹고살기에만 급급하여 지방하급관리로서 살아온 나의 삶의 궤적이 부끄러울 뿐이다.
환갑이 되어 뒤늦은 후회를 한들 다 지나간 일이다.
남은 여생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서 성지순례 다니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세례 초심으로 돌아가리라.
<2018. 10. 21 길음동 남종삼 성인 묘역 앞에서>
첫댓글 큰아들은 전주초록 바위에서
홍봉주의 아들 홍베드로와 함께 치명한
명희이며
규희는 둘째 아들로
성인 묘의 우측에 부인과 함께 함장되어
계십니다.
그 분의 아들은 남상철프란치스코의
묘는 바로 아래에 묘셔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