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6일 광화문광장 특설무대에서 집전된 시복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외 123위를 복자품에 올렸다.
조선시대 4대 박해 기간 순교한 순교자들의 공적들을 집대성하여 순교 자료를 갖추어
교황청 시복성에 제출하여 오랜 심사 끝에 하느님의 종, 가경자, 복자 단계를 거쳐서 성인품에 올리고 있다.
조선시대 워낙에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여 이 과정은 한국순교사위원회에서 지속적으로 발굴 제출될 것이다.
경남 마산교구에서는 세 분이 시복되었다.
구한선 타대오, 정찬문 안토니오, 윤봉문 요셉이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양반가문의 자제였다.
헌데 부인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권면하여 나이 40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진주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1867년 1월 25일 45세로 참수되었다.
사촌들이 머리 없는 시신을 돌려받아서 몰래 장사를 지냈으나 훗날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였단다.
후한이 두려워 매장하듯이 묘를 급히 만들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묘지를 잃어버린 거다.
양반의 권세는 조선시대에 대단함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정찬문 안토니오가 체포되자 문중에서는 재심을 요청하는 등 양반만이 할 수 있는 재심제도를 활용하였던 거다.
허나 정찬문 요셉은 양반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그의 인생을 맡아줄 거라는 믿음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순교했던 거다.
그의 부인 윤씨는 애기를 업고 옥바라지를 하면서 배교하지 않도록 격려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쓰도록 이끈 참 신앙인이었다.
1946년 문산성당 서정도 벨라도 신부는 정찬문 안토니오의 무두묘를 찾던 중
어느 무촌리 중촌에 사는 텃골 김씨 할머니가 ‘사학하다 목 잘려 죽은 무덤’이라고 알고 있는
허유고개의 무덤을 알려주었다. 신자들과 정씨 문중 사람들의 노력으로 무덤을 찾았단다.
순교성지로 성역화하고 성지성당을 건축하였지만 행사 때만 미사가 봉헌되는 잠자는 성당이 된 게 마음 아팠다.
묘지 위에 세운 성모상은 보편적 인식을 뛰어 넘은 석고상이다.
S자로 뒤 틀어진 몸매에 젖무덤을 들어낸 채 슬퍼하는 성모상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성당 뒤편 한적한 곳에 세워둔 십자가상이 특별했다.
사방팔방으로 벋친 가시관을 쓴 채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해골모습의 얼굴이 가슴을 쥐어짜낸다.
손발이 다 무디어져 한센병 환자처럼 표현한 예수 고난상이
부활의 영광 이전에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라고 다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