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위민넷(https://goo.gl/KwnSTC)]
‘몇 평인가?’ 집에 대한 질문은 주로 이렇게 시작한다. 다음으로는 ‘어느 동네인가?’, ‘얼마인가?’, ‘앞으로 오를 가망이 있는가?’ 등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질문의 주인은 어른들이다. 집에 대한 아이들의 질문은 어떠할까? 아이들에게 이사를 가게 될 것이라 말하자 아이들은 이리 묻는다. ‘놀이터 있어요?’, ‘이사 가면 뛰어도 되요?’, ‘친구들이 많을까요?’, ‘개를 길러도 돼요?’, ‘안가면 안돼요?’ 같은 사건을 두고 어른과 아이의 질문은 참으로 다르다. 어른들은 ‘경제적 가치’로, 그리고 아이들은 ‘정서적 가치’로 집을 묻는다.
아이와 어른의 질문은 왜 다를까? 관심사가 달라서이다. 같은 것을 두고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갖기에 서로의 질문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적 관심이 현실인 어른에게 집은 냉철한 눈을 갖게 하고, 정서적 관심이 시급한 아이들의 눈은 오로지 호기심이다. 집의 가치와 향후 전망에 대한 분석, 그리고 개를 기를 수 있는 지에 대한 초미의 관심, 이 둘은 항상 대치한다. 모두를 채울 수 없기에 전망이 좋은 자리에 개는 없고, 평수가 만족스런 곳에서 뛸 수는 없다.
그러나 상관없다. 개가 없어도 아이는 괜찮다. 뛰지 못해도 괜찮다. 아빠가 최고의 놀이 파트너가 되어주고, 엄마의 힘찬 눈빛이 아이의 심장을 뛰게 하면 괜찮다. 아이가 정작 원하는 것은 그것이니 말이다. 부모도 괜찮다. 평수가 작아도 괜찮고, 집값이 좀 떨어져도 괜찮다. 아이가 놀 놀이터가 있고, 이사 온지 이틀째 파자마파티를 하겠다고 동네 애들을 데려오는 아이의 넉살이 있어 괜찮다.
다른 질문을 한다는 것은 다른 관심사, 다른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찮은 이유는 같은 관심사, 같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족은 겉과 속이 다른, 그러나 정작 다른 겉과 같은 속을 가진 사람들이다. 환경적인 요구는 다르나 심정적 요구는 같기 때문이다.
아이는 기대한다. ‘이사를 가서 아빠 직장이 가까워지면 아빠는 더 빨리 퇴근을 할까? 개를 사주지는 않겠지만 아빠 목말을 한 번 더 탈 수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리고 아빠도 기대한다. ‘이사를 가서 아이가 속상해하지 않을까? 놀이터가 더 넓은 곳이니 더 신나게 뛸 수 있을 거야’ 엄마도 기대한다. ‘직장이 가까우니 남편은 덜 피곤할거고 아이도 아빠를 더 자주 보니 좋아할 거야. 둘째를 가져볼까?’
가족은 늘 다툰다. 삐지고 울고 소리 지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한다.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가족사(家族事)다. 우리 집만 그리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산다. 그럭저럭 살만하다 생각한다면 그 집은 행복한 거다. 별일 없으면 행복한 것이다. 행복이 뭐 그리 대단한가? 다투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울고 소리 지르고 방문을 닫아버려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리 살면서도 행복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다퉈도 사과하는 사람이 있고, 울고 소리를 지르면 위로하는 사람이 있고,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감정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밥 먹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겉은 울고 소리 지르고 단절을 예고하는 그 외향과 달리 사과하고 위로하고 기다리는 내향이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게 다인 세상, 들리는 게 전부인 세상이다. 서로 다른 질문을 하는 가족들에게 보이는 게 다인가? 들리는 게 다인가?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가족의 막을 통과하면 안보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린다.
가족은 무엇으로 살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 사는가? 아니다. 가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능력자들이다. 보이는 심장과 혈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정과 혈맹을 무의식적으로 읽는 사람들이다. 들리는 귀와 고막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맘을 듣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가족은 신의 눈과 우주의 귀를 가진 셈이다. 이런 눈, 이런 귀는 어떻게 갖게 되는 것일까?
행간을 읽는 눈과 틈새를 듣는 귀 덕분이다. 작은 변화를 읽어내는 눈이 아이의 소망을 읽고 뒤돌아 맺힌 눈물을 귀로 듣는 귀가 아이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이혜인 수녀가 말했던 ‘눈 멀어야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건 종교적 선언이 아니라 사랑의 전언이 분명하다.
어른과 아이의 질문이 다르다. 들리는 말은 팩트(fact)이나 이해하는 말은 해석(解釋)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해석으로 산다. 그리고 가족은 그 해석의 집결체이다. 사랑에 눈먼 해석이, 포옹에 귀먹은 해석이 가족을 살게 한다. 개가 갖고 싶다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기꺼이 목말을 태워주고, 뛰어도 되냐는 아들의 말에 넓은 놀이터를 보여주는 엄마의 힘찬 팔뚝이 바로 해석이다. 가족은 다른 겉, 같은 속으로 산다. 겉과 속이 달라야 가족이다. 그게 가족이다. 가족이야말로 겉을 속으로, 속을 다시 겉으로 해석하는 사랑의 해석자들이다. 그게 바로 가족의 다른 이름이다.
※위 콘텐츠는 위민넷에 기고되는 전문가 칼럼으로 여성가족부 블로그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출처:여성가족부 플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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