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중에서 ‘호피(Hopi) 인디언들’은 북미 대륙 평원은 걸쳐 남서부 애리조나 사막에 정착을 하면서 농경생활을 했던 부족입니다. 척박한 사막 환경에 정착한 그들에게 농사를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단연 ‘물’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농사 짓기에 알맞지 않은 곳에서의 농사를 위한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었는데, 바로 ‘기우제’였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고 비를 기다리던 인디언들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부족들이 모두 모여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호피 인디언들의 기우제는 성공률 100%. 다시 말하면,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네. 바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우제, 그 제사의 효력이 매번 즉시 발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몇날며칠이든, 심지어 몇 달이든,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오랜 기다림과 간절함 덕분에 결국 ‘모두 성공했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논리에 젖어있는 우리는, 그들의 이 행동이 ‘미련해’ 보이거나 ‘우스갯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아무 의미없이 허무맹랑한 시간을 보내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믿음을 가지고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기우제를 지냈고, 그 시간동안 틈틈이 뿌린 씨를 들여다보며 돌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온전히 ‘그곳에’ 두었고, 비가 왔을 때. 그 비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소중함을 간직하고, 모처럼 내리는 비에 정성을 다하여 농사에 더 몰두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 우리 기도 또한 ‘꾸준함’과 ‘근면성실함’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순간순간 바라는 것들을 내뱉고, 그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또다시 너무 쉽게 하느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의 굉장한 ‘교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모범 중에 모범으로 공경하는 성모님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겸손’하게, 그리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하느님께 기도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성모 마리아를 두고 ‘은총이 가득하신 이’라고 이미 칭송을 했지만, 인간 마리아의 삶은 결코 우리 생각처럼 행복 가득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천사와 예언자가 일러준 예고는 ‘알 수 없는 내용’ 투성이였고, 때로 비수처럼 꽂히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인간 마리아는 분명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마리아의 기도를 들어준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평탄하고 인간적으로 행복한 일들을 펼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늘 고통과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기까지’, 성모 마리아가 취했던 태도를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마리아는 (...)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루카 1,2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신앙 지침, 즉,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기도에 대한 가르침 주시는데, 특별한 기도의 비법이나, 하느님과 소통하는 신비한 기술을 언급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마저 돌려 세우는 끈질긴 과부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고유한 신학적 문체, 즉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향하는 논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전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은 끈질긴 청을 외면하지 않는데, ‘의로우신’ 하느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복음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표현하는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는 문장을 번역한 그리스어 ‘ἐκδικέω(엑디케오)’는 “복수하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맥락을 살펴보면 과부는 자기 이득을 좀 더 챙겨달라고 청한 것도 아니고, 불의한 것을 청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억울하게 당한 자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올바로 잡아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마저도 끊임없는 ‘의로운’ 청 앞에서는 ‘바로 잡을 수’ 밖에 없는데, ‘의로운’ 하느님께서는 성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며(본기도) 의롭게 살다가 겪는 억울한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청하는 기도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각해보아야 하는 그 이유는, 첫째 잘못된 것 또는 의롭지 않는 것을 청했거나, 둘째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거나, 셋째 하느님의 방법으로 ‘이미’ 응답해 주셨지만,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광야에 들어선 뒤 닥친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실망하고 맙니다. 여기에 그들은 하느님께 정의를 세워달라고 청하기보다, 과거의 삶을 그리워하며 이집트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그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제1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은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는 하느님이 아니심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지만 당신이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계속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계속 반항을 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40년을 헤매게 됩니다.
우리도 삶이 어렵거나 힘들 때마다 하느님께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기보다 그런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청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달라고 간청하며, 그런 청을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을 외면하곤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의롭게’ 기도할 것을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화답송이 이야기하듯이 우리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모든 삶의 인도자이시고, 모든 것을 바로 세워주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점차 참고 견디는 것을 바보스러운 우둔함이라고 여기고, 오직 순간적인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남을 판단하고, 쉽게 분노하며, 우울증과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바라는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느끼고,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에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의로운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희망만 있으면 행복의 싹은 그곳에서 움튼다.”고 한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말처럼, 우리가 진정 하느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바로 그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하는 한 주간, 성실히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소중한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우리의 삶을, ‘의로운’ 하느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