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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운동이 왜 평화운동인가?
[이 글은 1911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인종학술회의 – La Kongreso de Rasoj -”의 연설을 위해 자멘호프 박사가 쓴 보고 논문이다.]
아래 기사 내용은 본 교재를 만들 당시(서기1988년)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사 여러분!
여러분이 참석하고 있는 이 회의의 명칭이 「인종학술회의」임에도 불구하고 종족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게 된 점을 우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기서 인종문제와 종족문제를 함께 다루게 된 것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크기의 차이는 있을망정 인류를 나눈 인종학적 분류란 점은 같기 때문입니다. 종족 간에도 인종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소 큰 단위에서만 같은 관계가 유지되며, 그러한 인간집단이 인종인지 종족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한다는 것이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여러 인종과 종족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최대의 불행입니다. 만일 이 인종학술회의가 종족 간의 미움과 싸움을 없앤다거나 최소한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열렸던 어떠한 회의보다 가장 의의 있는 회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의가 그러한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연기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릴 이론적 추론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한 곳을 꿰매면 다른 한 곳이 터지는 헛된 타협안을 찾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현존하는 악(惡)의 근본원인을 연구, 발견하고 그 원인을 없애거나 최소한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족간의 미움을 만들어 내는 주된, 아니면 유일할 지도 모르는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정치적 환경, 즉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인간집단들의 경쟁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온 사람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온 사람이나, 같은 독일계 사람들끼리는 어떤 본질적 미움을 느끼지 않으며, 여러 나라에서 태어나 각기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독일계 사람들끼리는 서로 공감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일인과 슬라브인들은 서로 이방인처럼 쳐다보게 되며 - 그들의 인간성이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지 못할 경우 -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족간의 미움을 만드는 것이 국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경쟁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큰일 났다! 어떤 종족이 우리를 경제적으로 집어 삼키려한다. 그 종족을 미워하고, 기를 꺾고, 맞아 싸우자!”는 외침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맹목적 애국심(Ŝovinismo)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외침이 무의미한 것임을 알 것이며, 우리가 다른 종족을 미워하는 것은 상대편이 우리를 경제적으로 집어 삼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상대편을 미워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경제적 두려움이 진짜 미움의 원인이라면 각국의 모든 도시와 지방에서도 똑같이 서로 미워하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수백만의 러시아 빈민들이 수백만의 중국 빈민들을 미워하는 반면 자신들을 억누르는 러시아의 압제자들을 외국인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처럼 기꺼이 피를 흘리는 이유가 정말 경제적 경쟁 때문이란 말입니까 ?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동족의 '주먹'이 자기들에게 저지른 죄악보다 더 큰 죄악을 자기가 죽이고 있는 중국 군인들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러시아 군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제적 이유 때문에 종족간의 미움이 발생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간의 거리, 지리나 기후 또는 여타 환경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리나 지역적인 기후환경의 차이는 인간의 외모나 성격에 약간의 차이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바로 종족을 만들거나 종족간의 미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의 옛 이름 : 옮긴이 주)와 오데싸(흑해 연안의 소련 항구 도시: 옮긴이 주; 현 우크라이나의 도시) 사람들이나 키에브(소련령 우크라이나의 수도: 옮긴이 주)와 크라스노쟈르스크(몽고 위 쪽 소련의 도시 : 옮긴이 주) 사람들이 갖는 지리적, 지역적 특성의 차이는 베를린과 바르샤바 사람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러나 전자의 시민들 사이에는 충분한 동족애와 형제애가 유지되는 반면 베를린과 바르샤바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상호 이질감과 광신적인 종족간의 미움이 팽배합니다. 따라서 종족간의 미움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지리적, 기후적 환경의 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각기 다른 인종이나 종족들이 서로 다른 신체적 특성을 가졌다는 것이 그 원인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종족들은 자신들끼리도 피부 색상이 다르고, 키나 체형 또는 특별한 부분이 아주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같은 종족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종족들, 즉 보통의 프랑스 사람과 보통의 일본 사람을 비교할 때보다 훨씬 더 큰 신체적 차이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민족의 구성원을 그러한 신체적 형태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 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러한 집단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종족과 우리의 신체적 차이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거의 분간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는 생리적으로 종족의 혼혈을 장려하는 무의식적인 자연 법칙 때문에 우리들 자신이 직접 유혹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한 인종에 대해서만은 본질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 인종은 흑인종입니다. 그러나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그 혐오감의 원인이란 전혀 다른데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 백인과 마주치는 흑인들은 미개인이었고 오래 전에는 노예들이었으며, 아직도 대부분의 흑인들은 오래된 미개인과 노예의 특질과 과보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흑인들은 오래전에 개화되고 자유인이 된 우리를 순전히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종적 혐오감처럼 보이는)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감정은 사실상 대대로 내려온 귀족이 거친 시골 사람들의 비이성적이고 품위 없는 행동에서 느끼는 불쾌감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과거에 가졌던 미개인과 노예의 모습이 흑인들로부터 사라지고 권위 있는 문화수준에 도달해 그들 가운데서 위대한 인물들이 나오게 되면 틀림없이 오늘날의 질시와 혐오감은 존경심으로 뒤바뀌게 될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의 검은 피부와 두터운 입술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민족자체 안에서 훨씬 싫어하는 신체적 조건을 갖는 사람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신체적 조건이 불쾌하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회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체적 모습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거나 박해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체적 모습의 차이가 종족간 미움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각 종족의 정신적 차이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종족의 뇌와 심장은 본질적으로 똑 같습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정신적 차이는 종족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이거나 단지 그 개인이나 종족이 살고 있는 주위환경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는 사람의 정신과 유럽 사람의 정신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종족의 특성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문명이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억압이나 미움대신 높은 인간의 문명을 주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정신은 우리들의 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문명을 모두 빼앗아 버린다면 우리들의 정신도 아프리카 식인종들의 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종족간의 정신적 차이가 아니라 같은 종족 안에서도 계급이나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다소 큰 차이를 보이는 교양의 차이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갖가지 정신이 어떤 종족만이 갖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방법으로 교육을 받은 모든 유럽의 종족들은 똑 같은 정신을 소유하게 됩니다. 좀 더 좋은 예로서 개화된 고대 이집트 사람과 개화된 오늘날의 일본사람, 그리고 개화된 유럽 사람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종족일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인종, 전혀 다른 대륙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 시간적, 공간적, 종교적 환경을 별도로 했을 경우 - 그 아프리카사람, 아시아사람, 유럽 사람의 정신은 똑같지 않을까요? 50 년 전에는 일본사람과 유럽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였다고 하지만 그때에도 전혀 종족인 일본인 과학자의 정신과 유럽 과학자의 정신은 똑같지 않았을까요?
만일 한 인간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약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거나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것은 어떤 특정 종족의 정신 때문이 아니라 그 집단이 살고 있는 특수한 주위환경 때문입니다. 속박 속에서 교육을 받은 집단은 자유 속에서 교육을 받은 집단처럼 용감하고 자유스런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울 수 없었던 집단은 많이 배운 집단처럼 넓고 숭고한 식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상업을 통해서만 돈을 버는 집단은 항상 땅과 자연 속에서 사는 집단과 같은 품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집단생활의 주변 환경을 바꾸어 보십시오. 그러면 (역사를 통해서 이미 자주 보았듯이) 훗날 ㄱ집단은 ㄴ집단의 품성을 갖게 될 것이며, ㄴ집단은 ㄱ집단의 품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천성적인 정신의 차이가 한 종족이나 종족간의 이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각 종족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그 원인이 되겠습니까? 사실 얼핏 보기에는 각 종족의 기원이 다르다는 사실이 종족간의 미움에 대한 가장 주요한 원인처럼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혈통’을 사랑하고 타인보다는 자기 형제나 가족을 더 사랑합니다. 내적으로는 끌어당기고 외적으로는 밀어내는 가족분산이란 그 기원의 측면에서 볼 때 좀 더 넓은 규모의 가족에 불과한 종족과 인종의 전형적인 상호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종족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같은 혈족'이라던가 '형제'라고 부른다고 해도, 종족간의 관계에서 가족과 종족의 유사성이나 기원의 종요성이란 표면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을 대단히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같은 가족들은 같은 부모나 같은 할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같은 종족들은 수백 수천 년 전 같은 선조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유추하여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단지 언어나 종교의 동질성에 기초를 둔 가설이거나 또는 대부분의 경우 틀린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각 민족은 뒤섞여 왔기 때문에 아무도(대대로 내려오는 몇몇 계급, 즉 인도의 카스트나 히브리의 사제나 레위족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선조가 어느 종족에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먼 옛날 같은 한 종족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으며, 반면에 (종교적으로 폐쇄적인 계급을 제외하고) 자기의 기원을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기들의 선조가 지금 자기가 속해있는 종족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카람진(Karamzin), 푸시킨(Puŝikin), 레르몬토프(Lermontov)가 그들의 선조가 비러시아인이라고 해서 순수한 러시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원이나 이어 받은 피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 전혀 다른 바탕을 갖는 우리들의 감정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빈 말이요 구실일 뿐입니다 .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종족적 미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추측해 낸 그들의 선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말과 종교가 우리에겐 전혀 낯설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부모와 가족이 쓰는 말이 러시아어이고, 종교가 러시아종교 (희랍정교)라면 (그 기원이 어떻고 어디서 살고 어떤 신체적 외모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러시아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선조가 분명히 순수한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러시아종교를 믿지 않는 경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모두가 러시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어떤 민족의 언어나 종교 권에서 태어나지 않고 뒤에 가서 그 언어와 종교를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그의 종족적 감정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단번에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은 이제 충분히 그리고 영원히 그 종족에 동화될 것입니다.
물론 다른 언어나 종교를 새로 받아들인 사람이 사는 곳이 (지리학적으로나 인종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동화과정은 늦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반드시 동화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앙아프리카에 (엊그제의 일이 아니라 이미 100년 전부터 학식 있는 사람들만이 아닌, 전 국민이) 엉터리가 아닌 완전히 순수한 프랑스어를 하고 대다수 본국 프랑스인들과 같은 종교와 풍속을 가진 민족이 살고 있다고 할 때 프랑스의 민족주의자나 극단적인 애국자들이 그들을 참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할까요? 지리적으로나 인종학적으로 까다로울수록 동화과정은 훨씬 빨리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모든 헝가리 사람이 쓰는 말을 영원히 잊어버리고 독일 사람들이 쓰는 말만 하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삼사십년 뒤 이 두 종족 사이에 어떤 차이나 종족적 미움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한 종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모든 히브리 사람들이 히브리 종교를 영원히 버리고 그들을 둘러 싼 주위 민족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삼사십년 뒤 히브리인과 비 히브리인간의 어떤 차이가 있겠으며, 히브리 문제나 유태인 배척주의(antisemitismo) 또는 유태인 호의주의(filosemitismo)가 존재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종 때문에 소위 말하는 모든 히브리 인종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 종족의 기원의 차이는 종족간 미움을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단지 구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종족간의 분열과 미움을 만드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인종적 특성, 기후, 물려받은 핏줄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유사 과학적 이론이 있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가운데 종족과 종족을 가로막는 진짜 벽은 언어와 종교입니다.
특히 언어란 어떤 말에서는 '언어'와 '종족'이 완전히 동의어로 쓰일 정도로 종족간의 이질화에 크게, 거의 독보적인 역할을 합니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똑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외에도 같은 문학(말과 글자로 된), 같은 교육, 같은 이상, 같은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를 같게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그 두 사람이 같은 '신'을 믿는다면 같은 축제, 같은 습속, 같은 전통, 같은 생활방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은 서로 형제처럼 느끼게 될 것이며 같은 종족에 속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만일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풍습과 생활방식을 갖는다면 그들은 서로 이방인을 피하듯 할 것이며, 벙어리나 미개인들처럼 서로 피하고, 또 어둠속에 숨겨진 것은 모두 본능적으로 불신하듯, 서로를 불신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호 이해가 가능하며, 바로 이점 때문에 이런 면에 교양이 아주 높은 계층에서는 종족간의 장벽이 그다지 두껍지 않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중교의 본질을 알고 또 옳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진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민족을 미워하는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이해라는 것은 두 사람을 실제로 결합시키기 위해 두 사람 모두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가 두 사람 사이에 장벽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서로 내적 믿음(지성인들의 이 믿음은 개인적인 일이지 종족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의 교리에 대하여 아량을 베풀어야 하며 여러 가지 외적 종교생활이 그들을 갈라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에서 검토해 본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원칙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종족간의 분열과 미움은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종교를 가졌을 때만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류가 실제로 단일 종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각 나라와 종족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화, 즉 정치적, 당파적, 경제적, 계급적 불화들이 완전히 끝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모든 불화 가운데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종족간의 불화는 말끔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인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전 인류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종교를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를 불행하게 한 것은 종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상호간섭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다른 종족과 접촉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내가 쓰는 언어나 풍습을 강요하게 되며, 상대방 또한 상대방의 언어나 풍습을 나에게 강요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종족간의 미움은 이러한 슬픈 강요의 불가피성이 없어질 때에만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각 가족이 가지고 있는 풍습이나 전통과 함께 없어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다른 가족에게 강요하지 않고, 가족 밖의 일에 대해서는 모두 법과 국가의 중립적 풍습이 있어 그것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평화를 위해서도 각 종족이 없어져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종족의 외적 무기를 없애고 자기 종족의 특수성을 서로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생활방식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취해야 할 생활방식이란 무엇일까요 ?
자기 언어와 종교집단 안에서는 자기 종족의 언어와 종교를 간직하면서 모든 다른 종족과의 관계에서는 중립적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중립적 인간의 윤리, 풍속 그리고 생활방식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종교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그 목표에 도달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종교문제는 본인의 연구논문의 주제가 아니고, 아주 특수하고 광범위한 언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둘째, 종교란 본질적으로 종족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며 인간문명이 한 부분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 민족들의 종교적 통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체 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아주 지엽적인 주위 환경들이 그러한 종교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사라질 것입니다. 즉 각국에서 어떤 한 두 종교가 갖는 특권이 없어지므로 해서 누구나 고통 받는 동족을 배반하지 않고도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종교를 바꿀 수 있을 때나, 누구나 자기 양심에 비추어 거짓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를 가진 종교가 존재하게 되면 전 인류는 아주 빠른 속도로 같은 종교생활을 유지할 겁니다.
그 이외에도 종교통합이란 언어통합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립적인 언어의 기초위에서 의사소통을 하면 할수록 동등하고 비민족적인 언어로 문학과 사상과 이상을 통일하면 할수록, 종교에서도 더욱 빨리 동화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통합이나 종족간 미움의 소멸과 같은 문제들은 모두 한 가지 문제로 귀착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종족과 인종간의 우정과 정의라는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에게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그 일이란,
종족 간에 일어나는 모든 접촉에서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공동의 것인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로써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립 어를 써서 이야기 합시다. 그렇게 되면 종족간의 미움과 멸시는 사라질 것입니다. 자기 적국이나 거대한 이웃나라의 언어로 된 문화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든 종족들은 굴욕감을 주지 않는 중립어로 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비문화 종족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중립어의 존재는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고,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사용자와 풍부하고 강력하게 성장하는 문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립 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 말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한 주인입니다. 다만 사용자들에게 특별히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언어를 깨트리거나 모두의 동의가 없이는 변화시킬 수 없도록 요구할 뿐입니다. 이 중립 어는 이미 존재하고 잘 활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에서 말씀드린 역할, 즉 인간들을 형제로 만들고 종족간의 모든 미움의 벽을 깨뜨리는 역할을 완전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이 언어가 모든 인종에게 얼마나 평등하게 얼마나 훌륭하게 쓰이고 있는가를 알고 싶은 분은 몇 년 간 철도가 훌륭하게 이용된 후에야 그 철도의 가능성에 대한 위대한 논문을 쓰는 그런 학자처럼 행동하지는 마십시오. 이론적 토론만 계속하거나 인종적 특수성에 대한 거짓 학문의 빈말만 늘어놓지 말고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매년 열고 있는 여러 가지 국제대회를 하나 골라서 가 보십시오. 거기에서 종족간의 완전한 화합을 볼 것이며, 중립적이고 그 누구도 멸시하지 않는 기초위에 선 상호관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종족간의 모든 장벽과 이질감을 없애버리고 잊게 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귀로 직접 들으실 것입니다. 거기 가서 보면 종족간의 궁극적인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을 더 이상 찾을 필요는 없으며, 굉장한 어려움과 불확실한 결과를 가지고 새로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확실하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사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미 존재한 중립 어를 돕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무리 절충된 완화수단이나 기민한 정치조약이라 할지라도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구상에 에스페란토주의(esperantismo)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여러 종족들이 중립적 기초위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습관을 갖게 될 것이며, 그들 모두가 같은 마음, 같은 정신, 같은 이상, 같은 고통과 아픔을 가졌고 종족간의 미움이란 모두 야만시대의 유물일 뿐이라는 것을 더욱 강렬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중립적 기반에서, 오로지 그 기반에서만이 모든 종족, 모든 시대의 예언가들이 꿈꾸던 미래의 통일된 그야말로 인간적인 인류가 조금씩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인종학술회의에 참석하신 회원 여러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현실적인 결실을 갖고자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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