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오지 / 최순덕
손녀의 앞니에 구멍이 뚫렸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손녀가 ‘앞니 빠진 개오지’가 되었다. 이빨에 김을 붙이고 관객을 웃기던 코메디가 생각나서 피식 웃는다. 나도 모르게 ‘앞니 빠진 개오지’라고 놀려먹었더니 ‘개오지’를 알 리 없는 부녀가 처음 듣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궁금증의 화살이 먼저 내게로 향한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말이기에 추억 속에 답이 있으려나, 노래를 부르며 앞니 빠진 친구를 놀려 먹었던 추억 속으로 달려간다.
개오지의 뜻을 알기나 했을까. 뜻도 모르고 무작정 친구를 놀려먹기도 하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던 흑백 사진 같은 추억이 되살아난다. 그런데 그 노랫말 한 줄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해 봐도 뭔가 개운치가 않다. 분명히 노랫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추억은 가물거리고 노래의 뒷부분은 오리무중이다. 검색에 더딘 내게 여전히 힘들어도 인터넷 선생을 찾을 수밖에.
개오지란 개호주의 경상도 방언으로 새끼 호랑이를 말한단다.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오는 입학 적령기의 아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뜻 모르고 불렀던 개오지가 새끼 호랑이였다니 새삼 놀랍지만, 여기까지밖에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입안이 간질간질해진다.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가슴만 답답해진다. 생각나지 않는 뒷부분의 노랫말을 옹알거리다가 다음 날 산을 오르며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또래의 추억 속에 답이 있었다.
추억을 더듬어 한 가닥씩 노랫말을 찾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노랫말이 솔솔 쏟아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구전동요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앞니 빠진 개오지/ 우물가에 가지 마라/ 붕어 새끼 놀린다.”
무릎을 쳤다. 속이 후련해진다. 발길을 멈추고 함께 불러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신이 난다. 힘을 합쳐 노랫말을 찾아낸 기쁨이 더해져서 고함을 지르니 온 산이 들썩거린다. 조용한 숲속에서 늙수그레한 여인들이 빙 둘러서서 발을 굴리며 소리를 질러대니 낙엽도 바스락 서걱서걱 장단을 맞춘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노랫말을 다시 음미해 본다.
호랑이는 우리의 전래동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친근한 동물이었다. 나쁜 인간을 벌주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때로는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짐승이지만 익살스럽고 순진한 캐릭터로 늘 인간들 곁에 있었다. 아무리 무서운 호랑이도 새끼는 고양이처럼 귀여웠을 터이다. 장차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무서운 호랑이가 될지라도 새끼니까 무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니까지 빠졌으니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우물가의 작은 개천에 사는 붕어 새끼도 놀릴 만큼 약해진 몰골로 우물가에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 것이다. 새끼호랑이가 놀림을 받을까 봐 우물가에 가지 말라고 염려해주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노랫말이 아닐 수 없다. 어리지만 호랑이의 품격을 지키라는 우정어린 충고다. 자라서 나라의 기둥이 될 아이를 미리 호랑이로 인정해 준 배려가 정답다.
고향이 경북인 한 친구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앞니 빠진 개오지/ 새미질에 가지 마라/ 빈대한테 뺨 맞는다.”
동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이 그려진다. 샘이 있는 길가에 온갖 동물들이 목을 축이러 모여든다. 비록 새끼지만 호랑이가 나타났으니 흠칫 놀라 비켜서는데 입을 벌려 물을 마시려는 새끼 호랑이를 보니 앞니가 빠졌구나. 우습고 무서울 게 없다. 동물의 털 속에 빌붙어서 딸려온 작은 빈대가 톡 튀어나와 맺혔던 한을 푸는지 뺨을 때린다. 빈대에게 맞아봤자 아프기야 하겠냐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그런 우스운 모습으로 새미질에 가지 말라고 어린 호랑이를 위해주는 마음이 얼마나 다정한가.
개오지 덕분에 젖니 뽑던 추억에 젖는다. 흔들리는 앞니를 실로 묶어놓고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잠시 한눈팔게 해놓고 가볍게 이마를 탁! 치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니가 어머니의 손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실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있는 앞니를 보고 아프지는 않지만 얼떨떨하고 허전해서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새롭다. 초가지붕을 향해 서서 ‘까치야 까치야 헌 니 줄게 새 이 다오’ 하면서 휙 던져버리는 일까지 흔들리는 앞니를 빼는 일은 일종의 작은 성인식처럼 진지했다. 개오지라 놀리는 친구들의 놀림도 싫지 않았고 왠지 뿌듯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개오지라는 놀림이 전혀 거부감이 없었던 기억이다. 누구나 한 번씩 개오지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친구를 괴롭히는 오늘날의 왕따와는 차원이 달랐다.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솟아 나는 성장을 축하하는 의미가 담긴 축가였는지 모른다. 이빨이 흔들리면 음식물 씹기도 힘들고 아프기도 해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종의 작은 성장통을 겪으며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웃었던 노래였다. 얼른 새 이빨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는 우습고 귀여운 노래다.
지금 다시 불러도 유쾌한 전래동요 개오지가 왜 요즘 아이들 입에서 사라졌을까. 어울려 뛰놀던 골목도, 함께 놀던 동무도 없어졌으니 누가 개오지가 된들 관심이 있기나 하겠는가. 함께 어울려 놀기보다는 온갖 종류의 장난감과 컴퓨터와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들이다. 놀이문화가 바뀌고 일찍부터 경쟁 사회를 익혀야 하는 아이들에게 ‘개오지’ 노랫말은 당연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아니겠는가. 성인 가요를 너무나 멋들어지게 부르는 노래 신동을 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한다. 꿈과 희망이 담긴 동요를 불러야 할 아이들이 구성진 어른의 노래를 부르다니 노래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왠지 안타까워진다.
손녀는 젖니 보관용 작은 통에 젖니를 넣어 목걸이처럼 목에 건다. 젖니를 잘 보관하라고 일러주면서 손녀와 함께 개오지 노래를 불러본다.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라도 작은 젖니를 볼 때마다 자신이 그렇게 작은 존재였음을 상기하고 늘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할머니의 소망을 함께 담아 뚜껑을 힘주어 닫는다. 젖니 통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재미있는 손녀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이상한 노랫말의 ‘개오지’이다. 추억을 소환하는 노랫말이 은근슬쩍 중독성이 있는지 입안에서 돌돌 구른다. 추억의 옛날 과자를 먹는 듯, 입 안 가득 달콤함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