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게 없어도 ‘사’자 들어간 직업이 농사여
최만정
한 발 떼기 어렵다. 발을 떼서 옮기려면 다른 발이 빠지지 않아 몸의 균형이 자꾸 무너진다. 논물에 코 박을 판이다. 못자리 모판은 그 전과 달리 논흙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떼기가 수월해서 다행이다. 모판을 떼서 트랙터에 연결된 칸칸이 짐칸에 싣는 일. 밑 칸은 그래도 나은데 키 보다 높은 칸에 넣을 땐 모판에서 떨어지는 흙탕물이 가슴께로 타고 흐른다. 햇볕을 받아 약간 미지근한 물이라 그나마 견딜만하다. 모판은 점점 무거워지고 허리는 아프고 발은 수렁에 빠진 듯 움직이기 더 어려워진다. 10시도 안 됐는데 햇볕은 어찌나 뜨거운지 머리털을 벗겨낼 지경이다.
농삿일 싫어하던 어릴 때 생각이 스친다. 못자리에서 모를 쪄내려면 참 힘들었다. 모 중간을 잡고 뽑으면 잎새 중간이 뜯겨져 나가 혼나기도 했다. 몇 웅큼씩 묶은 모를 논 중간 중간에 가져다 놓다 보면 거머리가 붙은 줄도 몰랐다. 거머리를 떼어내면 종아리에 빨간 피가 흘렀다. 못줄 빨간 매듭에 맞춰 모를 심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논이 한 필지도 안 되어 좋아했다. 그 때만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학교에서 모내기하러 나가기도 했다. 모를 잘 심었든 못 심었든 학교에서 모내기 나가면 아이들과 장난도 치고 나름 힘든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 집 일은 왜 그리 힘만 들던지. 모내기철에는 누에도 치는 때라, 뽕잎도 따러 다녀야 했다. 가끔 일하기 싫어 마루에 책보를 던져놓고 바로 내빼기도 했다. 도망간 날은 혼날까봐 저녁 밥 때도 지나 어둑어둑할 즈음에야 집에 들어갔다.
그 후로 도시로 이사하고 몇 년 전까지 농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릴 때 힘들었던 기억이 농삿일을 멀리하게 했다. 보리밥에 질려 얼마 전까지도 보리밥을 먹지 않으려 했던 것 만큼이나. 농민회 분들이 가끔 농활에 초청해도 별로 내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시골로 이사하면서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추나 아욱이라도 심어 먹자고 시작하다 보니 생명이 커가는 모습이 좋았다. 꽤 큰 밭을 빌려 고생하기도 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농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동네 분들 농사를 가끔 거들어 주면 일 년에 쌀 말이나 감자 몇 상자 돌아온다. 아마 노후를 대비하려는 얄팍한 계산도 한몫 거들어 농사에 조금씩 더 빠져드는지 모르겠다.
트랙터에서 이앙기로 모판을 옮기고 비료도 몇 푸대 털어 넣고 살충제도 통에 담는다. 이앙기가 지나는 데로 모들이 줄지어 나란히 심어진다. 모 하나 심어질 때마다 그 밑에 비료도 조금씩 파묻힌다. 살충제는 몇 줄에 한 번씩 뿌려진다. 이앙기는 장정 몇 사람 일을 쉬지도 않고 잘 한다. 아니, 김씨 아저씨 이앙기 운전 솜씨가 예술이다. 경지정리가 안 되어 굽은 논, 작은 논에 구석구석 심는다. 어쩌다 물에 모들이 뜬 곳은 다시 심기도 한다. 최대한 모 떼울 일을 줄이기 위해서다. 나는 이앙기 운전하는 김씨 아저씨 뒤에 타서 모판을 기계틀에 공급하고 가끔 논에 내려 돌을 치우거나 기계에 끼인 모 뭉치를 떼어내는 일을 한다. 별로 어렵지 않지만 흔들리는 이앙기 위에서 중심을 잡고 움직이느라 발에 힘이 들어간다. 두 마지기 정도 심으면 모가 떨어져서 논 밖에 나와 모판을 싣고 다시 논으로 들어간다. 대여섯 번 하니 점심시간이다. 음식점에서 배달된 김치찌개며 콩국수가 동네 정자나무 밑에 푸짐하게 차려진다.
“한 잔 더 해. 힘쓰려면 막걸리 몇 잔은 마셔야지.”
“아까 새참에 몇 잔 먹으니까 확 올라오던데요. 더 힘들어요.”
“한 시간 정도 쉬면서 한잠 자고 나가면 되니까 마셔.”
역시 농삿일에는 막걸리가 어울린다. 좀 빼다가 몇 잔 더 먹는다. 하지만 한병 넘게 마시니까 날이 더워서 그런지 어질어질하다.
“좌부리는 5배출 하는 집이 많은가요?”
“여기는 모래땅이 많아서 4배출이 보통이지 뭐.”
“도지는 얼마나 주는가요?”
“한 마지기당 쌀 한가마 주고 이것저것 들어가는 것 빼면 남는 게 쌀 한가마 반도 안 되는 것 같지 아마.”
도지농사를 2백 마지기 이상 짓는 김씨 아저씨는 내가 묻는 말에 지레 짐작하고 수지타산까지 미리 대답한다. 사실 궁금하던 차라 더 자세히 묻고 김씨 아저씨는 대충 대답한다. 논 한 마지기는 씨로 벼 한말 정도 뿌리는 넓이 정도, 이 동네는 200평이라고. 한 마지기당 쌀 네 가마 나오면 4배출, 다섯 가마 먹으면 5배출이라 한다. 요즘은 농촌에 노인분들이 대부분이고 주로 농기계를 쓰기 때문에 직접 못자리하고 모심고 벼 베는 일을 하는 농가는 별로 없다. 논농사 짓는다고 해야 물꼬나 보고 한 두 번 농약이나 비료를 주는 정도다. 아니면 아예 영농회사나 농기계 있는 집에 도지를 받고 넘긴다.
쓸 만한 트랙터는 1억 원이 훨씬 넘고 부대기계를 달면 1억 4~5천만 원이다. 김씨 아저씨 이앙기는 8조식이라 4천만 원이고 벼 베는 콤바인은 8천만 원이 넘는다. 트랙터는 10년 넘게 쓰지만 이앙기나 콤바인은 5년 넘으면 고장나기 시작해서 돈 먹는 하마라고. 비료 값, 농약 값도 만만치 않으니 못자리, 모심기, 벼베기 가격이 높아질 밖에. 쌀 한가마니에 15만 원 내외이니, 기계가지고 농사를 지어 도시노동자 임금을 따라가려면 수백 마지기는 지어야 한다. 기계가 없는 집은 자기 논 20마지기 지어야 도시노동자 두달치 임금도 채 되지 않는다.
“골치 아픈 얘기 그만하고 잠깐 눈 붙이고 일하자고. 그래도 농사는 말야,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이라 정년은 없어.”
김씨 아저씨 쓴 웃음에 패인 주름살이 농수로 보다 더 깊다. 불콰한 얼굴을 모자로 가리며 드러누운 그는 곧 가볍게 코를 곤다. 정자나무 그늘엔 바람 한 점 없고 햇빛은 더욱 뜨거워진다.
농사지어 뭐 남는 게 있어야지.hwp
첫댓글 농부의 삶,,여전해서 슬픈
느리게님, 다음 달은 7월6일이니 꼭 참여 부탁드려요. 시간되시면 한두 편 올려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