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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李 大 源 장 군 |
李 舜 臣 장 군 |
비교증감 |
본관(本貫) 시호(諡號) 출생(出生) 무과급제
수군만호(종4품) 수군절도사(정3품) 전사(서거일) 관직 추증(追贈) |
함평 忠烈公 1,566.3.7 1,583(18세)
1,586(21세) 1,587(22세)
1,587.2.20 손죽도해전(22세) 1,668(顯宗9)병조참판(종2품) |
덕수 忠武公 1,545.4.28 1,576(32세) 1,580(36세) 1,591(47세) 1,598.11.19 노량해전(54세) 1,793(正祖17)영의정(정1품) |
-21년
-14세 -15세 -25세 -32세 |
출생(出生)
이대원 장군은 1566년 병인년 3월 7일 (조선 명종 21년) 포승면 희곡리 194번지에서 부친 이춘방
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자는 호연(浩然)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함평이씨 시조의15세손이며 진사공(進士公) 휘(諱)성근(成根) 할아버지의 고손(高孫)이 된다.
유년기(幼年期)
그러나 점차 자라며 병도 없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여쭙는 것을 잊지 않았음
은 물론이요, 1571년 장군의 나이 6살 때의 추운 겨울날 부모님께서 갑자기 중병으로 누우시자 어
린몸으로 10여리가 넘는 안중 장터로 나가 산약을 구해 부모님을 간호하고, 나무를 해다가 방을
덥게 불을 때 드리는 등 그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니,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성년과 다름이 없었
다고 한다.
1570년(5세) 부터 1576년(10세)까지 한문공부는 물론 양성현 승양동 大德山 下 (지금의 희곡리
일대) 산골짜기에서 매일같이 무술을 연마하고, 활쏘기 말타기 칼쓰는 법, 병법 공부등을 하였다.
등용(登用)
1583년 (조선 선조 16년) 4월 이율곡 선생께서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만 양병설을 말씀하시
었을 무렵,
장군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본래 문신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무과에 응시, 당당히 급제하여 선전관
(宣傳官)으로 등과(登科) 하였고, 3년후 21세 되던 해에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전라도 고흥 반
도지방의 녹도만호(鹿島萬戶 : 從四品)가 되었다.
결혼(結婚)
결혼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장군은 무과에 급제 후 동래정씨 할머니와 결혼하였으나 신병
으로 곧바로 운명하셔 용인이씨 할머니와 재혼하셔 무녀독남(無女獨男)으로 참봉공 휘 권(權)할
아버지를 낳으셔 후사를 이어왔다.
손죽도(巽竹島) 해전1차 출전(出戰)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1587년 (선조20년 - 임진왜란 일어나기 5년전) 2월에 호남지방에 왜구가
수시로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자 이를 무찌르고자 임금께 출병(出兵)을 상소하여 선조의 승락이 떨
어지자,
2월 10일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 손죽도 인근 해상에 침공한 왜구 20여척을 무찌르고자 출
병하여 이를 대파(大破). 왜구의 목을 무수히 베어 1차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개선하였다.
상관 심암(沈岩)의 질투(嫉妬)
그때 그의 직속상관으로 있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조선시대 각 도의 水軍을 총지휘하던 正3
品의 외직무관) 심암(沈岩)은 그의 전공을 빼앗으려다 이장군이 듣지 않아 창피만 당하게 되어 원
한을 품게 되었다.
그 후 며칠 뒤인 2월 17일경에 또다시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으로 쳐들어 오자 심암은
이장군에게 무조건 출전명령을 내리었다. 이에 장군은 청하기를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명일에 진격하자"하였으나 심암은 피로한 병졸 백여명을 이장군에게 주며 끝내 독촉하여 적과 싸
우게 하니 이장군은 할 수 없이 명령에 의하여 출전 할 수 밖에 없었다.
2차 출전
2월 17일 병사 일백여명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에 출전한 장군은 용전분투(勇戰奮鬪) 적과 맹렬히
싸웠으나, 병력숫자로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도저히 싸울 수가 없어 본영(本營)에 구원병력
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고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만 클 뿐 당할 도리가 없어 대세를 각오
한 이장군은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절명시를 써서 수병(水兵) 孫大男에게 이 적삼을 나
의 가족에게 전달하라고 명하여 손대남은 장군의 애마(愛馬)를 타고 고향에와 전달하고 애마는 곧
바로 죽었다고 한다.
절명시(絶命詩)
日暮轅門渡海來(일모원문도해래) 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 건너오니
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군사는 외롭고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
君親恩義俱無報 (군친은의구무보)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를 보답하지 못하니
恨入愁雲結不開 (한입수운결불개)한스러움과 먹구름이 엉켜 끝내풀길이 없네
장렬(壯烈)한 순국(殉國)
이 시를 부하에게 전하고도 최후까지 싸우다가 불행히도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적을 꾸짖었다. 항복을 못 받은 적군은 저희 배 돛대에다 매어달아 참
혹하게 칼로 찔러 절명케 했는데 끝까지 적을 나무라는 그의 호령소리는 바다 위를 날카롭게 울렸
다고 한다.
생존자 수병(水兵)의 증언(證言)
그 후 선조실록 22권에는 그때의 좌수영 진부 김계동과 이연세 두 사람이 포로로 잡혔다가 천신만
고로 탈출해 왔다고 적혀 있고, 은봉야사별록(隱峰夜事別綠)에는 그 싸움에서 오직 녹도영(鹿島
營) 병졸의 한사람인 손대남이 살아 돌아왔다고 했으니, 이대원 장군의 절명시를 가지고 와 전해
준 사람이 곧 손대남이다. (※ 은봉야사별록은 안방준(호: 은봉)이 지음)
시신대신 속적삼을 고향땅에 장사(葬事)
장군의 절명시 28자가 적힌 속적삼은 1587년 2월 20일 장군의 명을받아 수병 손대남이가 장군의
애마를 타고 고흥에서 양성현(지금의 평택시 포승면)의 장군 집에까지 와 혈서가 적힌 속적삼을
말에게 물려 보내고 수병은 되돌아가고 애마는 적삼을 물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가족에게 전하고
죽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알고 속적삼을 고향 대덕산 밑에 묻어 장사를 지냈으니, 그곳이 평택시 포승
면 희곡리에 위치한 장군의 무덤인 것이다.
또한 장군의 애마가 죽어 장군묘지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매장 말 무덤(馬塚)이 지금까지 보존
되고 있다.
장군의 수사(水使)제수(除授)와 심암의 사형(死刑)
장군이 1차 손죽도 해전에서 승리한 사실을 전라도 관찰사가 선조에게 상소하여 조정에서는 심암
의 수사(水使)직을 거두고 이장군을 수사직으로 제수(除授:천거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바로
벼슬을 시킴)하였으나, 교지(敎旨: 조선 시대에 임금이 4품 이상의 관리에게 주는 사령, 관고, 관
교, 왕지)가 전달되기 전에 장군은 이미 순국하셨던 것이다.
조정은 이장군을 시기하여 억지로 출전시켜 죽게한 심암을 곧 묶어 올려 이대원장군이 순국한지
44일 만인 4월 4일 한양 당고개에서 처형하여 심암에 대한 벌은 속히 진행되었으나, 이장군에 대
한 표창은 더디어 80여년이 지난 顯宗9년 (1668년)에야 장군의 曾孫인 李錫 충청좌수사께서 현종
임금에게 “증조부 대원장군께서는 宣祖대왕으로부터 전라좌수사직을 除授하셨으나 敎旨가 到達
하기전에 殉職하셔 받지 못하였으니 再發給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요청하여 顯宗은 교지를 재발급하면서 병조참판(兵曹參判 : 從二品) 으로 追贈 하였고,肅宗6
년(1680년)에는 李錫장군께서 保社1등 功臣을 받아 忠臣으로 認定 받었으며 마침내 肅宗大王으
로부터 1699년(숙종25년)에는 고향에 神道碑를 下賜받고 정문(旌門)을 세워 그 忠節을 기리게 하
였으니, 顯宗의 교지(敎旨)내용은 다음과 같다.
敎旨: 折衝將軍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李大源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者 康熙 7年 8
월 初 2日 丁亥倭亂力戰 凶進 事承 (註, 강희7년 : 顯宗9년: 1668년)
이장군의 죽음을 애도(哀悼)한 노래
장군의 비장한 죽음을 듣고 고흥 해안에 살던 백성들 다음과 같은 슬픈노래를 지어 불렀다.
"어허 슬픈지고 녹도만호 이대원은 오로지 나라위해 충신이 되었도다. 배가 바다로 들어갈제 왜
적들은 달려들고, 수사는 물러가니 백만명 진중에 빈 주먹만 휘둘렀도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마을에 퍼지고 고을에 퍼지고 호남해안 여러 고을에까지 퍼졌다. 여자와 어린이들까지도 부르더
니, 다시 그대로 곡조에 올려 기생들까지 불렀다.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도 눈
물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右相 鄭言信의 아들이며 吏曹參判을 지낸 寒泉 鄭協은 다음과 같이 弔詞를 지었으니,
忠臣死國(충신사국) 충신이라 나라위하여 죽었고
烈士喪元(열사상원) 열사라 머리를 잃었으니
夫我何悲(부아하비) 내가 무엇이 슬프리오
子所安兮(자소안혜) 그대는 편안하리라!
위 시를보면 장군을 잃은 백성들은 마음이 진정 얼마나 슬펐는지 알 수 있다.
장군의 業績은 曾孫 忠淸水使 李錫의 상소(上訴)로 회복(回復)
장군이 순직한지 81년이 지난 현종9년(1668년)에 증손 이석장군이 현종 임금님께 상소하기를
1. 증조부 대원장군은 녹도 만호로서 손죽도에서 전사
2. 수사 심암은 서울로 압송 처형
3. 선조대왕께서 만호(萬戶)에서 수사(水使)로 제수(除授)하셨고 순직후 논공(論功)하여 증 직(贈
職)과 동시에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자손을 등용토록 특명(特命) 하셨다
4. 증직해주신 실첩(實牒)이 임진란 당시 소실되어 자손 된 자로 길이 보존 못하여 죄송하고
5. 장군의 아들 이권(李權)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18세에 이르러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제수하고
6. 장군의 아들 李權(이권)도 일찍 돌아가셔 손자 이준건(李俊健)도 유복자로 태어났으므로
7. 마을에서는 증조부가 병조판서 또는 병조참판으로 증직(贈職) 되었다는 등 소문은 있으나 교지
(敎旨)가없어 알 길이 없고 정문(旌門)조차 없어졌다.
8. 이 사정을 굽어 살피셔서 다시 정려(旌閭)와 증직첩(贈職牒)을 내려주시기를 바란다는 상소
현종은 신하를 불러 의논하고 그때 대사헌(大司憲) 조복양이 아뢰기를 선조대왕께서 특명으로 수
사를 임명하시고 죽은 뒤에 병조판서를 증직 했다는 것은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일찍이 松江 鄭澈
의아들 鄭起溟의 녹도가(鹿島歌)에 의하면 “6품 관직을 치켜 올려주었다”는 것은 믿을만하니
병조참판으로 증직된 것이 필연적(必然的)이라고 고(告)하여
현종대왕은 정문(旌門)을 다시 짓게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교지(敎旨)를 1668. 7. 14 재발
급하여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 위 내용은 노산 이은상의 저서(著書)인 “고흥쌍충사 사적(古興 雙忠祠 事蹟)”에 있음
신도비 수립동기(神道碑 竪立動機)
충청수사 李錫將軍의 아들 4형제 중 3남인 통덕랑 恒發공이 아버지의 命을 받아 1695년 5월에 漢
學에 밝은 친구 閔以升(1649~1697)을 찾아가 高祖父 大源장군의 傳記를 작성하여달라고 付託하
였고 민이승은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全羅左水使 贈 兵曹參判 李公傳”을 편찬하였다.
그 뒤 항발공은 李公傳을 領中樞府事 藥泉 南九萬(1629~1711)에게 전달하며 고조부의 신도비를
요청하여 마침내 “有名朝鮮國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行折衝將軍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李公神道碑銘”을 지어 承政院 右副承旨 竹泉 金鎭圭(1658~1716)의 篆字와 京畿
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趙相愚의 글씨로 비석을 새겨 1699(숙종25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장군의 사당(祠堂)
장군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은 전국에 걸쳐 4군데가 있으니,
1. 평택 확충사(䨥忠祠)
경기도 문화재등록
○ 지정번호: 제56호
○ 지정일: 1980. 6. 2
○ 지정내역: 희곡리 산83-6 임5643평방미터, 신도비, 묘역
이장군의 출생지로서 절명시가 적힌 속적삼과 두 부인이 묻힌 무덤과 1699년 세워진 神道碑이장
군의 사망후 사당을 지어 추모해 오다가 1597년 이곳을 침입한 왜적이 사당에 불을 지르자 갑자기
뇌성벽력과 소나기가 와 불이 꺼졌으며 뇌성번개는 장군 혼백의 호통이라고 전해지며 그때 왜병
은 놀라 도망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라에서 소나기 확(䨥)자를 써서 확충사라고 사액(賜額:임금
이 사당,서원등에 이름을 지어 줌) 하였다.
뇌성벽력은 장군의 혼백이 왜적에게 질타하는 것이고 소나기는 사당을 진화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제향일(祭享日) : 음력 2월 20일이었으나, 평택시청에서 확충사가 경기도문화재로 등록되어 중앙
관상대에 문의한 결과 1587년 음2월20일이 양력으로 3월28일이라고 회신 받아 1980년부터 3월
28일로 祭享日로 변경)
2. 고흥 쌍충사
소재지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 2202번지
忠烈公 李大源 (1566~1587)장군만 모셨다가 1593년에 忠壯公 鄭運(1943-1593)장군과 함께 배
향한 사우(祠宇)이다.
이대원장군이 왜구와 싸우다 순국하자 선조께서는 고흥 녹동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
다.
한편, 함께 배향되어 있는 충장공 정운 역시 수군 장수로서 1591년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이대원
장군 다음의 녹도만호로 부임하였던 인물인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장
군과 함께 옥포, 당포, 한산등에서 선봉장으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몰운대에서 1593년
순절 (당시 나이 54세) 하셨다.
이에 그의 상관이던 이순신장군은
"이대원과 정운이 서로 전후하여 녹도만호를 지냈었고 이대원 사당이 아직 이 포구에 있으니 정
운을 이대원 사당에 같이 모시기를 청하나이다." 라는 장계를 선조께 올려, 1593년 두 분이 합향
되게 되었다.
1597년 정유년 이 땅을 다시 침략한 왜구에 의해 두 분의 사당은 불타게 되자, 이듬해 녹동의 수군
병졸들이 힘을 모아 초가 두어칸을 얽어매고 제사지내기를 80여년 해오다가, 1682년 (숙종8년)
임척, 서봉영등 호남 유림들이 청액소를 올려 이듬해인 1683년(숙종9년) 쌍충사(雙忠司)라는 액
호가 하사되고, 조정에서 제관이 파견되어 제를 올리게 되었다.
그후 근대에 이르러 1942년 일인에 의해 빈터가 되었다가, 1947년(순국360년) 해방후 이장군 순
국 6주갑(360년)이 되는 해에 '녹도쌍충사 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현 신실과 강당을 다시 개축하
였다.
제향일(祭享日) : 매년 4월 30일 (2009.4.30 충렬공 影幀 奉安式 行事를 擧行함)
奉祀主催: 慕忠會:鄕校儒林(2009.1.1현재 모충회장: 金幸吉 ☎ 011-9430-0088)
3. 손죽도(巽竹島) 충렬사(忠烈祠)
○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1164번지
○ 문화재 지정번호: 239호
○ 문화재 지정일 및 면적: 2003. 5. 27, 대지 198평방미터. 건물 6평.
손죽도는 장군의 전사 이후 크게 손해본 섬이라고하여 손대도(損大島)라고도 불렀다.
장군이 손죽도 해상에서 순국하자 손죽도 마을 주민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남쪽 뚝박골에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초가로 얽어 사당을 짓고 춘추로 제사 지내며 두세번의 중수를 거
듭하면서 면면히 이어오다가 1983년, 또 다시 사우가 퇴락하자 마을주민의 정성으로 이를 중수하
고 여천군으로 부터 충열사라는 사액을 받아 현판하였다.
그후 충열사가 2003년 전남 문화재로 등록되어 도비 1억원을 받아 여수시청에서 2004년에 중건
하였다.
손죽도 주민은 장군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1주일 전 사당 주위에 인줄 (부정을 막기 위해 길이나 문
에 건너질러 매는 금줄)을 띠고 집집마다 개를 매어놓아 개와 사람이 일절 통행을 금지시키고 제
사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부부생활도 금하며 식수는 새벽에 약수터에서 길어다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였다. 매년 집집마다 쌀1되씩 공납시켜 엄숙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향일(祭享日) : 매년 음력 3월 3일
4. 여수 영당(影堂, 影堂址)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30-4번지 돌산 어항센타 (전남 지방문화재 제6호)
여수시 남산동 (현 돌산대교 서쪽 입구)에 영당이 있었는데 여수지방의 해신당(海神堂)으로 어민
들의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는 고려말 충신 최영장군을 배향하여
왔으나 임진왜란 후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으로 이대원장군, 정운장군등 3위를 추가 배향하였
다고 한다. 세 장군을 추후 초혼하여 배향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세 장군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던 영장이라, 이 지방 유림에 의해 해신(海神)으로 영당에 모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출어하는 어선들은 반드시 고사미 2말씩을 공납하고 무사안전 항해를 기원한 후 출어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5월 6일~7일중 기상관상대에 문의하여 비가 오지 않는 날로 택일하여 풍어굿으로 四
장군(최영, 이대원,이순신,정운)에게 제사를 지낸다.
주최: 향토민속문화 보존회(2009.1월 현재 이사장: 정흥수 ☎ 011-617-6681)
자료제공: 함평이씨 평택대종회장(사재감정 종회) 이욱헌(☎ 010-5448-7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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