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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녕성씨유래의 문헌적 고찰
고려시대의 토성연구 및 한국의 성씨와 족보연구의 대가 이수건교수는
"역사학에 있어서 실증적인 방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한 문헌자료를 '설화문학’또는 위서로 간주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역사적 자료로 이용한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며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을 강조하고, 문헌 자료도 무조건 믿지 말고, 진실과 허위를 제대로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책에 나온다고 다 믿으면 책이 없느니만 못하다."라는 맹자(孟子)를 인용하기도 했다.
본 논문작성은 첫째, 문헌자료를 원문 그대로 인용했다. 둘째, 각 문장 마다 출처를 표기(예:1-28은 자료 1의 28면)함으로서 고증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라는 논쟁을 사전 차단했다.
1.중국成씨와 한국成씨와의 연관성
1)중국 成氏에서의 유래설
-姓氏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單系혈연 집단의 명칭이다. 조선 성종 24년2월(1493) 계축보에서 창녕성씨의 유래 “중국 주문왕의 일곱째 아들 성나라 淑武의 후손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가 실제로 ‘중국 황제의 후예이며 주황실 황족의 후손’이라고 칭한 姓씨들을 보면 그 진위여부를 떠나 成씨, 任씨, 강씨, 석씨, 노씨 등 18개성이나 된다.
-成씨는 원래 중국 姓씨로, 중국에서 성(成)씨는 周나라 계통하고 超나라 계통으로 나뉘여져 있다.((사기세가(史記世家),183면)) 춘추시대 초나라의 4대 유력 세족은 투씨, 성씨, 굴씨, 위씨가 있다. 그 중에서도 초의 14대 군주 약오(若敖)에서 파생, 분파되어 나온 문벌중 투씨와 성씨 가문이 절대적인 기득권을 장악했고 ~~유력 세경가(世卿家)를 뜻하는 말로 투씨, 성씨 양 가문을 함께 지칭하는 말이다. ~ 하지만 투월초의 반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명사수 양유기의 화살에 죽어 실패하며 자신은 물론 약오씨(투씨, 成씨) 전체의 멸문지화를 초래한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에서의 성씨(成氏) 인물 중 成得信은 ①투백비(鬪伯比)의 아들이며, 투누오도(鬪穀於菟)의 아우이다. ②초성왕(楚成王) 대의 초(楚)나라의 영윤(令尹)이다. 자는 자옥(子玉). ③[ ~632, 令尹(재상)은 楚나라 장군으로서 晉나라 문공과의 성복대전때 중군원수로 참가해 자만심에 대패하며 스스로 자결하자 초성왕은 아쉬워함 -成대심(아들) -成호(손자)], 이때부터 成씨의 입지가 크게 약화됨.((출처:[열국지] 진(晉)과 초(楚) 유력 세경가(世卿家) 계보))
2)한국 족보의 진위(眞僞)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麗末이래 역대 유학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인물의 世系는 대개 중국의 帝胃.名賢의 후예로 우리나라에 내주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고려 士族들은 대개 모화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찾았다는 데서 현존 족보상에는 그 시조가 중국 출신이 많다. 이는 대개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출처: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2003.6.10. 서울대학교출판부 발행)]
-따라서 후세족보상의 姓씨出自는 사실로서 인정하기 어러운 것이 많다.(이규보 주장) 이러한 풍조는 후대에 올수록 심하여 자기 혈통을 고귀하게 만들기 위하여 모성 또는 족보를 날조하는 등 폐단이 많았다.(1-28) 신라의 최치원. 최언위 등 6두품 출신 문사들에 의한 승려들의 비문에는 유교적인 모화사상으로 인해 우리의 성씨가 주로 중국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3-35)
-한국의 족보사상 板刻成冊하여 刊布한 것은 안동權氏成化譜(성종7년,1476)가 최초이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족보를 발간했거나 초고 또는 초안해 놓았던 가문들은 조상세계와 족계에 대해 일단 중간적인 정리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후기에도 내용이 충실한 족보를 속간 할 수 있었다.(창녕성씨 계축보는 1493년 발간)
3)독자적으로 創姓했다는 說
-태조 왕건은 개국 초기부터 측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중앙 세력에게 姓을 많이 하사하였다. 고려 건국 이전에 姓氏가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근거로는 고려 초기의 戶長을 시조로 삼은 예가 많음을 들 수 있다. 호장이었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는 광주이씨, 한산이씨, 창녕성씨 등 17개姓이 있다.(출처:성씨(姓氏)의 유래(由來),작성자 화풍.)
-신라下代 이래 내려오던 종래의 신라貴姓(이.김,박,정,최,손,배씨의 본관수가 모두 458貫)과 冒姓한 중국의 유명성(송,윤,장,신,전,오,조,황씨 등 30여성의 본관수가 574관)을 제외하고는 羅末麗初 까지 지방호족들이 자신의 이름을 아화(雅化)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稱姓하거나 그 족단 수장의 고유명이 그대로 한자로 아화(雅化)되어 姓으로 되면서부터 姓씨의 본관數가 적은 姓씨가 많아졌다. 열거해보면 9개본관: 朱, 成, 許, 羅, 房 등 78개 姓이다.(1-31)
(註: 그 당시 成씨는 단일 본관이 아니었다.<출처>: 周文王 희(姬) 姓에서 파생된 직계氏 - 成씨 本貫 數:창녕 成(167,903명), 강릉 成(3,305명), 경주 成(2,621명)..달천 成(130명), 양근 成(130명) 도합 14개 본관, 인구수 184,555명)
<필자의견> 成씨는 姓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없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姓이었던 듯하다. 成씨는 중국의 유명姓 모방姓에 포함되지 않았다.
“麗末이래 사족(士族)의 선대 향리 관련 자료의 연변과정을 살펴보면
①선대의 세계(世系)를 소급하다가 향리 직함(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기관(記官) 등)이 나올 때 이를 버리고 그 후손 중에 관인(官人)을 택해 시조로 하는 경우, ②조선 후기 족보처럼 선조(先祖)의 향리직함 대신에 아예 고귀한 관직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창녕成씨 시조 중윤공 성인보의 직함을 계축보에서 당당히 ‘호장’으로 표기한 것은 대단히 용기있는 정직한 서술이다.
2.중국역사 문헌에 등장한 成씨 인물
-<춘추전국이야기>/<열국지> --성득신(초나라 총사령관, 성복대전에서 참패하여 자살), 성대심, 성가(成嘉)(성득신 두 아들 ), 성호(성득신 손자)/ 성백결(사씨의 사위) -성차(成差, 진나라 장수)- 성하(成河, 秦나라 사신)
-<사기세가(史記世家)> -성능군(成陵君, 위나라를 정벌한 적장(翟章)의 봉호)/ 成安君은 연나라 장수로 공손조와 함께 혜왕을 살해하였다.(燕나라:B.C. 222년 멸망)
-<여씨춘추>-성공고(成公賈)
-<사기본기> -성교(成蟜)~ 진나라 진시황의 이복동생으로 추정/成 ~ 진시황 낭야순시에 수행한 인물(진시황 사망 B.C. 210년)
-<사기열전(史記列傳)> -성개방(成開方, 제나라 왕의 시의(侍醫) 수(遂)는 병이들자 ~“신은 일찍이 제나라 479년 허난성 안양현 무도리(武都里)에서 성개방(成開方)이라는 자를 진찰한 적이 있다.”/ 성사(成巳, 다른 문헌에서는‘성기’라고 표기, 위만조선의 대신) /성형(成荊, 또는 成慶 전쟁의 용사)
-<혹리열전(酷吏列傳)> -성신[(成信, 관중에는 양공과 성신(成信) 등이 있었다.)]
-<춘추논쟁> -성풍(成風, 문공의 조부인 장공(莊公)의 첩)
-<삼국지100년도감> 성의(成宜, 조조에게 일제히 반기를 든 장군, 조조155~ 220년)
<필자의견>현재 중국 成씨와 우리나라 成씨와의 연관성을 문헌상 고증하기 어렵다.
3.창녕成씨 본관은 왜 창녕인가?
-이중환은 “고려가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姓을 갖게 되었다.” 하여 우리나라 한성의 보급시기를 고려초로 잡고 있다.(1-70) -유명성씨의 시조를 보면 개국. 삼한, 통합 등 여초의 각종 功臣號를 가진 인물이 아니면 麗初 州縣鄕職者(戶長. 元尹. 軍尹 등)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1-71)
-<표2> 각 姓貫의 선조世系 자료를 통해 본 시조의 성분 유형(3-260)
(A)三韓공신과 호장을 겸유한 姓貫 ~ 개성王, 평산申 등 76개姓
(B)三韓공신과 관련 자료가 없는 성관 ~ 안산金, 인천李 등 26개姓
(C)토성吏族(戶長層)을 시조로 한 성관 ~ 창녕成, 창녕曹, 밀양朴 등 177 개姓
<필자의견> 창녕성씨는 土姓吏族을 시조로 한 姓貫으로서 창녕을 본관으로 하게 된 것이다.
4.成씨의 등장시기는?
1)창녕成씨 이전에도 이미 成씨가 존재했었다.
신라 6세기 진흥왕(540~576) 때부터 姓씨의 사용이 본격화 되었다고 보여진다. 신라는 9주.5소경에 정책적으로 중앙의 귀족을 이주시킨 결과 왕경의 신라貴姓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토성의 分定시기는 비록 고려초라 하더라도 그 토성의 씨족적 유래는 벌써 신라때부터 있어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토성분정 시에는 신라의 진골.6두품 계층이나 성주.촌주로서 이미 한성을 가진 성단은 그 성씨를 가진 채 각기 출신군현의 토성이 되었고, 아직 한성을 갖지 못한 세력은 自稱姓하거나 賜姓과 동시에 토성으로 책정되는 두 가지 경우가 예상된다.(3-101)
(1)<표1> 9州의 토성(人吏姓. 百姓姓. 亡姓 포함)(3-102)
①양산(良州)/ ②상주(尙州)/ ③진주(강주) ④강릉(명주) ⑤춘천(삭주) /⑥廣州(한주)/ ⑦공주(웅주)/ ⑧전주(全州) / ⑨光州(武州)~ 卓, 李, 金, 張, 鄭, 朴, 許, 潘, 成, 承 등 13개姓
<新羅 武州> - 무주(武州)는 원래 백제의 땅인데 신문왕 6년(서기 686)에 무진주(武珍州)로 만들었고, 경덕왕 16년(757년)에 武州로 개칭한 것으로써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출처: 삼국사기 제36권 잡지 제5(三國史記 卷第三十六 雜志 第五)
<필자의견> 태조 왕건은 통일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 작업과 함께 군현토성을 분정했다.(태조23년부터, 940년)(3-103) 그 당시 9주의 하나인 武州(현 광주)에는 이미 土姓(13개姓) 成씨가 살고 있었다. 이는 최초의 문헌상 등장한 成씨 기록이다.(창녕成씨라고는 볼 수 없다.)(3-102)
그러나 <표4>고려태조 23년을 전후한‘10세기에 나타난 지역별 姓貫’에서 보면 경상도(32本)에 창녕成씨는 없다.(3-117)
(2)郡望表에 있는 姓자로서 본관 수가 많은 것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李, 2.金, 3.鄭, 4.宋, 5.尹 ~~47.朱. 48.成(순위 48번째),~ 168.米, 169.壽, 170.水丘(170개 姓) (3-103)
(3)삼국사기 지리지에서‘實地’까지 역대 지지에 의거 고려시대 경주에 속했던 任內의 연혁과 姓氏條를 정리하면 <표7>과 같다. 940년경(태조23년)
경덕왕以前
| 景德王時 | 고려초改名 | 고려초改編 | 15세기초 邑格 | 實地 소재 姓氏 |
斤烏支縣
| 臨汀縣 | 迎日縣 | 고려현종9년來屬경주 | 迎日縣監 | 토성3. 鄭, 成, 朱 |
<표7>경주부에 영속된 군현의 연혁과 [實地]姓氏條(3-129)
<필자의견> 위에서 보면 성씨(토성)는 940년경 영일현(지금 영일)에 있었다.
(4) 고려시대 시기별.지역별 군현토성(본관)의 진출현황(3-89)
*경상도 지역에서
-고려전기에 귀족 또는 고급관인을 진출시킨 군현(본관)~ 경주,밀양 외
-후기 또는 麗末에 비로소 고급관인을 진출시킨 郡縣(본관)~ 昌寧,영산 외
(5)고려.조선시대 향리를 배출한 姓貫 (3-278~280)
경상도~ 창녕 成. 曺. 張. 河 /전라도~ 同福 吳. 朴. 成
(6)울산부 호적대장에 의거 울산주민들의 姓貫((광해군 1년, 1609년))
- 實地에 없던 姓씨~~ 울산을 본거지로 하는 40여성씨 중에 成씨가 있다.
(7)세종실록지리지 姓氏條의 각 邑別 姓種과 姓貫 分布表(강원,경상,전라)
고려시대 成씨 분포지역은, 강원도 金化縣/ 경상도- 迎日縣(烏川), 昌寧縣, 功城縣(상주), 鎭海縣, 班城縣(진주),有實部曲(사천)/전라도- 森溪縣(장성), 昌平縣(담양), 同福縣(화순), 光州牧, 會寧縣 / 平安道 - 高原郡(고려시대 高州) 등 13縣이다. (3-353~369)
2)창녕성씨의 등장시기(인물)
(1)고려초.전기 군현토성에서 상경 종사하여 명문.거족으로 성장한 姓貫들의 상대世系 명단 48개姓 (3-261~264) /(2)고려전기(태조왕건~의종1170) 250년간에 활약한 3품 이상 고급관인(3품이상) 550명 명단(2-2~3) /(3)고려사 世家(태조~현종1031) 소재 인물의 姓씨별 통계에서 78姓(王씨 제외) 439명 명단(1-32) / (4)<표>고려태조 23년을 전후(940년경)한 10세기에 나타난 141개 姓貫(경상도 32個本)통계(3-117) / (5)고려무신 정권 62년간(명종26년,1196~고종~1258)에 등장하는 인물 375명(출처:에드워드 슐츠 著, 무신과 문신). 위 5개자료에서 고려초부터 1258년까지 340년간 成씨(인물)는 등장하지 않는다.
**반증자료**
1.<표> ‘고려사’ 인명색인에 의거 ‘실지’ 소재 주요 姓들이 대부분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다고 본다. (3-267)
1)100명 이상 관인을 배출한 姓 --이(990명), 김(957명), 최(514명)~
2)10명~ 99명 까지 관인을 배출한 姓~ 고(99명), 강(95명) ~ 成(21명) 등
2.고려.조선시대 명문 거족 姓貫 (3-279)
-경상도~경주金(이,최,박,정,손,배~, 창녕成(曹, 張, 河)/ 전라도~동복吳(朴, 成)
<필자의견> 위에서 본바와 같이 고려초부터 고종44년(1258년) 까지 340여년간 成씨 인물이 正史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창녕成씨의 등장시기는 고려중엽 이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成씨는 고려초기부터 존재했다고 했다. 관인 21명을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9주의 무주(광주)의 기록으로 보아 문헌상 최초 등장은 560년경(진흥왕 19년, 540~576)이다.
성종(成宗)~ 삼국시대 신라의 비열홀주 초대 군주를 역임한 관리/ 출생.사망일 미상 / 556년(진흥왕17) 7월 당시 사찬((沙飡. 17등 관계(官階) 중의 제8등 관계로서 520년(법흥왕 7)의 율령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진골 이외에 육두품도 받을 수 있었으며, 흔히 제1급 행정관부의 차관직에 보임되었다. 공복(公服)의 빛깔은 비색(緋色)이었다.))의 관등에 있던 그는 마침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다. 비열홀은 본래 고구려의 군(郡)의 하나로 이곳에 설치되었는데, 신라가 진흥왕 때 이곳을 장악하면서 주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가 설치되자 그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종(成宗))]
成氏는 중앙정부에 출사하지 못하고 향촌유지로 이어져 온 것 같다.
창녕성씨 중시조 성여완(1309-1397) 이전에 고려사에 나타난 成씨(창녕成씨가 아닐 수도 있다.) 인물은 다음과 같다.
-成允 ~고려 성종16년(997년)에 淸州人 成允이 등장한다.(고려사 권제35兵1)
-成厚(영흥진의 군사) ~ 문종3년(1049년)
-成甫, 成國(별장,7품)~고려 헌종때 ‘이자의난’(1075.7) 가담자(‘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201면)
-성일(成一) ~ 충열왕때의 군인 (1274-1298/ 1298-1308)
5. 왜, 成씨인가?
-한국의 姓.本貫제도는 중국의 한식姓氏제도를 수입.모방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그 시기는 羅末麗初에 걸쳐 한국에 활발히 수용되었다.(3-81) 羅.唐간의 활발한 문물교류와 신라의 한화정책에 의하여 한식지명의 개정과 함께 중국의 유명姓氏를 수입.모방하게 되었다. ~‘實地’소재 姓字들은 대부분 唐代의 氏族志나 郡望表 또는 通志略 소재 유명 姓字를 모방했던 것이다.(3-82)
-군현의 전신인 城.村이 후세 군현으로 개편될 때 그곳을 지배하던 종래의 성주.촌주들이 라말여초에 걸쳐 호족이 되었고 이들 호족 가운데는 종래의 신라貴姓인 경우가 많겠고 그 다음은 고려왕조의 성립과 함께 국가로부터 사성을 받는다든지 또는 중국의 유명성을 모방하여 자칭성함으로써 고려초기에 와서는 경향을 막론하고 지배세력 아니면 대개 한성화하여 각읍토성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상경종사한 재경세력이나 재지이족들은 모두 토성출신이었다.(1-48)
이상에서 볼 때, 成씨유래를 두 가지로 가정해 볼 수 있겠다.
(1)실지 중국 成씨 후손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는가? (2)아니면 창녕지역에서 중국의 유명姓씨인 成씨를 모방하여 창성, 칭성, 모성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될 것 같다. 고증은 어렵지만 중국 成과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계축본 제작시 그 당시 시대상에 便乘했던가 아니면 어떤 근거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 문제는 후손들이 두고두고 연구.고증할 과제이다.
<종합의견>
1.成씨는 姓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없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姓이었던 듯하다. 成씨는 문헌상 중국의 유명姓.모방姓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수건교수는‘창녕成씨 유래를 독자적 稱성이나 族團수장의 고유명이 한자로 雅化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창녕에서 누대로 중앙 출사없이 살아오다가 고려중엽 한성화 과정에서 창녕성씨로 創姓 또는 稱姓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麗末이래 사족(士族)의 선대 향리 관련 자료의 연변과정을 보면 先대의 세계(世系)를 소급하다가 향리직함(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기관(記官) 등)이 나올 때 이를 버리고 그 후손 중에 관인(官人)을 택해 시조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3.姓씨의 시조라 함은 이 땅에 맨 처음 나타난 분이 아니다. 족보(또는 계보)에 맨 처음으로 기록되신 분이 그 시조다. 각 姓씨들이 한반도에 오랜기간 동안 살았어도, 후손을 이어 왔어도 족보 등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후손들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조 중윤공 성인보는 中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고려건국 초기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成씨도 累代로 창녕지역((밀성군(密城郡의 屬縣)) 족장(향촌)세력으로서 한성화 과정에서 ‘토성吏族(戶長層)을 시조로 한 姓貫’으로서 창녕을 本貫으로 하게 된 것이다. 成씨(토성)는 940년경 영일현(지금 영일)에 있었다. 창녕成씨 이전에도 成씨가 있었고, 통일신라 시대 九州의 武州(광주)에 成씨가 있었다. 그 당시 成씨는 단일 姓이 아나라 본관수가 많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고려시대 成氏는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 3도의 13개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5.始祖中尹公의 출생연대나 創始연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始祖公의 玄孫이 되는 이헌공(怡軒公)인 휘여완(諱 汝完)의 출생연도가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기준해서 역산해 보면 1189년(고려 明宗 19년)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創姓연대는 公의 장년성숙기인 40세경으로 추산되고 있다. 시조의 得姓은 賜姓이라든지 귀화姓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創姓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사회상으로는 벼슬이 높다든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姓을 만들었던 때였으므로 中尹公도 鄕職으로 戶長의 지위에 있었고 또한 세력있는 지방통치자의 姓을 만드는 上層에 속했을 것이고 자손들의 관계진출도 생각하여 스스로 姓을 創設했을 것이다.(창녕향토사 제5집, 창녕토착성씨考, 창녕문화원 1999.12.20)
6.成씨는 고려초기부터 존재했다고 했다. 관인 21명을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9주의 무주(광주)의 기록으로 보아 문헌상 최초 등장은 560년경(진흥왕19년, 540~576)이다. 成氏는 중앙정부에 출사하지 못하고 향촌유지로 이어져 온 것 같다. 창녕성씨 중시조 성여완(1309-1397) 이전에 고려사에 등장한 成씨(창녕成씨가 아닐 수도 있다.) 인물은 成允, 成厚, 成甫, 成國, 成一(성일) 등 4명이다.
7.창녕成씨 족보에 등재된 시조공 부터 4세 까지, 9분은 ‘고려사’,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등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품계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본다.
8.한편‘중국 주문왕의 일곱째 아들’이라는 내용에 대해 오늘에 와서 후손들이 그 명성을 훼손시켜서는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헌상 고증이 어려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도 조금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시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향후 정확한 考證이 될 때까지는 始祖東來設을‘설화문학’차원에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1.고려시대 토성연구(이수건, 영남대학교, 1979)
2.고려전기 토성연구 (이수건, 대구사학회, 1978)
3.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서울대출판부, 2003)
4.신라시대 성씨 취득과 그 의미(이수건, 서울대국사학과,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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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성 범 모(대종회보편집장, 경제칼럼니스트)
첫댓글 창녕성씨 문중의 과거청산의 선봉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